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역사적 혜안을 가져라 / 대상 12:19 - 37

  • 잡초 잡초
  • 316
  • 0

첨부 1


역사적 혜안을 가져라
역대상 12 : 19 - 37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다윗은 블레셋 골리앗 장군과의 한판 싸움에서 물맷돌 하나로 보통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승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은 일약 구국의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 없는 환호가 화근이 되어 마침내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었다는 이 한마디는 비참했던 다윗의 당시의 형편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때 시글락에 숨어있는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약 7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에게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집권자인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몰려오는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소위 역전의 용사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사울의 친척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본문 12장 32절에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이른바 역사적 혜안을 가지고 한사코 믿음의 행진을 감행한 자들입니다. 어떤 혜안입니까?

Ⅰ. 타락한 사울 왕조의 멸망(滅亡)을 예 견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에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5절에도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은 인간의 후회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후회는 자신의 결정이나 행위가 정도를 벗어난 것이 인정되어 거기서 뉘우치고 깨우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의 배신에 대한 신적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배역행위에 대하여 인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적 표현입니다.
민수기 14장 43절에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하나』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의 멸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죄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에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화하지 아니한 죄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버린 죄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고 했습니다.

5)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한 죄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에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8절에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결코 변개치 않는다고 했습니다(삼상 15:29).

Ⅱ. 다윗 왕조의 부상(浮上)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예선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선}(라아, )은 "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선택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창 22:8; 41:33; 왕하 10:3).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4), 사울보다 나은 사울의 이웃(삼상 15:28) 등의 성경의 표현을 감안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예선하였다는 말씀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인간적인 기준에 의해서 백성들에 의해 선발된 왕(삼상 16:7; 행 13:22)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택된 왕입니다(삼상 16:7; 행 13:22).

2)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2-13절에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세 차례에 걸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식적으로 은밀히 부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인정될 때 부어졌습니다(삼하 2:3-4).
세 번째는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 받았습니다(삼하 5:3).

3)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도자적 역량과 은사를 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기름부음을 받을 때 나이가 20세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정식 왕으로 등극한 나이는 30세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선택해 놓고 10년 이상을 지도자적 자질로 훈련시켰다는 것입니다.

4) 다윗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8절에 {소년 중 한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5) 다윗은 신앙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7장 45-46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라고 했습니다.

6) 다윗은 겸손한 인격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4장 11절에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옷자락만 베고 살려주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9절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사울을 재차 죽일 기회를 얻었으나 기름 부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 때문에 두 번째 살려줄 때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찾아다니는 정적 사울왕에게 이렇게도 겸손했습니다.

Ⅲ. 다윗에게로 모이는 결속운동으로 나 타났습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것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1) 역전의 용사들이 스스로 왔습니다(12:25, 33, 36, 37).
이스라엘 전국 각 지파에서 용사들이 시글락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2)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왔습니다(12:1, 21, 22).
이 모임은 지역을 초월한 모임입니다. 이들은 다윗을 돕고자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달려온 자들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이해관계나 명예나 가문의 이기가 작용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사울의 가족들까지 있었습니다.

3) 천부적으로 받은 탁월한 재질을 가지고 왔습니다(12:2, 8).
처음에 다윗을 따랐던 가난한 자나 소외되고 의지할 데 없는 약한 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맨 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전공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시말하면 자기가 가진 장기(달란트)를 다윗을 위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for Christ) 살듯이 다윗을 위한 삶을 향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이 모였습니다. 자신의 삶은 수단이 되고 다윗을 돕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생 낙오자들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 자들이 분명합니다.

4) 모험을 하면서 왔습니다(12:15).
저들은 요단강물이 만수위가 되어서 모든 강이 넘칠 때 그 강을 건넜습니다. 오는 도중에 대적을 만났으나 물리치고 온 자들입니다.

5) 성신의 포로가 되어 왔습니다(12:18).
본문 12장 18절에 『때에 성신이 삼십 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가로되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하리니 원컨대 평강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신이 감동했다'는 말은 성신의 포로가 되었다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들을 인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성경은 그때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을 위하여 쓰여진 시간적 한계를 가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고 오는 세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적용범위에 있어서도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삶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민감하게 돌아가는 시대적 상황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개인의 삶에 적용시켜서 성경적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성경이 필요치 않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막가는 세상입니다. 여과작용이 필요없는 세상입니다. 앞선 자의 지혜가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객관적인 지식이 짓밟히는 세상입니다. 감각적이요 육체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속에 살아가야 될 오늘의 우리는 세상을 보는 역사적 혜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그 시대의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감행했습니다.
성경에서 오늘의 시세를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세상을 측량하는 잣대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눈이 나쁘거나 육신의 불편함도 괜찮은데 듣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롬 10:17). 이것이 계시종교의 특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듣는 가운데 시세를 압니다. 시세를 알기 때문에 설교를 듣게 됩니다. 저 이스라엘의 각 지파 용사들이 악신에 들려있는 사울의 때가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사울을 피하여 시글락에 숨어있는 다윗을 중심하고 모인 것처럼 시세를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자들을 데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중심하고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신앙적 일치, 사상적 일치, 행동의 일치를 이루어가야만 합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힘이 없는 세상입니다. 힘이 없으면서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 편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에 유혈이 낭자하고 있다는 실상을 아는 사람은 교회로 나옵니다. 이사야 1장 6절에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라고 했습니다.
믿어야 될 사람이 믿지 아니하면 물리적인 제재가 따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된 확실한 증거입니다.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개인이나 가정은 언젠가는 망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지만 악인(불신)은 망한다고 했습니다(시 1:1-6).
겉으로 보기에 악신에 들려 미쳐있는 사울이 얼마나 화려하고 의기양양했습니까? 그러나 다윗에게로 왕권이 옮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사코 다윗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잘 되는 세계입니다. 이 세상 우상과 타락과 무질서의 세계는 잘못되어 가는 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5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교육적 기능이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기성세대들의 도덕성을 개탄하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상대적 빈곤감에서 오는 열등의식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부의 정책적인 방안이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궤도수정이 우리가 살길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핑크빛 정치적 공약 앞에 흥분될 때가 아닙니다.

북한의 핵무기도 사실은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이 세상은 끝장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을 때 오는 심판입니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표준(標準) 내지는 기준(基準)이 없다는 것입니다. 표준과 기준을 상실한 세상은 혼돈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표준이 없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진정 현대인들을 다스릴 왕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표준과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하여 이 세상의 성분들을 파악하는 역사적 혜안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자극하고 희한한 것들로 우리를 유혹합니까? 실로 과학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묶어 놓기에 충분합니다. 이 세상은 호기심 천국입니다. 호기심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호기심을 충족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존재나 위엄도 용납이 안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인간들의 수치이자 불행입니다.

악한 것은 응징된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반드시 살아남을 생의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가 가야 할 방향감각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양 달란트를 귀하게 여기고 묻어두지 아니하고 선용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축복스럽게도 이러한 영적인 분별력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운동을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신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고 믿을 때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