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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바르게 기도합니다 / 마 6:5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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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르게 기도합니다(마6:5-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자기의 전 가족과 더불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해외여행이 흔하게 이루어집니다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에 나가는 일이 뜸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여러 교인들이 그 가족을 배웅하기 위해서 김포공항으로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대합실에 빙 둘러서서 잠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대표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기도가 여간하지를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은 한참동안 인류의 타락에 대해서 기도하더니 노아의 홍수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또 솔로몬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 이곳저곳을 두루두루 다니면서 장황하게 기도했습니다.
장로님은 구약성경에 대한 기도를 다 마치고 난 뒤에는 신약성경으로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을 거쳐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드디어 기도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장로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기도를 아주 잘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흡족한 듯이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장로님은 힘주어 아멘 소리를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당연히 모든 교인들도 자기의 기도에 화답해서 "아멘"이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 2명만 "아멘"이라고 화답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기도를 한 당사자인 장로님 자신이었고, 또 한 사람은 예배를 인도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장로님과 목사님, 단 두 사람만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딱하다는 듯이 장로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기도 중에 노아의 홍수가 시작될 때 한 사람씩 두 사람씩 홍수에 떠내려가더니 결국은 다 떠내려 가버리고 이렇게 장로님과 저만 간신히 살아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줄 압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설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자녀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역시 잘못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저질렀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열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일부러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두 손을 들고서 꼿꼿하게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장황하게 오랫동안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시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드려야 할 바른 기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했던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드리는 바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가 날마다 바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우리의 기도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응답되어짐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5절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시간으로는 3시, 6시, 9시였습니다. 이것을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면 오전 9시, 낮 12시, 그리고 오후 3시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급적이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본시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의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즉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왜 성전에 올라갔습니까? 제 9시, 곧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회당을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시간을 맞추어서 자기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하고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자체는 아주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자체를 나무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에 힘을 쓰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기도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서 감히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외모만 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고, 그의 마음 중심도 환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살피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또 기도할 때도, 금식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어떤 점에서 외식적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는 말씀 앞에 세 개의 수식어가 있습니다.
첫째,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입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동기입니다.
둘째, "회당과 큰 거리"입니다. 그들이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장소입니다.
셋째, "서서"입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자세입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기도의 장소와 기도의 자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선 기도의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회당을 찾아갑니다. 가는 도중에 불현듯이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시간이 지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서 부지런히 회당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그만 기도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회당의 입구든지, 아니면 큰 거리 어귀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멈추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연히 그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또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앉아서 기도할 수도 있고,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보편적으로 취했던 자세가 바로 "서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신을 뽐내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세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했습니까? 세리도 역시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서 기도하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서 일부러 꼿꼿한 자세로 서서 손을 높이 들고 오랫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한 마디로 그들이 기도했던 동기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를 찾아간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선 자세로 기도한 것도 역시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사람들 앞에 자기들을 내보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5절 끝 부분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 기도 잘하는구나!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구나!"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받을 상은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중언부언하던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7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은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meaningless repetition"입니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컨대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똑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든지 흘러내리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도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기간을 정해놓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해서 전심으로 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 따로, 마음 따로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본시 중언부언은 이방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타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똑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들은 똑같은 말만 온종일 반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언부언입니다. 또 사도행전 19장에도 한 예가 나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서 연극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두 시간이나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역시 중언부언입니다. 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이와 같이 중언부언합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자기들의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가 길면 길수록, 기도에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바알을 부를 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의 중언부언은 네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그들은 바알을 잠에서 깨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잠자는 바알을 깨우기 위해서 바알의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둘째, 그들은 송아지를 잡아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주변을 돌면서 뛰어 놀았습니다. 자기들의 춤과 제물로서 자기들의 신인 바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아첨을 떨어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피를 흘렸습니다. 아마도 바알을 협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것입니다.
넷째, 그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귀찮게 해서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잠에서 깨워야 됩니다. 아첨해야 됩니다. 협박해야 됩니다. 귀찮도록 졸라대야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기도할 때 이방인들의 잘못된 영향을 받아서, 그들마저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암송하던 두 개의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첫째, 쉐마였습니다. 히브리어인데, 우리말의 뜻은 "들으라"입니다. 신6:4-9, 11:13-21, 민15:37-41의 말씀을 발췌해서 그들은 쉐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기도문을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둘째, 쉐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이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18이라는 숫자를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18가지로 압축했습니다. 그리고는 각 경우에 적합한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기도문이 길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마다 그 장황한 기도문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기도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기도문을 진실한 마음으로 정말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암송을 했더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암송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도가 아무리 길었다 한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의 의는 이방인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낮은 수준의 의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드리는 바른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하나님께만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은밀한 기도의 모습을 세 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형편이 괜찮을 경우에 자기 집 안의 구석진 곳에 작은 골방을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방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아닙니다. 귀중품이나 그냥 내버리기 아까운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사람에게 보일 우려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문을 닫고"입니다. 문을 닫아야지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의 시선에서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 시끄러운 소리에서 차단될 수 있습니다. 모든 방해를 다 차단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른 기도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의 자세의 문제인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아무리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표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수직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바른 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6절 끝 부분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드러나는 기도, 외식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찾아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등을 돌려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귀를 막으시고 응답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은밀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였습니다. 불란서의 어느 해안에서 영국군 33만 5천명이 독일군들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독일군들은 포위한 영국군들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육해공군을 총동원하기로 작전을 짰습니다. 이제 영국군들은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의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이 소환되었습니다. 의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성토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 나라가 이렇게 되도록 수상은 무엇을 했느냐?"
의원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처칠을 향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처칠은 듣는지 마는지 그저 눈을 감고서 태평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화가 난 국회의장이 처칠을 보고서 한 마디 했습니다.
"아니, 모두가 나라를 위해서 이토록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수상이 되어서 기껏 졸고만 앉아있다는 말이오?"
그러자 처칠은 조용히 눈을 뜨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졸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나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우리나라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그를 비난하던 모든 의원들이 숙연해졌습니다. 처칠은 자기 골방 속에 들어가서 마음의 문을 닫고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위기에 처해있는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말에 자극을 받은 의원들은 불필요한 논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모두가 함께 기도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서 나라와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포위된 영국군이 있는 곳에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이 자랑하던 전차들은 진흙에 빠져서 무용지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폭우와 짙은 안개 때문에 독일군의 전폭기들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서 포위된 영국군들 모두가 안전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뒤에 역사가들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원한 것은 바로 처칠 수상의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서 위기에 처한 영국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의 간구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은 것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구할 때도 있습니다.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구할 때도 있고,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떡이 있어야 하고, 생선이 있어야 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 대신 떡을 공급해 주시고, 뱀 대신에 생선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5:8에서 말씀하기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향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처럼 바른 기도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응답되어짐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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