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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근심을 버리십시오(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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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근심을 버리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6절


< 미소는 최고의 미용 도구입니다 >

미인은 '미소 짓고 인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소 짓고 인사하는 얼굴, 미소 짓는 밝고 편안한 얼굴은 분위기를 밝게 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우리 교인들은 항상 미소 짓고 인사하는 미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미소는 천국의 방언이고, 세계 공용어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영어 공부를 많이 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미국의 아버님을 방문하면서 다시 한번 영어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어를 잘하기 위한 3가지 중요한 요소는 '영어실력 자체'와 '문화 이해'와 '체질화하려는 연습(practice)'인데 제가 1991년 귀국을 하고 지금까지 12년 동안 거의 프랙티스(practice)를 할 기회가 없으니까 영어가 잘 나오지 않고, 나오는 소리도 작아지고, 문장도 짤막하게 몇 단어로 형성된 문장만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2주도 안되는 기간이고 외국인과 말할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미국 공항에 입국할 때보다 미국 공항에서 출국할 때 영어가 더 잘 들리고, 사용하는 문장의 평균 단어 수도 많아진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문화가 몸에 조금 젖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영어는 항상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한 가지 생각한 것이 "내가 이런 영어 실력을 가지고 어떻게 신학교에서 잘 버티고 공부했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민 2세들은 학교에서 백인이 아닌 '소외계층(marginal group)'으로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는데 영어가 서투른 제가 오히려 학교의 '주류(main stream)'처럼 활동하며 형제처럼 가까운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이번에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 당시에 항상 상대방에게 따뜻한 얼굴, 밝은 얼굴, 미소 짓는 얼굴을 가지려고 힘썼기 때문입니다.

미소는 사람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세계공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공부를 체질화하려는 연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소 짓는 얼굴을 체질화하려는 연습입니다. 그 연습을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어는 몰라도 행복할 수 있지만 미소를 모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미용실에 한번 가는 것보다 미소 한번 짓는 것이 훨씬 얼굴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미소는 최고의 미용 도구입니다.

< 근심은 영적 해충입니다 >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찌푸린 얼굴을 가지고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근심은 영혼을 갉아먹는 영적 해충입니다. 근심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성공할 수는 있어도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환경이 어려우면 불안과 근심과 원망이 생길 수 있지만 그 어려운 환경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그 친구가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줄 것입니다. 살면서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김정연 집사님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집사님과 가까이 지낸 분들은 때로 "나에게 전화 한번 안 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에는 내 마음에 섭섭함이 들어오려고 틈을 엿보게 됩니다. 그때 그 상황을 이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전화 한번 안 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오히려 내가 한번 전화를 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그런 식으로 지혜롭게 대처해 보십시오. "저 사람이 내게 인사를 안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가 먼저 인사를 해주고, "저 사람이 내게 전화를 안해주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가 먼저 전화를 해주는 삶을 살고, "저 사람이 나를 찾아와 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가 그 사람을 먼저 찾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우리의 삶에 먹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기쁨이 이만치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항상'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슬픈 일 당할 때도 히죽히죽 웃으란 말입니까? 어떤 분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항상 기뻐한다!"고 장례식에서 웃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금 심해지면 청량리로 보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비정상적인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무너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제 새벽기도가 끝난 후 아주 어렵게 사는 한 집사님이 저를 찾아와 교회 이전을 위한 중도금 문제로 근심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제가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쉬지도 않는 한숨을 저 대신 푹푹 내쉬었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것이 나쁜 근심이 아니라 교회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임을 왜 모르겠습니까?

제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집사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시고 다른 분들에게 믿음의 격려만 많이 해주십시오." 그처럼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며 서로를 감동시키는 모습을 그 순간 하나님은 흡족한 마음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근심스런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보여드리는 태도입니다.

<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성만찬을 행하신 후에 말씀하신 다락방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왜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님께서는 곧 몇 시간 후에는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느끼고 제자들은 불안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처럼 불안에 쌓인 제자들에게 주님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했으면 정말 믿으셔야 합니다.

죠지 뮬러는 "믿음이 나타나면 근심이 사라지고, 믿음이 사라지면 근심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엄청난 힘을 줍니다. 믿음 자체도 신념이라고 해서 큰 힘이 되는데, 영원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믿음은 소유보다 더 중요하고, 학력보다 더 중요하고, 재주보다 더 중요하고,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성공보다 더 중요합니다. 누가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나의 성공이 열 가지 근심을 만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유가 많으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왜 감옥보다 별장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물질에 집착하면 삶의 본질과 핵심을 잃어버립니다. 소유가 적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순박하고 순수하고 믿음도 쑥쑥 자랐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밥술 좀 먹고, 돈을 좀 만지는 민족이 되니까 타락하고 교만하고 믿음이 잘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소유가 많은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소유 자체를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소유가 많은 것이 아니라 드림과 나눔과 베품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삶 때문에 소유가 많아질수록 근심도 더 많아지고 불행지수도 더 높아진 것이 아닙니까?

