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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자의 인생 경영 /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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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목사님 설교말씀 :::





김양인 목사  작성일시 - 2003년 03월 27일 목요일 오전 00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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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인생경영




설    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설교제목 : 지혜로운 자의 인생 경영
성경말씀 : 누가복음 12:13-21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애쓰고 힘쓰는데도 불구하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더구나 외딴 산골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과 더불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행불행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소위 사회 문제라는 것이 개인의 행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지금 북한 동포들은 하루 세끼 식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북한 아이들의 굶주려 앙상한 모습을 화면이나 사진으로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탈북자들의 대부분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반면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먹는 문제는 벌써 해결했습니다.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탈북자가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가 천신만고 끝에 탈북에 성공해서 남한에 와서 그를 보호하는 관리에게 두 곳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 두 곳을 보면 남한 사회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가 요구한 곳은 교도소와 쓰레기장이었습니다.

먼저 교도소를 간 그는 죄수들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것은 죄수들이 다 혈색이 좋고 살이 찐 것이 북한의 간부당원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먹지를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상태인데, 남한의 죄수들은 얼마나 잘 먹이면 저런가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쓰레기장에 가보았는데 거기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버리기에 아까운 물건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남한에 좀 더 살다보면 처음 느꼈던 행복감을 많이 상실하게 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생활수준을 비교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가 남한 사회에서 적응을 잘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북한에서의 생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할지라도 그리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가치관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인생관은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가진 자질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관이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지만, 인생관이 잘못된 사람은 세상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실패한 자로서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생관은 무엇일까요?


첫 번 째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려면 자기 생명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이 존엄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존엄한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대홍수 후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명하시기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로 보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이라면 사람의 생명이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특별히 존귀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소중한 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경시하고 죽이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부자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이 부자가 그 해 농사를 지었더니 대풍이었습니다. 곡식 쌓아 둘 창고가 부족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궁리하다가 한 가지 좋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런 다음, 이 부자는 풍성한 재물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혹 보면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통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 비하면 이 부자는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의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탐탁치 않게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부자는 그 날 밤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부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자기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따라 좌우되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인 명예도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이 아쉽다고 하나님을 섬긴단 말인가? 가진 것이 없고 많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비는 것이지 나 같이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부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보시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할지라도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곡식을 저장해 둘 창고를 새로 크게 짓기로 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재테크에 능한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부자를 어리석다 함은, 자기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한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쉼 없이 코로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창세기 2장 7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호흡을 지속하고 계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그 시로 주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주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물 한 방울로도 죽을 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살고 오라 하시면 지체 없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자처럼 여러 해 쓸 물건을 창고에 쌓아 놓은 사람도, 또는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건,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일이 있건 간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일을 고스란히 두고 이 땅을 하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알 때에 우리는 불신자들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입니다(히 2:). 그러므로 겉으로는 용감한 척해도 속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죽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성도들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4장 7절로 8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할렐루야!

세상 사람들이 욕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아는 성도들은 시험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우리 생명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아시고 늘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 째로, 탐심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에 자족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기를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장자가 다른 형제보다 두 몫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신 21:17).

그런데 그 사람의 형은 아마 부모가 남긴 재산을 혼자서 다 차지했나 봅니다. 따라서 동생이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랍비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한 것은 조금도 비난 받을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불쾌해 하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고 하시고 앞서 살펴본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태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은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분쟁에 개입해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나 남의 상속 재산을 나누는 일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주님을 잘못 알고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날도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곧 세상의 구주로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로 9절에는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영혼의 구원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다면 그 사람은 탐심 때문에 나온 자로서 주님의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왔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생기기도 전에 탐심 때문에 도로 세상길로 가버리는 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씨앗이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동기에서건 불신자가 교회에 발걸음을 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믿으려면 일단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는데 교회에 오면 예수님에 관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잔치 자리에 초대 받아 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되고 소중한 기회입니까!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씨앗이 그 마음 밭에 뿌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시니 뿌려진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은혜가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가 가만 두지 않습니다. 마귀가 자기 백성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때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환난과 핍박을 가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후자는 인간의 탐심을 이용한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 보다는 직장에 나가 일하면 돈을 얼마 벌 수 있을 텐데, 마음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깝게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와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귀는 초신자와 신앙연조가 오랜 신자를 불문하고 시험하니까요. 누구든지 탐심에 넘어가면 그 때부터 시험에 들어 재물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탐심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우상 숭배인데 탐심이 바로 그 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일평생 하나님을 잘 섬기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기 원하는 성도님들께서는 무엇보다도 탐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영혼의 만족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애타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은혜가 얼마나 고상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회심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자랑했고, 당시 최고의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또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또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섰고 이 일로 대제사장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만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딜 가도 대접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이후로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빌립보 3장 7절 이하에서 그는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믿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소유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성도님들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같이 재물을 통해서 영혼의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생명의 구주를 알지 못하니까 재물을 많이 가지면 인생의 행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올 줄로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큰 일 납니다.

한 세상 사노라면 형통할 때도 있고 역경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하다고 교만할 것이 아니요 가난하다고 기가 죽을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같이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재물이 많건 적건 탐심을 버리고 주 안에서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심으로 참 행복한 인생을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두는데 힘써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까닭은 그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즐거움과 안락을 위해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새로 큰 창고를 짓고 여러 해 쓸 물건을 거기에 가득 채워 놓으려고 했습니다. 또 그는 일벌레처럼 일만 하면서 한 세상을 보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누리면서 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인색하였습니다. 세상 향락을 누리는 데는 천금이 아깝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드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나 깨나 자기만을 위하고, 제 가족만을 위하고, 자기가 속한 집단만을 위하여 일할 뿐, 하나님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부자는 평생을 이기주의자로 살다가 그 많던 재산을 고스란히 두고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 안스러운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 불꽃 가운데 떨어져 고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있는 건강, 재능, 물질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청지기인  우리에게 당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재산을 관리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면 주인에게 책망을 받고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마치 제 것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사용하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과 재능과 재물을 허탄한 일에 낭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아 둡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 곧 보화를 하늘나라에 쌓아두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헌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는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며칠 앞두신 때였는데,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주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안을 진동하는 향유 냄새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은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옥합채로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가 분내어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낭비하느냐? 이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만히 두어라. 이 여자를 괴롭게 말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너희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고 있으나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는 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다.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헛된 낭비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주님의 책망을 받았지만, 소중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아낌없이 부어 드린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과 함께 신앙인의 참된 본보기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건강이 있을 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시간이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마음 두지 마시고, 지금 나에게 여력이 있을 때 복음 사업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드린 헌신과 봉사와 재물은 하늘나라 창고에 영원한 상급으로 쌓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께 삶을 의탁하고 살아가십시오. 탐심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에 자족하시고, 보물을 하늘 창고에 쌓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롭고 성공적인 인생을 경영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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