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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통곡 /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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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베드로의 통곡
성경귀절 : 누가복음 22:54~62
설교목사 : 이선우목사
   

오늘 말씀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깊은 절망에 빠져 통곡하는 베드로에 관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열심히 따랐던 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붙잡혀 법정으로 끌려 갈 때에 베드로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가운데 어떤 제자는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가 그것마저 던져 버리고 도망하기도 했다. 3년 동안 주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다녔던 제자들이었지만, 또 주님이 가는 곳이면 어떤 위험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따라가겠다고 했던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과는 달리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간 제자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쉽게도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했다. 법정으로 끌려가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님을 따랐다.

54절의 말씀을 보시면, 베드로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어떻게 보면,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간 제자들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주님을 완전히 따르지 않고 주님과 일정한 간격을 두었던 것이 그가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그가 필연적으로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 것이다. 주님을 부인하고 통곡한 베드로의 실수는 단 한가지, 바로 “간격”이다. 주님과의 간격이 주님을 부인하게 했고, 주님을 부인하고 결국 통곡했다.

베드로는 이처럼 통곡을 했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판돈을 성전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자기의 잘못을 돌이키고 회개의 통곡을 했지만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는 주님과 멀어진 간격을 영원히 줄이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회개의 통곡으로 그 간격을 줄였다. 베드로가 어떻게 통곡을 하였는가? 오늘 본문 61, 62절에서 자세히 말해 주고 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첫째, 베드로는 생각이 났다.

베드로는 주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던 겁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말씀 하셨는데,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세 번 부인하고 말았다. 고난과 심문을 받으시던 주님이 그 법정에서 돌이켜 그를 응시하는 순간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안고 통곡했다. 베드로가 통곡한 것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의 비겁함이 생각났기 때문에 통곡했다. 이처럼 생각은 참으로 중요하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잘못이 생각났다. 오늘 여러분들은 갈보리 십자가에 주님을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이 나는가? 복음성가 중에 “갈보리 십자가에”라는 찬양이 있다. “갈보리 십자가에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 크신 사랑 너무나 고마워라” “예수님의 십자가 이제는 나도 지고 이 생명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리라.”
갈보리 십자가에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이제는 나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이 생명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리라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베드로는 밖에 나갔다.

베드로가 앉아 있었던 그 자리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의 자리이다. 또 그 자리는 그가 주님을 따르리라고 그렇게도 다짐했던 각오가 무너진 불신의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법정에서 고난과 심문을 당하시던 주님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베드로는 충격적인 사실을 경험했다. 주님을 불신하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를 주님은 그 때까지도 여전히 관심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비참해진 베드로는 도저히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베드로가 그 자리를 떠난 것은 어떤 의미라고 볼 수 있는가? 배신의 자리에서 떠나 철저하게 돌이키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또한 무너지고 망가진 그 불신의 자리에서 변화의 자리로 나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불신과 배신의 자리,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리, 남을 속이는 자리, 타협하는 자리, 이러한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셋째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다.

이 말은 극적인 표현이다. 그저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니라 심히 통곡했다. 우리말에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말은 완전히 부인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심히 회개의 통곡을 했다.

베드로의 이러한 통곡의 회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용서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그 사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또한 세 번씩이나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을 모두 용서해 주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했다. 주님은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들도 어떤 죄를 범했던지 베드로처럼 심히 통곡의 눈물을 흘리면, 주님이 완전히 용서해 주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우리들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늘 넘어지고 쓰러지며 살아가고 있다. 또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갈대와 같기도 하고, 조그만 돌 하나를 던져도 파장이 일어나는 물결처럼 중심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베드로처럼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돌아보십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다운 삶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가감 없이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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