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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운 것 - 위선의 속 / 사 30:15 ~ 18 , 계서 3: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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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것 - 위선의 속 / 2003년 3얼30일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30:15 ~ 18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말을 타고 도망 가겠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정말로, 너희가 도망 갈 것이다. 너희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차라리 날랜 말을 타고 달아나겠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너희를 뒤쫓는 자들이 더 날랜 말을 타고 쫓아올 것이다. 적군 한 명을 보고서도 너희가 천 명씩이나 도망 가니, 적군 다섯 명이 나타나면, 너희는 모두 도망 갈 것이다. 너희가 도망 가고 나면, 산꼭대기에는 너희의 깃대만 남고, 언덕 위에서는 깃발만이 외롭게 펄럭일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서 3:1 ~ 6
  "사데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23:23 ~ 28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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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이사야서를 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서 나라가 망하기 직전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또 군부 내에서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앗시리아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길은 야웨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현실주의자들이 모여서 앗시리아 군을 이기기 위해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이전에 종살이하던 이집트의 도움을 받자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집트의 지원을 받자는 쪽이 대세를 이루어,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가서 원군을 청합니다.

이집트는 요청을 받아들여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앗시리아가 이기고 이집트는 패망합니다. 그런 난리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앗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기가 막힌 역사적 현실이 다가옵니다.

바로 이 틈바구니에서 예언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리아 군인 1명이 오면 너희 이스라엘 군인 천 명이 무서워 도망가니, 적군 다섯 명이 나타나면 너희들은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사야의 이 말을 미루어 보면, 당시 이스라엘 군이 약 5,000명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너희가 그렇게 도망가고 나면, 산꼭대기에는 너희의 깃대만 남고, 언덕 위에는 깃발만 외롭게 펄럭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체의 국방력으로 나라를 보호한 적이 없습니다. 조그맣고 약한 민족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출애굽 후의 가나안 땅에 정착해 있으면서도 야웨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적군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셔서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의 국방력 가지고 살았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기시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이방신을 섬기지 않고 야웨 하나님만 섬기고 충성하며 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섬기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 하나로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고픔과 추위 목마름으로 인해 수없이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앗시리아가 침략해올 때에도,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 수 있다는 선지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군대를 끌어들임으로 인해서 패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을 원정군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패망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집트 군을 의지했다는 것은 자기들이 믿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배신했기에 준엄하게 심판을 받습니다.

제가 전쟁 얘기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의 결과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남쪽 유다도 망했습니다. 누구한테 망했느냐 하면, 바빌론이라는 국가한테 망했습니다. 바빌론은 지금의 이라크 땅에 있던 나라입니다. 바빌론이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집트까지 패망시켰습니다. 바빌론 제국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집트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느냐 하면, 과거 앗시리아 전쟁 때 피신해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전진 배치시켜서 소위 총알받이로 전부 죽게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그들은 거기서 죽고 후손도 죽고 나라도 망하고 민족도 망했습니다. 패배한 역사입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보고 진노하셔서 죽게 하셨지만, 그러나 다시금 은혜를 베풀려고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고서 과거의 바빌론을 잇고 있는 이라크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참상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전쟁이 제발 이 지상에서 없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요, 이스라엘을 지켜 준 유대교의 핵심인사들은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그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지금 대결을 벌입니다. 이것은 수난절 대결의 핵심에 속합니다. 예수께서 입을 엽니다. “당신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다 버렸다. 그런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 우리의 선교, 우리의 봉사, 우리 예배에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찬송한다고 다 받으시는 게 아니라, 찬송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어야 받으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받으십니다. 우리의 희생적 봉사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있어야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군사적 강국이 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 신앙이 빠졌을 때,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이스라엘은 패망하여 온데간데없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결하는 이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하루살이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가치관의 전도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뀐 상황 속에는 하나님이 계실 장소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당신들은 위선자다.”

어린 시절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다. 어린시절에 어른이 하는 일들이 부러워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어른으로서 생활하다 보니까 지치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거꾸로 옛날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세상은 경쟁이 심하고, 돈 많이 벌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취직도 해야 되고, 공부도 해야 되고, 그러다 보니 우리 몸을 해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성공도 하고 출세도 했지만, 몸에 병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 동안 번 돈 다 쓰게 됩니다. 아니 더 보태서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건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무엇으로 살 겁니까? 미래를 향해 달리다가 오늘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흘러간 다음에 내가 잃어버린 과거, 되돌릴 수 없지 않습니까? 성공을 다시 끌어올 수도 없고, 실패를 거울삼아서 다시 나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마다 주어지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회한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실은 이스라엘 역사에도 있었고 세계 역사에도 다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주어진 이 순간을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자기들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나도 먹고 물도 마셨습니다.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해주셨습니다. 자유라 이름하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와 해방의 감격으로 지낼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 때 물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밤이 너무 춥고 낮이 너무 덥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약속의 땅이라는 희망도 버리고, 그렇게 믿었던 하나님도 배신하고, 노예해방으로 주어진 자유도 버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이사야서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자기가 토해 낸 걸 먹는 게 뭔 줄 아느냐? 토해 낸 걸 먹는 것은 개다. 토해 낸 이집트 종살이를 다시 먹겠다니, 너희는 개만도 못한 민족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토해 놓은 노예라는 이름의 오물을 다시 먹으려 합니다.

