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사와 그 목적 / 고전 12:4-7

  • 잡초 잡초
  • 404
  • 0

첨부 1


Subject  은사와 그 목적
고린도전서12:4-7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성령의 은사란?

  지난주에는 성령의 두 가지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한다면, 첫째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主로 잘 섬기도록 恩賜를 주시는 일입니다.  오늘부터는 바로 그 恩賜에 대해서 몇 주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란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주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직분이나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은사에 대해서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恩賜"라는 용어입니다.  恩賜란 헬라어로 χαρισμα(카리스마)인데 선물(gift)이란 뜻입니다.  선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주로 複數形으로 사용합니다.  두 번째 용어는 "職任"입니다.  직임이란 헬라어로 διακονια(디아코니아)인데 직분, 직책의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집사"란 말로도 번역이 되고, "섬김"이란 말로도 번역됩니다.  영어로는 service(봉사,용역), 혹은 administration (운영, 집행)으로 번역됩니다.  세 번째 용어는 "役事"라는 용어입니다.  헬라어로는 ενεργηματων이라고 했는데 기능이나 작용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operation (AV), working(NIV,RSV,JB)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세 가지 용어를 합하여 보면 은사란 무엇인가 분명히 설명이 됩니다. 은사란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는 두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직분의 은사이고, 둘째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기능적인 은사입니다.  구체적인 예가 다음 구절에 나타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 방언, 방언 통역(8-11절)이 있습니다.  28절 말씀에 보면 또 다른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등등.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유익을 주기 위해서 주신 직임이나 능력들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은사를 받습니까?  일단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주로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도 있습니다.  참 신자가 아닌 자에게도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가룟 유다는 12제자를 보내실 때에 함께 가서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에게서 성령의 은사는 떠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주로 성도들에게 주어지지만 극소수의 예외도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은사를 구원의 증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부 교파에서 보면 방언 같은 은사들을 구원의 증표로 삼으려고 합니다.  은사는 대부분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렇다 해도 예외가 있다면 구원의 표식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은사는 언제든지 주어질 수 있고, 언제든지 회수될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아무튼지 은사는 주로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은사는 內住하시는 성령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內住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 속에는 성령께서 임재하여 계십니다.  잠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居하십니다.  지금 내 안에 성령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구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 자체가 벌써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 증거입니다.  內住하시는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교통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행할지라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은사는 아주 다릅니다.  각 사람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혹은 필요에 따라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시지도 않고, 각자 다르게 주십니다.  때에 따라 주실 수도 있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속에 임하였던 은사들은 나중에 다 떠나갔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떠나버리면 일정한 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악한 영이 지배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 사울 왕이 그랬고(삼상),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잘 간직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용도에 사용해야만 합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두 번째로 다룰 주제는 다양성과 일치입니다.  본문에 보면 똑 같이 세 번 반복된 단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나....같고(같으며,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과연 몇 가지나 될까요?  어떤 사람은 8절 이하의 말씀처럼 아홉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28절에 보면 사도, 선지자, 교사, 다스리는 능력, 돕는 능력들도 포함됩니다.  13장에 보면 사랑의 은사가 나옵니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성령의 은사는 무한대로 많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천 명이면 천명, 만 명이면 만 명이 다 다른 성향과 재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란 말의 헬라어는 διαιρεσισ(디아이레시스)인데, 단어적으로는 "분배"(distributing)라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들을 적절히 분배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주시지 않고, 다양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문 성경에는 διαιρεσισ를 "diversities", 즉 "상이함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같은 은사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중요한 것은 은사가 다양하지만 서로 조화되고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같다는 말 앞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붙어 있습니다.  "성령은 같고...주는 같으며...하나님은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삼위이시나 일체십니다.  바로 이런 속성이 모든 피조물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연계를 보십시오.  천체들이 무한대로 많지만 자기 위치를 지키며 질서 정연하게 움직입니다.  원자나 분자가 무수히 많지만 일정한 결합을 하여 화학적 성질이나 물리적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이 무수히 많지만 같은 모양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같은 줄기에 붙어 있는 나뭇잎도 정확히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수정체 구조가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체들을 만드실 때에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다양한 종이 있습니다.  멘델이 유전법칙을 알아내기 전 까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종의 다양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잡종강세"라는 말이 있지요?  근친 교배보다는 다양한 개체가 섞이는 것이 개체의 건강에 좋습니다.  순수하게 근친 교배를 하면 열등한 개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친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게 이유가 있어요.  요즘에 보면 환경 파괴로 말미암아 멸종 생물이 많아지고 종이 단순화되고 있습니다.

