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범죄가 주는 교훈(행5:1-11)

  • 잡초 잡초
  • 263
  • 0

첨부 1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범죄가 주는 교훈(행5:1-11)


1.은혜가 방종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집니다. 거기에 인간적인 공로나 수고를 가미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복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인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안일함, 태만함, 위선, 이런 것까지 눈감아 주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이 지불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볼모로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실 때, 그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신7:7). 그들은 가장 적은 무리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 안에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만한 어떤 선한 것들이나 조건들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맹세를 지키고자 함이며 그들을 사랑한 연고였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나 그들에 의해 소위 이방인이라고 불려진 다른 민족의 조상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민족이었습니다.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종종 "오 내혼아, 주를 찬송하며 그분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2)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택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잘못에 대해 간과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이방족속들의 가증한 일들을 따라 할 때면, 그들을 때리셨으며, 잘못하고 있음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는 변함 없이 그 은혜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또다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하나님의 법과 이방족속들의 규례들을 섞어 행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런 내용들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오랜시간이 흘러 그들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으며 곤혹스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택한 자들의 죄악을 용납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선민이라는 의식하나만을 붙들고서 온갖 이방의 추악함을 따라가는 일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만과 안일, 이런 것들을 용납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택함받았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품고서 하나님의 눈앞에 합당치 않은 일을 일삼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품고서 우리의 멋대로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의 대언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한가지 사실을 상기시키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가 우리들의 안일함, 위선, 이런 것들까지 용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어떤 이유든지, 모습이든지, 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게 사실입니다. 50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과 5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 중, 누가 더 탕감해준 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까? 많이 탕감 받은 자가 아닙니까? 그것처럼 많은 죄가 드러난 사람이,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값지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은 자로 알게 될 것입니다. 설령 많은 죄가 은혜를 넘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을 위해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합시다. 그분이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우리가 또 죄악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죄악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원수노릇을 하고 있는 게 뻔합니다.

저는 오늘날 성도인 우리들이 어떤 죄악들에 대해 가볍게 취급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잘 알려진 두 사람을 예로 들려고 합니다.


2.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이다.

많은 분들이 아나니아와 삽바리아에 대하여 구원을 받았느냐, 혹은 받지 못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궁금해합니다. 사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5장의 주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느냐,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참고적으로 초대교회가 믿는 자들에게만 침례를 주었고, 거듭난 자들을 회원으로 영입하는 엄격함이 있었다고 할 때,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신앙적인 위치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사건이 온 교회를 향해 경계할 목적으로 기록이 된 것이라면(행5:11) 그들은 분명히 성도의 무리 중에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오늘 대언하려는 내용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에 대한 초보적인 진리에 오랫동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왔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이 명백하고도 단순한 진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듭난 자들이라고 한다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거듭난 이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거듭난 것이 확인된 성도들에게는 언제 거듭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70년대일 수도, 80년대 일수도, 아니면 90년대 혹은 최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볼 때, 거듭난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한 성도로 자라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오랫동안 거듭난 것을 좋아하며 살았지만 영적인 진보가 없는 것으로 괴로웠던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이 그분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십시오.


3.헛된 영예를 구하여 위선을 부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초대교회에서는 전 재산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한대로 나누어주는 일들이 있었습니다(행2:45). 한 때 바울의 동역자로 알려진 바나바 역시 그런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에게 어느 정도의 땅이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그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행4:36-37). 그리고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분배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가진 소유 중에 하나를 팔았습니다(행5:1). 그것은 다른 구절에서 땅이라고 풀어져 있습니다(행5:8). 아나니아는 그 판 값의 얼마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습니다(행5:2). 사도들의 발 앞에 얼마를 갖다 바치던지 그 바치는 양은 바치는 자의 자유에 속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역시, 아무도 얼마를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자기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아나니아의 행위가 사탄에게 미혹되었으며 성령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행5:3).
땅을 파는 것도, 판 뒤에 그 값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아나니아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나니아에 대한 이런 지적, 특히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다는 지적(행5:3)은 아나니아가 그 땅을 팔아 그 값 전부를 바치기로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그 아내에게도 물었습니다. "너희가 땅을 그 값에 팔았느냐?"고. 그것은 곧 그 땅값 전부를 바치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스테판신약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 쓰여진 "감추었다"라는 헬라어는 "횡령하다, 도둑질하다(nospizomai)"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쉽게 이 내용을 정리한다면, 아나니아는 모두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그 땅을 처분하고서 얻은 것의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4.죄는 지적되어야 한다.

