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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의 능력 / 고전 4: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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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손상률 (후암교회)
† 설교제목 :하나님 나라의 능력
†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4:14~20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람이 모인 단체는 모든 조직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론과 명분이 있어야됩니다. 동시에 그 공동체의 힘을 결집시키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실적이 나타나야됩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논리적 근거나 명분이 없으면 지속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고 또 거기 따르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력하게 주저앉고 말게됩니다.

본문 말씀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무성한 이론과 명분을 내세우면서 아무런 실적도, 행위의 열매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고 책망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종말론적 메사야 왕국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곧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를 더 엄격하게 말하면 불완성을 지니고 있는 지상교회로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무성한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행사하는 기관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능력을 잃은 교회라면 하나님의 나라로써 기능을 상실한 것이며, 사실상 죽은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써 그 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Ⅰ. 믿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17:20). 또 마가복음 9:23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이 없는 신비로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1)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을 정의하면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고 하였습니다. 곧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하였습니다(요일5:5). 믿음이라고 해서 무엇이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바른 믿음이라야 그 속에 생명이 있고 거기서 신비로운 능력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며, 그 고백이 바른 신앙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앙고백을 기초로 하여 자기 교회를 세우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16:16-18).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 구약 성경말씀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엡2:20).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의 권세와 능력은 말씀 중심의 바른 신앙으로 행사되는 것입니다.


(2)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7:16-18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좋은 믿음에는 반드시 거기 맞는 열매가 맺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실천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 행사됩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으로 말미암아 조난을 당했을 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유령인줄 알아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베드로에게 물결 위로 걸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성큼 물 위에 발을 딛고 걸어갔습니다(마14:29). 또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자를 향하여 “손을 내밀라”하고 명하시니 그가 즉시 오른손을 내어 밀수 있었습니다(마12:13). 이와 같은 일들은 믿는 그대로를 행동으로 옮겨 실천할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3) 지속적인 능력과 축복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일시적이거나 단회적이 아닙니다. 믿음이 살아 있는 한 그 능력은 언제나 나타나게 되는 법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세상의 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그 실효성이 달라지지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역대의 신앙 인물들과 그들의 사적이 소개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시대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역사 위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고 힘이 있었든지 결박과 옥에 가두는 것 뿐 아니라 돌로 치고 톱으로 켜고 칼로 목을 잘라도 끄떡없이 이겨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히11:36-38).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잘 지키면 천 대까지 믿음의 복이 이어진다고 하였습니다(출20:6). 신약의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바른 믿음과 이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시간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사역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건강도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유지되며 증진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활동을 정지하고 그냥 있다면 그 기능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 곧 주님의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할 때 그 능력이 공급되고 배가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설립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세워지는 자기 교회로 하여금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계승하게 하시며 그 일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능력을 그침 없이 공급하여 주십니다. 마태복음 9:35에 “예수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1)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이는 교회의 교육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으로 교양 하시며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제자로 훈련시켰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마음과 행동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이 있은 다음 사람들은 크게 감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28-29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너무나 위대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본래 배운 지식이나 경륜이 없는 사람이었지만(행4:13),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왔고, 이들이 바울을 통하여 신앙교육을 받아 초대 교회에 기둥 같은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디모데와 디도, 빌레몬, 누가, 마가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전도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친히 전도 사역에 주력 하셨으며 또 그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고취시켜 세상으로 내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마4:19). 곧 죄악에 오염된 죽음의 바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물 속으로 끌어내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그들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내어 보내실 때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마10:6).

오늘날 사도적 교회는 그 신앙을 계승하여 전도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8:18-20).

교회가 전도하여야 할 지역은 온 세계까지이며 그 대상은 모든 족속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전도 사역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세상 끝 날까지 그침 없이 그 능력을 공급하여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교회)는 전도 사역을 통하여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3) 치유의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가르치시는 것과 전파하신 것 외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일입니다(마4:23). 마태복음 11:5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소개하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질병과 불행을 치유하신 사역입니다. 육체의 질고 뿐만 아니라 귀신에게 시달리거나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정신적인 모든 문제까지 친히 맡으셔서 이를 해결하시고 치유시키는 능력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사역은 역사적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계승해 오면서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이 신령한 사역들을 세상의 다른 기관이 아닌 주님의 교회가 수행하게 하시고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였습니다.


Ⅲ. 생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교회의 생산성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들이 그렇고, 25장의 종말론적 교훈인 달란트 비유도 모두 투자에 따르는 많은 소득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생산성을 단순한 전도를 통하여 수적인 증가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설립자이신 예수님의 의도에 충실하며 계획성 있는 정책과 전략을 수행하므로써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무한한 능력인 것입니다.


(1) 본능적 욕망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식을 생산하기 원했고 또한 자식의 생산을 최상의 축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생명적 기능을 가진 교회가 생산적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어야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에 상관없이 낳고 낳는 일을 통하여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셋을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낳았으며 에노스는 게난을 낳았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마할랄렐은 야렛을, 야렛은 에녹을,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았으며…라고 하는 등 생산적인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1-16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등으로 이어지는 생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까지의 계보를 소개한 것이지만, 그것 역시 낳고 낳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능력이 행사된 것을 보게됩니다.

신약의 교회운동은 성령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생산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기하급수로 불어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산력을 해산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신앙 인으로 키운 많은 사람들을 「자녀」또는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본문 17절에는 디모데를 “신실한 아들”이라 하였고 ,또 빌레몬의 종 되었던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몬1:10).


(2) 잉태하는 즐거움입니다.

성경은 여인에게 있어서 잉태하는 행복을 가장 귀한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의 몸 종 하갈이 잉태하여 주인을 멸시한다고 속상해 하다가 이삭을 낳고는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창16:5-6, 21:8). 한나도 대적 부닌나가 잉태한 후 저를 격동케 하므로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았습니다(삼상1:6-20). 야곱의 아내들도 서로 남편을 차지하고 자식을 낳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창30:14-15).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공통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령한 의미에서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욕구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성도가 제각기 영적 자녀를 잉태하고 해산하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전도할 대상자를 작정하여 자기의 마음 속에 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생산력이 있는 임산부가 되어 태신자를 잉태하므로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4:1에는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멀리 신약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임산이 불가능해 보이던 사람들까지 성령의 충만으로 수많은 신앙의 자녀를 양산하여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사54:2).


(3) 새 생명의 신비입니다.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은 매우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시간과 보이지 않는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새 생명의 가치는 모든 대가를 치르고도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16:21).

성경은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마16:26).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나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3:3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거듭남의 도리는 성령으로 다시 나는 중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귀하고 신비로운 사역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겼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새 생명운동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행사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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