1600년대 이후로 멸종된 포유류만 해도 100종이 넘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만도 식물 35종, 곤충 24종, 어류 29종, 포유류 21종, 조류 36종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種이 단순화되었을 때 큰 위기가 옵니다.  공생 관계가 깨지고 생태계가 무너집니다.  결국은 인간 자신도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다양한 종으로 덮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건강하게 어울려 살도록 하셨습니다.  다양성 속의 조화!  그것이 바로 창조 세계의 질서입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획일화 된 사회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가 건강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다양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 주범이 바로 매스컴과 상업주의 문화입니다.  기업들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수시로 유행을 전파합니다.  매스컴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 하도록 강요합니다.  누가 어떤 옷을 입었다고 선전하면 모두가 따라서 입습니다.  누가 거지 머리를 했다고 하면 전 세계 청소년들이 다 따라서 합니다.  같은 옷, 같은 신발, 같은 머리, 같은 화장품....장사꾼 농간에 놀아납니다.  특히 매스컴은 획일화의 주범입니다.  파리와 뉴욕에서 어떤 유행이 나타나면 북경에서 연변까지 따라서 하도록 선전합니다.  뉴욕에서 맥도날 햄버거를 먹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북경에서도 똑 같이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배우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이상한 춤을 추면 온 세상이 따라서 합니다.  매스컴과 상업주의는 인간 사회를 획일화로 몰아갑니다.  매스컴 덕분에 사회 집단도 획일화 됩니다.  우리 사회를 보세요.  진보는 보수를 용납 못하고, 보수는 진보를 용납 못합니다.  서로 죽일 놈 취급을 합니다.  정당들을 보세요.  내편 아니면 원수입니다.  무슨 정치 노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오직 편가르기 뿐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 사회를 가리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주류에 속하지 않으면 망하는 사회다!  우리 문화는 줄서기 문화요 기대기 문화입니다.  항상 主流에 서지 않으면 왕따 당하는 사회입니다.  소수의 의견이 없고, 비주류는 철저하게 무시해버립니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어디에 줄을 설까 하고 보따리 싸서  왔다 갔다 합니다.  건강한 야당이 있어야 사회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몰라요.  야당하면 망하는 줄로만 알아요.  야당 할까봐 사생 결단을 하고 하늘이 두 쪽이 나느니, 세 쪽이 나느니 하면서 달려듭니다.  다양성을 용납 못하는 사회, 그래서 획일성만 있고 조화가 없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이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성도들마다 다양한 직분, 다양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은사들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직분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은사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각자 가진 은사가 다 중요합니다.  서로 존중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숨은 봉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에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은사의 목적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유익한 목적에 사용해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절)  여기서 유익이란 말은 개인적 유익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for the common good"(NIV),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현대인의 성경),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공동번역) 등의 뜻입니다. 

  우리는 각자 남이 갖지 못한 독특한 것들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산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술이 있습니다.  예술적 소양, 지식, 話術, 기억력, 기발한 생각을 잘 해내는 창의력...사람마다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런 특성들은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이 됩니다.  돈을 벌고, 지위를 얻고, 유명해지고, 자랑하고,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소유나 재능을 주신 것은 욕망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살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가 1901년 66세 때에, 일생동안 키워온 철강회사를 처분했습니다.  그가 받은 돈은 4억 9200만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동안 기부한 액수는 3억 2465만 7399달러였다고 합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재산 528억 달러(약63조원) 대부분을 앞으로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을 때, 그것은 자만과 자랑의 수단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사용해야 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은사도 그렇습니다.  은사를 이기적 목적에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은사는 자기를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셨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령한 교제를 하라고 주셨습니다.  사도직을 주신 것은 군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양무리를 잘 양육하고 인도하라고 주셨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돈 벌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환자들을 살려내고 구원하라고 주셨습니다.  어떤 은사도 개인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을 높이도록 하세요.  앞서서 말씀드렸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主 되시게 하는 것이 은사 사용의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은사가 개인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남을 위하다 보면 결국은 그 혜택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어떤 신문에 보니까 "장수의 비결"이란 제목의 칼럼이 있습니다.  미시간 대학의 심리학자인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가 최근 발표한 연구 보고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재미있습니다.  423쌍의 노인 부부를 대상으로 5년 간 조사 분석한 결과 생존한 사람들 가운데 여성의 75%, 남성의 75%가 아무 대가 없이 남을 도와 준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에게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은 뜻하지 않게 일찍 사망할 확률이 60% 가량 줄어든다는 얘기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은 결국은 내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면 교인 개개인도 건강합니다.  교회가 성숙되면 개인도 성숙됩니다.  교회가 부해지면 개인도 부해집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개인도 부흥됩니다.  교회는 支離滅裂 되는 데 개인만 복 받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잘 되어야 개인도 잘 됩니다.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결국은 내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은사들을 아낌 없이 공동체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직분이나 능력입니다.  은사는 수 없이 다양하지만 서로 조화되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은사를 바로 알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