만일 여기서 사도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아나니아는 땅을 팔고서 그 값 모두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바친 성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존경받을 것이며 그가 행한 일은 미담이 되어 성도들의 구전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실지로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곧 위선입니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위선입니다. 아나니아의 범죄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속이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또 아나니아의 범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던 것을 횡령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려 했던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죽고 그 아내가 들어왔을 때, 그녀의 회개할 기회를 위해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땅을 그 값에 팔았느냐?』(행5:8) 그것이 과연 너희들이 바치기로 한 전부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일에 은밀히 관여했던 그녀는(행5:2) 뻔뻔스럽게도 그것이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행5:8).

결국, 그들이 땅을 팔아서 그 재산 얼마를 교회에 기부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한 의도가 아니라 그들의 명예를 살찌우며 종교적인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 활동의 배후에 누가 있었습니까?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알려진 사탄이 있었습니다(행5:3).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죄가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 했습니다. 이런 죄는 성도들 사이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부부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같은 날, 몇 시간 차이로 함께 인생을 끝마치므로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단이 외부의 핍박자를 동원해서 교회를 탄압하는 일보다 이렇게 성도들 안에 들어가 헛된 영예를 구하게 하며 자아를 살찌우게 할 때, 교회는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점이 교회에게 있어서 더욱 두렵고 경계해야할 할 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일을 지켜보았던 성도들이나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5.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삶만이 주님의 은혜를 빛내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장사, 또한 부활이 날 위한 것이며, 아울러 나를 포함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성경이 무어라 말합니까?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다시 일어나신 것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위해 그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순수한 목적이 결여된 채,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 드려지기로 한 것을 가로챈 횡령입니다.

그 엄숙한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 받았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우리들은 주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한다는 거룩한 예식에 순종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손뼉을 쳐주었거나 기도해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우리들에 대해 어떤 어린 신자는 존경의 눈빛까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들을 향해 훌륭한 성도라는 칭찬의 소리가 우리 귀에까지 전달되어 오곤 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그런 영예로운 소리를 듣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내 육신과 자아와 정욕을 위해 따로 챙기면서 외형상으로는 존경받는 성도가 되고자 허영을 부리지는 않았습니까? 개인의 삶이나 성도들과 따로 있는 곳에서는 주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성도들 앞에서는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을 찾아 읽겠습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개역성경에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것인"이라는 수식어가 삭제되어 있지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쏟아서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인 이 몸으로 내 정욕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횡령입니다. 그러고도 버젓이 성도들 앞에서 마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처럼 행세한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 자신의 피로 값주고 산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피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그것이 땅을 판 값의 전부냐"고 묻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산 것이 그것이 전부냐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횡령하는 죄를 범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전부라고 그 주님의 피값의 의미를 절하시키지 맙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하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대언해드립니다. 구원받은 여러분, 우리는 다 주의 것입니다. 다 드려야합니다. 나를 위해 따로 감추어두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성도들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드린 자라고 노래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를 쓰러뜨리려는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를 넘어지게 하는 죄는 밖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주님의 것인 것을 잊고 세상과 육신에 빠져 자아를 살찌울 때, 나타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선한 믿음을 따라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기로 한 사람들인 것을 잊지 맙시다.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살피신 눈으로 지금 우리를 살피고 계십니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