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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 요 12:20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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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요 12:20-26)


고통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없다. 얼마 전 미국에서 상영된 영화 중에 'Beautiful Mind'라는 영화가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써 정신병자와 천재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이다. 정신병자인 남편을 항상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접함으로써 노벨상을 받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밀알의 종교'이다. 한 알의 밀알처럼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놀라운 생명의 기적을 이뤄 놓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밀알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시려 했던 영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함께 묵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째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처럼 미미한 존재로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해 준다.

그는 참으로 가난하고 학대받는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고 멸시와 조롱을 받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는 친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 천하게 태어나서 30년간 노동을 하시고 3년간 공생활을 통해서도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의 친구로서 사셨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며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시다가 체포되어 가진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고문을 받으며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억울하게 창과 칼로 옆구리를 찔리우시고 고통 당하시다가 운명하셨다.

참으로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처럼 별로 맵시도 없는 미미한 한 알의 밀알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약한 자의 모습으로 억눌린 자의 모습으로 소외되고 학대받는 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그러한 오클로스(민중)들을 온갖 억압과 착취와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둘째로, 그 미미한 한 알의 밀알 속에 위대한 생명이 있음으로 말해준다.

생명은 위대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존재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계보다 그 능률이나 노동력에 있어서 부족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생명이 있기에 인간은 고귀하고 존귀한 것이다. 생명은 아름답다. 생명은 존엄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잘 생긴 얼굴이라도 그 생명이 떠나가면 그만 보기가 싫어진다. 정이 딱 떨어진다. 무서워진다. 그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력은 위대하다.

생명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요 일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가끔 '목숨이 몇 개가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그 하나밖에 없고 일회적인 목숨이라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인생을 사랑하고 모험하며 살아가야 한다는데 삶의 스릴이 있고 삶의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릴 수 있을 때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즉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땅에 묻히고 썩으며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역설적인 진리가 여기에 담겨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말씀했다.

이것은 놀라운 삶의 역설이다.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으며 줌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계산법이다. 그러나 영적 계산법에 의하면 맞는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 뚜렷한 삶의 진리인 것이다.

일본인 작가가 쓴 [이기려면 버려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집착을 버리므로 강해진다"고 했다. 한 알의 밀이 자기 하나만을 위해 보존 될 때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차가운 땅에 떨어져 땅에 묻힐 때 거기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다. 죽는 것 같으나 살게되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께 나갔을 때 위기 속에 직면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탈북자 25명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중국의 스페인 대사관에 뛰어들었더니 살 길이 열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면 오히려 사는 길이 열린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이 해방 후 선교사들이 있을 때는 50만 성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산치하에서 믿는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고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오히려 지금은 1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다.

옛날 로마의 도미니안 황제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핍박을 받고 순교했다. 주로 그들은 화형을 당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바울도 아그립바왕 앞에서 재판 받을 때 내가 결박된 것 외에는 여러분이 모두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훌륭하고 거룩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찌 그를 죽이는 자들이 금수가 아닐진대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졌고 죽는 그를 오히려 부러움과 존경심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교자의 피와 희생이 결국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바꾸어 놓는 기적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희생이 없는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원래 제사는 반드시 속죄물을 희생시켜 바침으로 제사가 되었다. 그래서 영어로는 제사를 sacrifice(희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희생이 없는 제사(예배)를 드릴 때가 많다. 또 드리려고 생각한다.

'희생이 있는 제사' 그것만이 산 제사요 영적 예배이다. 공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살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삶이 희생이 있는 영적 예배요 산 제사인 것이다. '희생이 없는 제사'란 말처럼 욕된 말이 없다. 그것처럼 죄악적인 말이 없다. 희생이 있는 곳에 새 역사가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의 역사가 동트게 된다.

오늘은 특별히 저희 교회에서 귀한 새 일꾼들을 임직하며 한평생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하시는 분들을 위한 의식이 있는 날이다. 연령이 되면 은퇴는 있지만 사역에 은퇴는 없다. 그러므로 임직받으시는 분들이나 은퇴하시는 분들이나 모두 남은 생 동안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30배, 60배, 100배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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