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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드릴 것, 우리가 벗을 것 /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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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자 / 고신일목사
설교장소 / 기둥교회
제  목 /  우리가 드릴 것,
본    문 /  마가복음 11장 1~10절



우리가 드릴 것, 우리가 벗을 것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장 1~10절) 

<목회기도>
 
사랑이라는 단어로 그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복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하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찬양합니다. 기도합니다. 예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의 찬양하는 입술이 변치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용서허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고 앉아 있는 이들…
불평, 불만으로 기도 보다 비판과 한숨소리를 더내는 이들…
이제 달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화 없는 세상에 사는 우리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만끽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합니다.
이 좋은 때… 이 좋은 계절에…군대에 나가 있는 이들,
객지에 나가 있는 이들, 외국에 있는 이들, 특별히 병상의 환자들 기억하시고
저들에게도 필요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평화의 왕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가급적 말을 삼가며
불필요한 말, 험담하는 말을 하지 않는 "침묵"하는 주간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은?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올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12:13, 계7:9).
 
 
호산나는?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본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시118:25, 삼하14:4, 시20:9, 마21:9, 막11:9, 요12:13).
이 말의 기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출애굽을 갈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하셨지만
애굽의 왕 "바로"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 개구리, 이, 파리, 오역, 종기, 우박,
황충(메뚜기), 암흑… 등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다(유월하였다) 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각 가정에 교회의 교패를 붙이는 것도
  유월절을 기억하여 표시하는 것입니다.
  교패를 붙이는 의미는 "이 집은 예수믿는 사람의 집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의 집입니다.
  기둥교회에 출석하는 성도가 사는 집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문설주에 피 발랐던 것을 생각하면서 교패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때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길은 며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 일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호산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이름 없이 빛 없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냉수 한 그릇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무엇을 드렸는지?>를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크게 한 몫 했던 사람은 나귀를 드린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있는 곳을 알고 계셨고
나귀의 주인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귀가 있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심부름을 간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나귀는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고
수송, 통신 수단으로 귀하게 사용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나귀의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나귀를 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처음으로 새 자동차를 뽑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임시번호판이 달려 있고,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차가 집에 도착했는데
[고신일목사]가 급한 일로 그 차를 좀 쓰겠다고 하며 사람을 보냈다면…
선뜻 자동차키를 줄 분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께 나귀를 내 준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 쓰시겠다는 말에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곧잘 찬송을 부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찬송가 71장)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찬송가 348장)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입술 고백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원하지만
골치 아프고, 손해나는 일이 있을 때는
슬그머니 빠지려합니다. 집어치우려 합니다.
"내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원합니다"
"나를 쓰시옵소서."… 하지만
"모든 조건이 좋을 때…"만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귀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주님이 원하실 때…
내놓을 수도 있고, 내놓지 않을 수도 있는 나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귀> 가 그의 전부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돈, 지식, 기술,  체면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자고 할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아멘'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나귀는 무엇입니까?
시간, 명예, 기술, 지식, 돈…
예수님이 쓰시고자 할 때 기꺼이 내놓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며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셨고, 바울은 디모데, 실라 등을 선택하였으며
제자들은 스데반을 비롯한 집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회자인 저도 심각하게 기도하고 신중히 여겨 사람을 지목하여
그 사람에게 있는 나귀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라고 권고합니다.
- 어떤 때는 시간을 내라 하고, 재능을 내라 하고, 물질을 내라 합니다.
- 어떤 때는 교사를, 찬양대원을, 속회지도자로, 지역장으로…
  때론 천하고 궂은 일을 하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나귀를 감춥니다.
  <목사님, 제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재능이, 재주가 없습니다. 해 보지 못했습니다.
  경험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시키십시오.  돈이 없습니다.>
기도하며 부탁했던 목사가 민망해 돌아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우리를 쓰시려 할 때, 우리의 것을 요구하실 때…
얼마나 '아멘'했고, 얼마나 거절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나귀는
짐을 많이 실어봤고, 사람을 태우는 일에 익숙한 나귀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나귀도 아닙니다.
그 나귀는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않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경험도 없는… 새끼 나귀였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나귀의 주인 처럼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겉옷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덮고 길에 폈다' 함은
존경의 표시입니다.(7~8절)
그들의 옷은 우리의 옷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속을 드러내게 되는 부끄러운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옷을 많이 입습니다.
속옷부터 시작하여 겉옷까지 3~5개 정도는 입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 두 개 걸쳐 입는 옷차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끄러움, 자신이 당하는 손가락질, 모욕… 상관없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 어떤 사람은 지식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느낀 점은 '정말 많이 배운 분들은 겸손'합니다.
  제대로 배우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런데 조금좀 배운 사람들은 아는 척하고 교만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의 겉옷도 벗어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분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머리 숙여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신분 표시가 아닙니다.
  집사보다 권사가 높고, 권사보다 장로가 높고, 장로보다 목사가 높은
  신분의 높고 낮은 계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맡겨진 직분일 뿐입니다.
  더 겸손하게 일해야 합니다.
▶ 체면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군목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있는 군 사단의 사단장이 교회의 집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제일 먼저 교회에 와서
  별 두 개 단 장군이 주보를 들고 교회입구에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이병이나 일병이 그 사단장을 보고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로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 나이의 겉옷과 생활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집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교회의 궂은 일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선후배 따지지 말고 봉사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 감정의 겉옷, 체면의 겉옷, 자존심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참고, 빌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겉옷을 벗을 때 예수님께서 높아지시고 드러나시게 됩니다.
 
 
종려나무 흔들며 "호산나"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귀를 드린 사람, 겉옷을 벗은 사람들 그리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입으로는 "호산나"하던 군중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예수님을 만나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이적,
오병이어의 기적도, 문둥병자,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 로마의 정치적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 높은 세금의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시켜 줄 지도자로
- 식민지인들의 한숨과 탄식의 불안한 사회에서 해방시켜 줄 혁명가로 기대하며
  "호산나" (구원하소서)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월절 특사 선택에서 엄청난 죄인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주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정말 같이 있어주고, 아파해 주고,
눈물 흘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을 홀로 두었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드렸던 이름없는 그 사람, 겉옷을 벗어 드렸던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직접 개인적인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떠드는 군중속의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즐겁고 좋은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낭패와 실망의 길도 아닙니다. 가지 못할 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보람된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못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려 하실 때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의 궁정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것과
그 백성들을 데리고 시내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 앞에 가야하는 모세에게 군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준다든지, 금관을 준다든지, 어인 찍힌 반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무서워 벌벌 떠는 모세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합니다.
나는 못 갑니다.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떨어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고, 뱀을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통해 모세와 함께 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바로 앞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모세는 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이 예배 후에 집에 가도 가정에 있는 문제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귀와 같은 것, 겉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옷도 벗겨졌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시려고, 고난받으셨습니다.
지금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몸을 버려 피 흘렸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고 너희들이 영원히 살 길을 주었는데
너희들은,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려느냐?"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 음성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기도>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과
승리의 부활절을 맞는 성도들이 되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3년 4월 13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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