요새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영성(靈性)이 무엇입니까?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영서(靈書)라는 것을 쓰는 것이 영성입니까? 그런 영성을 가진 신령한 모습을 보면서 왠지 자기 과시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영성(靈性)은 영(零)이라는 숫자의 영성(零性)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제로(zero)로 알고 주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사는 것이 진짜 영성(靈性)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가지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잘되고 잘못되고 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이 나의 구세주라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또한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 나를 전폭적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을 근심이 찾아와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2. 둘째, 우리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에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 말씀에서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의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되었다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 생각이 우리의 머리에 확고히 자리잡을수록 우리 마음의 모든 근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료 보고서에 의하면 일년 중 해가 짧아질수록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 즈음에 가장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 육신조차 햇빛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에도 영적 햇빛이 필요합니다. 그 영적 햇빛이 바로 천국의 소망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확고해서 우리의 미래가 천국의 기쁜 삶으로 보장되어 있다면 그 소망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겠습니까?

사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오늘에 대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반면에 현재가 없어도 미래가 있는 사람은 자유가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가진 것이 부족해도 반드시 미래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미래에 대한 소망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확고하면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순교요, 천국으로 들어가는 의식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죽으면 반드시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기 전에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쫓고 쫓기는 삶'보다는 '부름에 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파트 평수를 쫓아가는 삶보다 항상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아야 삶이 밝아지고, 얼굴도 밝아지고, 마음도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10시에 인천공항으로부터 집에 도착해서 잠깐 식사를 하고 곧 교회로 나왔습니다. 새벽 예배 준비도 해야 하고 특히 주일 설교 준비 시간이 짧다는 사실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새벽 1시쯤 집에 들어가 3시간만 자고 나와서 다시 토요일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있으면 더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결국 설교를 반도 작성하지 못하고, 어제 저녁 지쳐서 강단에 풀썩 엎드렸다가 잠깐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한 시에 하나님께서 깨워주셔서 말씀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몸은 힘들지만 예배를 드린 뒤에는 정말 행복합니다. 몸은 피곤해도 작은 소명을 마쳤다는 기분에 마음은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나에게 이 일을 하시게 한 목적을 생각하며 '부름에 응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헨리 벤 다이크의 소설 '맨션'에는 부자가 죽어 천국을 구경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이 땅의 부자가 천국에서도 부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이 버는 것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많이 드리고 많이 베풀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TV의 성공시대에 나온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입니까? 물론 그들의 투지, 근면, 용기, 창의성은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꼭 사업에 성공하고, 명예를 얻어야 성공한 것입니까? 그런 성공을 보면서 중요한 것이 빠진 것처럼 왠지 허전하지 않습니까?

가난하지만 매일 건전한 노동으로 인간다움의 향기를 주위에 날리며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까? 시집가려고 준비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까? 직장생활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주 한번이라도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장애인의 집을 찾아 나서는 주부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까?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를 위해 아무도 모르게 헌신의 손길을 베풀며 자기의 안락한 삶을 희생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끝나버리는 성공에 집착하기보다 저 천국까지 유효한 성공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처럼 항상 마음속에 미래의 천국을 품고 나눔과 베품과 드림을 통해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내적인 생명력을 주실 것입니다.

3. 셋째,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이 막힌 것 같아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나가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은 결코 헛된 발걸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우리의 삶에 길이 막힌 것과 같은 상황이 생겨도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때 주님이 길임을 의지하고 더욱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욱 축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오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꿈을 그 말씀에 적용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으로 적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적용이 지나치면 기복주의가 되지만 적절하다면 그런 적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사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자기를 염려해주는 빌립보 교인들의 염려를 덜어주기 위해 한 말씀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떤 어려운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사람의 힘으로는 길이 없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시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에게 믿음도 주시고 겸손한 삶의 자세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제주도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다른 모든 과수원이 황폐하게 되었지만 유독 한 과수원만 감귤이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평소에 물을 아끼면서 말라죽지 않을 정도만 물을 주었기에 나무들이 뿌리를 깊이 내려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다가오는 이유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좀더 겸손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발견은 지속적인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를 발견하기에 애를 써야 합니다. 분수를 모르면 마귀에게 반드시 패하게 되지만 분수를 알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길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만 길이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일이 잘될 때 겸손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습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은 다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인 줄 알면서 그것들이 있으면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추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이라는 견제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을 하나님의 초청장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고난 중에서도 반드시 삶의 기쁨을 찾고, 고난의 터널을 지나 승리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4. 넷째,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체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구구절절이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조금만 사랑해주어도 사는 맛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니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살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아버님은 LA의 알콧 재활 양로 병원에 계십니다. 거기에 계신 분들 중에 스스로 걸어다닐 수 있는 분들은 없습니다. 저의 아버님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테너 조남희 씨인데 제가 나온 서울 청운 초등학교 40년 선배였습니다. 그분은 거동하시지는 못했지만 제가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누워서 미소를 짓고 참 좋아하십니다. 아무리 과거에 쟁쟁한 분이었다고 해도 세월 앞에서는 다 무너지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고 있는 존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아는 줄 압니다. 그런데 알긴 무엇을 압니까? 세월이 지나면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우리는 아주 능력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능력이 있긴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힘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종종 나만 잘해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늘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을 가지게 되고, 그 욕심이 집착으로 변하고, 결국 그 과도한 집착은 실망과 미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법은 다릅니다. 주님은 항상 더 주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항상 더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 처해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생각하고 모든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근심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며 살고,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고 어떻게 조금이라도 그를 더 도울까를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인생의 근심은 떨어져나가고, 대신에 인생의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항상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통해 여러분들의 마음에 근심과 불안 대신 기쁨과 평화가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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