미국에서는 노예 해방 문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북부에서부터 노예 해방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예들이 해방된 후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 다음에 해방된 흑인 노예들 중에 상당수가 예전의 주인한테 와서, 자기들을 다시 노예로 써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노예 해방으로 얻은 자유가 귀하기는 하지만, 자유를 누리고 살려니 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일하면, 나머지 먹고 사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지만, 해방되고 난 뒤에는 자기 혼자 인생의 모든 문제를 결단하고 해결해야 했습니다. 인생관도 스스로 수립해야 했습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가 너무 힘겨워서 다시 노예생활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과 마찬가지입니다.

1989년 이후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 수많은 나라들이 자유를 찾아서 변신을 시작했습니다. 한참 변신하다가 보니, 새로 얻은 자유가 값지기는 하지만 누리고 살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선거철이 되면,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만, 과거 공산당에서 약간 이름만 바꾼 새로운 공산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 새벽부터 일하는 것이 습관이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율, 굉장히 좋은 겁니다만, 그 대가가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과거가 그립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거나 요즘 해방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걸 보면서 한 가지를 느낍니다. 자유나 정의, 인권 그 모든 것이 정말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어야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인 나와 함께 해방을 누리자. 나와 함께 자유를 만끽하자. 나 없이는 자유가 다시 속박이 되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북에서 자유가 그리워 사선을 넘어온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자유가 있는 남쪽이 행복한 곳일 줄 알고 왔는데, 남쪽의 경쟁 사회는 이 사람들 보기에 너무나 비인간적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북쪽에서는 뭐가 되었든지 배급이라도 받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혼자 해결하라고 합니다.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사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남쪽의 제도가 나쁘고 좋고 말하기 이전에 이 사회의 방식에 적응할 수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었던 자유가 훌륭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비싸서 회피하려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대안학교도 만들고 생활교육도 시키려고 계획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가 같이 사는 길을 한번 열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거죽은 멀쩡하지만 속이 다 썩어 들어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했던 그 비극적 말씀 속에 오늘 우리 자화상이 그대로 담긴 것 같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유대 땅의 엘리트 계층이고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이긴 하나, 예수님 보시기에 그 경건한 신앙 속에 야웨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건 속에 인간에 대한 갸륵한 사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옷 속에 진정한 인간미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차라리 옷을 바꾸든지 속을 뒤집어 닦아서 속과 겉을 다 깨끗하게 만들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악하면 악하다고 선하면 선하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앞뒤가 다르고 속과 겉이 다른 것을 여기서는 위선자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저는 위선자라 비판하신 예수님의 그 비판이 오늘 우리를 향한 비판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가치관은, 우리의 인생살이는 혹시 위선적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속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모습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고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 사람 안에 창조주를 향한 진실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중세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중세 어느 수도원에서 오래 수도에 정진한 한 수도사가 수난절 주간에 설교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날 저녁에 캄캄해지고 나서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수도사가 촛불을 들고 입장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수도사의 입을 쳐다보았지만, 수도사는 아무 말 없이 제단에 있는 십자가로 나아가 가시관 쓴 예수님의 머리를 촛불로 비추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못에 찔린 양 손을 하나씩 비추었습니다. 창에 찔린 몸 안의 상처들도 촛불로 비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못이 박힌 두 발을 비추고서는 촛불을 끄고 퇴장했습니다.

이 무언의 설교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모든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오늘 돌아가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촛불을 켜고 우리가 걸머져야 할 십자가를 하나하나씩 비추어 보십시다. 우리한테 십자가는 막대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십자가에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사랑의 십자가를 걸머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사랑의 눈물을 어떻게 걸머질 수 있습니까? 사랑이 없다면, 그 십자가에 어떻게 부활한 예수의 새 생명명의 진실을 담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질 십자가라는 그릇 속에 하나님의 사랑, 부활의 영광, 새 생명의 은총이 담겨 있다면, 수난절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보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십자가는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무 조각과 같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 속에 가장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죽음 속에서도 부활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기다릴 수 있는 기쁨,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복입니다.

우리 가운데 훌륭한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헬렌 켈러만큼 훌륭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제가 그분 얘기를 들려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는 소박한 고백을 보고서 한번 우리 인생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3일 동안만 보게 해주신다면”이라는 글을 썼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저한테 3일 동안만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첫째 날, 저를 가르쳐 주신 셜리반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분의 손을 잡고 그간 저의 손을 이끌고 가셨던 동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풀, 빛나는 저녁노을을 함께 감상하고 싶습니다. 둘째 날, 새벽에 일어나 먼동이 트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 언덕에 올라가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태양을 음미해보겠습니다. 저녁이 되면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고 싶습니다. 셋째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큰 길로 나가서 활기찬 표정으로 직장을 향해 출근하고, 일하고, 떠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점심 먹은 다음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하나 감상하고 저녁이 되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심의 거리를 다니며 쇼윈도우도 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고, 그러고 나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시 눈을 감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헬렌 켈러와 정반대입니다.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별도 보았고 꽃도 보았고 노을도 보고 쇼윈도우도 보고 네온사인도 보고 다 압니다. 헬렌 켈러는 그런 것들을 다른 감각으로는 느꼈으나 육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육안으로 수많은 것들을 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만든 천지창조의 질서, 도심지의 삶, 시골의 풍경,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 기뻐하는 모습 등 모든 것을 다 보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헬렌 켈러와 반대로 우리가 그 동안 보았던 저녁노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한번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다. 길거리 가다가 쓰러진 사람에게서, 그와 함께 울고 계신 하나님의 눈물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다.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선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눈으로 겉만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속을 보라고 하십니다. 수난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수난절이 지나서 부활의 아침이 되면, 우리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헬렌 켈러에게처럼 우리에게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신다면 여러분은 무얼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시는 숙제이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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