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희망을 만났을 때 / 눅 24:13∼35

  • 잡초 잡초
  • 556
  • 0

첨부 1


희망을 만났을 때
(눅 24:13∼35)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며, 돌아오는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예배에는 설교 대신 그 동안 학생들과 청년들이 연합해서 열심히 준비해 온 드라마를 공연할 계획이어서 오늘 여러분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미리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를 위해 지난 한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틈틈이 가졌습니다. 제가 고민했던 질문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은 곧 희망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만약 이 세상에서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를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확신합니다. 제 짧은 판단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고 봅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전쟁이나, 'SARS' 라는 치명적인 전염병 소식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갈등과 대립과 전쟁과 질병과 혼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문명과 산업의 발달로 우리의 삶의 질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선진국의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영국 최고의 경제학자 닉 크라프츠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100년전 세계 최고의 갑부였다는 J. P. 모건이라는 사람보다 더 풍요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삶의 목적과 가치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의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입니까? 예,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바로 그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봅시다. 어느 일요일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줄곧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낯선 나그네 한 사람이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심각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내가 계속 지켜보니까 당신들이 길을 가면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아래로 향하면서 몹시도 우울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흐르다가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 역시 우리처럼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나그네는 "도대체 무슨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글로바는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지만 그분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그네는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군요.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나그네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쓰여진 기록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목적지가 가까워졌고, 어쩐지 나그네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두 사람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라고 그를 붙들어,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식탁에 앉자 낯선 나그네는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나그네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음을 알아보았지만, 그 순간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었던가!"라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열 한 사도와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이에 더 확신을 얻은 두 사람은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절망과 희망이라는 기준으로 관찰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순간을 기준으로 절망과 희망이 너무나 선명하게 대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전의 두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절망이 가져다주는 거의 모든 현상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비록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절망이 그들의 눈을 가리자 예수님과 함께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 분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슬픈 빛을 띠었다고 했습니다. 영어 단어로는 'downcast'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기가 꺾인 듯 풀이 죽어 눈을 내리깔고, 우울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우울함과 의욕의 상실을 가져다줍니다. 또 그들은 현실의 불확실함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을 직접 목격했고, 어떤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빈 무덤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심과 회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함은 절망을 불러오고, 절망은 의심과 회의를 일으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절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순간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먼저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절망으로 어두워졌던 눈이 열리자 드디어 자신들과 동행하고 마주했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슬픔과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차갑게 식어가던 그들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절망으로 닫혀진 마음속에 생명의 빛이 비추어지자 그들의 차갑게 식어가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확신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후 그들은 지체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밤을 새워 달려가던 그 길은 더 이상 절망의 길이 아니라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예전에 숀 코너리와 로브 브라운이 주연한 'Finding Forrester'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뉴욕의 할렘가인 브롱스에서 아무 희망도 없는 삶을 살고 있던 흑인 소년 자말 월러스가 우연히 동네에선 이상한 노인으로 알려진 윌리엄 포리스터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포리스터는 단 한 권의 소설로 퓨리처 상을 수상했지만 형이 교통 사고로 죽은 후 30여년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월러스가 포리스터의 집에 자신의 가방을 두고 나오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다시 가방을 돌려 받은 월러스는 자신이 쓴 글들에 포리스터가 빨간색 펜으로 수없이 수정한 것을 발견합니다. 포레스터는 월러스에게서 아름다운 천재, 바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후 포리스터는 월러스에게 글쓰는 일을 지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두 사람 사이에 방해꾼이 나타납니다.

월러스가 다니는 학교의 문학선생인 로버트 크로포드였습니다. 그는 흑인인 월러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월러스가 써온 탁월한 글들을 표절한 것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집요하게 월러스를 매장시키려고 시도합니다. 크로포드는 학교 문예 백일장에 낸 천재 월러스의 글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포레스터의 글을 표절한 것이라고 몰아갔고, 학교 이사회는 월러스가 단순히 농구선수로만 활동할 수 있게 제한하는 의결을 하고자 합니다. 사실 표절한 글은 아니었고, 단순히 제목만 포레스터의 글이었습니다. 포레스터가 허용했다는 것을 알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포레스터는 알릴 의사도 없었고, 월러스는 포레스터와 약속 때문에 밝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백일장 결과를 발표하는 날 포레스터가 나타납니다. 30년의 침묵과 은둔을 깨고 단순히 한 아름다운 천재 월러스를 위하여 포레스터는 세상 속으로 걸어나와 월러스가 자신의 친구임을 밝힙니다. 그 후 포레스터는 다시 은둔합니다. 그리고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월러스는 포레스터의 편지를 전달받게 됩니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었다. '사랑하는 자말! 한때 난 꿈꾸는 걸 포기했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심지어는 성공이 두려워서. 네가 꿈을 버리지 않는 아이인 걸 알았을 때, 나 또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지. 계절은 변한다. 인생의 겨울에 와서야 삶을 알게 되었구나. 네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거다.

-윌리엄 포레스터' 월러스와 포리스터가 서로에게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희망입니다. 포리스터는 월러스에게 글쓰기의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월러스는 포리스터에게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포리스터처럼 설령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나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만큼 희망은 그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제자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절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 절망의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물론 구약 성경도 그렇지만 특히 신약 성경은 온통 희망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 희망 없는 죄인들을 위해 참된 희망이 빛을 비추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어부들, 세리들, 창기들, 귀신들린 자들, 중풍 병자들, 앉은뱅이들, 귀머거리들, 소경들, 온갖 죄인들…예수를 만난 사람들마다 절망의 삶이 희망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부활의 주님 안에서 발견한 희망을 아직도 절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생명까지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죄와 심판과 사망과 질고와 연약함과 실수와 허물과 절망과 모든 어둠과 흑암의 권세들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외치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살아있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벧전 1:3) 그리고 우리는 그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지체없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전했던 것처럼,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아가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절망의 길을 가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해서, 사람들을 향해서 이 희망의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희망을 발견한 우리들의 몫입니다. 예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이 명령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이고 싶습니다. "희망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라!"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의 한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이외에 이 서구 세계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40여년 간 신문관계의 일을 해 왔지만 그 분 이외의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며, 또 그 분이 사실 삶과 가르침을, 특히 십자가에서 고난까지도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으로부터 십자가를 빼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오직 부활의 주님, 그 분만이 우리의 참된 희망이 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이유들을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만난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