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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종려주일 (눅 19:29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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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강형규 
Subject  예수님을 영접하는 종려주일 (눅 19장 29절-44절)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선지자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미리 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는 구약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스가랴 9장 9절에서 말하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바로 이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의 압정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무리들은 사해 북서쪽에 위치한 쿰란이란 곳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며 성경을 연구하고 이 성경을 필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며 살았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렸습니다.
나를 구원할 메시야!
인생의 환난에서 나를 구원할 메시야,
로마의 압제에서 어서 빨리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관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구해오라 해서 나귀 위에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 드렸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로서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 위에 깔았거니와,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께서 나아가시는 그 길 위에 옷을 깔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겉옷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겉옷은 백성들의 생활의 전부를 말합니다.

그 당시에 패션을 살펴 보면, 겉옷과 속옷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사실 겉옷이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는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옷은 재산의 전부요...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 소중한 옷을 길 위에 깔았다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이 영광을 받는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 내가 갖고 있는 소유는 깔려도 괜찮다고 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전폭적으로 걸어도 좋은 분, 내 인생을 내어 맡겨도 좋으신 분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내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이 가진 것을 아까워 하지 않고 서슴지 않고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물질도 좋습니다. 영혼도 좋습니다. 다 주님께 헌신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와 마가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았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국위를 선양하거나 영웅이 되어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오색 꽃가루와 종이 가루를 날리며 환영하고 맞이하듯이, 이 행위는 승리자가 들어 올 때에만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했습니까?

2) 영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말씀합니다.
큰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ꡓ

왜 이렇게 간절해야 합니까?
왜 이렇게 환호하며 소리를 치며 주님을 맞아야 합니까?
왜 나팔 소리로 찬양해야 하며, 왜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해야 하며, 왜 장구 치며 북 치며 찬양해야 하며, 왜 춤 추며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좋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런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ꡑ

사랑을 하면 그리움이 생깁니다. 저 멀리 있어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이 그리움 때문에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내 육적인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내 육신으로 느끼기 어렵다 하여도, 이 그리움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돈을 주고도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돈을 주고도 건강을 찾을 수는 없지만, 돈을 주고도 잃어버린 행복을 회복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이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으며, 이 영적인 기쁨을 넉넉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ꡒ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ꡓ
이 기쁨이, 주님을 맞이하는 이 기쁨이 오늘 종려 주일을 맞이하시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ꡒ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ꡓ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자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 듯하나 속은 썩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나 속은 탐욕과 저주와 부정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나, 가르침을 받기를 싫어한 자            들이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나, 율법대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대접 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접을 받기를 더 좋아 했고 윗자            리에 앉기를 즐겨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기를 ꡒ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ꡓ

여러분,
다른 백성은 은혜를 받아서 마음이 기쁜 나머지 이 기쁨을 참지 못하여 다 쏟아 놓았건만, 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묵상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장 한 복판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던 저들의 자세는 어디로 갔습니까?
성전에 올라가 따로 서서 금식과 십일조를 자랑하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큰 소리로 기도하던 저들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까?
울부 짖어야 합니다.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는다 할지라도, 내 속에 있는 이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내어 놓게 될 때에, 내 질병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내 문제가 해결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절망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을 갖고 살아 나가면,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모든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이렇게 통곡하셨습니다.
이 예루살렘을 향해 흘리신 눈물은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말은 ꡒ평화의 도성ꡓ 혹은 평화의 소유ꡓ, 평화의 터전ꡓ이란 뜻이 있을 정도로 이 예루살렘은 평화를 갈망하여 추구하던 곳이었습니다.

ꡒ평화의 터전ꡓ, 얼마나 그 이름이 근사합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ꡒ평화의 터전ꡓ을 보시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주후 70년에 이 도성이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송두리째 무너질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악을 짓고 평화와 정 반대되는 일들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눈물, 이 눈물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ꡒ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ꡓ

그렇습니다.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저들에게 갔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들의 죄를 지적하였건만 그들은 심지어 선지자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셨건만, 저들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하여도 저들의 귀와 저들의 마음은 꽁꽁 닫혀서 열릴 줄을 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 생활을 돌이켜 봅시다.
혹시나 형식적으로 되어버린 마음은 없습니까?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아직도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지나 않습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그 사랑을 이제는 다 잊어 버리고, 세상의 형식으로 휩싸인 내 모습은 아닌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지만, 내 욕망과 내 자아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 오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 혹시나 이러한 나의 미래를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새 소망을 타락한 인류에게 선사하시기 위하여 이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주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까?

1) 우리의 겉옷을 벗어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타실 나귀에 우리의 겉옷을 깔아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지나가실 이 인생 길을 우리의 겉옷으로 덮어야 합니다.
누추한 옷도 좋습니다.
떨어져 덜렁대는 옷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됩니다.

2) 우리도 종려나무를 흔들며 주님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3) 큰 소리를 치고 환호하며 주님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을 믿고 믿음 생활을 해 나가면 실패하고 맙니다.

성 어거스틴도 죄악에 빠졌던 자신의 문제 덩어리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ꡐ나는 나에게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ꡑ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러한 믿음을 드려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로 기쁨이 있기 때문에, 또한 더욱 큰 기쁨을 얻기 위해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인생 길을 걸을 때에도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설마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만큼이나 우리의 고통이 크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을 십자가의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주간을 지나 죽음을 이기신 우리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겉옷을 내어 던지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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