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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가는 밝은 길(5) - 떠남(Escape) / 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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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가는 밝은 길(5) - 떠남(Escape)
고후 5:8-10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실 당신의 때가 다 된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날입니다.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많은 성민들이 나아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었기에 일컬어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당시 로마 시대에 개선 장군을 환영할 때 사용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성민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갈릴리 지경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 - 각종 병환자들을 고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한 많은 표적들 -에 관한 소문들이 예루살렘에서 살던 성민들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날로 다시 근처마을인 베다니로 나가셨다가 그 이튿날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 성민들이 자기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 몸을 의지하시거나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까닭은 이 세상은 당신의 집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님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여기가 좋사오니 . . . ' 하며 세상에 소망을 두고 욕심을 세워나가다가는 모든 것을 잃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여청년이 담당 목사님께 보낸 쪽지 편지에 이런 글이 있었답니다. 

"스스로 깨쳐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쳐서 나오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

그렇습니다. 정말 옳고 재미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으로 세상을 깨쳐나가지 않으면 후라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를 때마다 "맞다!" 싶은 복음송이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그 기쁜 찬송 하늘 울려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후렴)
오 주님 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2. 거하든지 떠나든지

어제는 너무 슬픈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부모님 앞서 젊은 부인과 두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하늘 나라로 올라간 성도가 있습니다. 너무도 기가 막힌 듯 조문객들이 유구무언으로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무엇이라 설교할지 막막했던 장례식이었습니다.

발인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선도 차에 앉아있던 그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나 알겠니? 누구지?
어 목사님이네

교회에서 본적있어?
예. 그 사람이 이 사람이네 헤헤 . . .
(허리 구부려 가까이 다가 간 내 얼굴을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찝쩍이며 웃었다)

너희들 지금 어디가니?
우리 아버지 산소에요

산소가 뭐야?
아버지 묻는 곳이요. 그런데 우리 아빠 묻기 싫은데 . . . "

돌아오는 길에 혼자 생각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거야 . . ." 제가 깨달았던 것은 그 어린아이들에겐 "거하든지 떠나든지"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에게나 죽음에 대한 공포와 愛別之苦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의미에서 비슷한 말씀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그래서 설교 분문에서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9절)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은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생애를 옳고 바른 곳에 투자하게 됩니다. 까닭은 우리를 데리고 가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불며 마중나오네

(후렴)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모세는 애굽을 떠났습니다. 공주의 아들의 자리를 떠났고 부귀를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닙니다. 염세주의자의 도피행각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을 떠난 대신 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또 다른 사명이 그를 살게 했습니다. 그 사명이 그를 애굽에서 떠나게 했던 것입니다.


3. 심판대 앞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심판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말씀으로 설교한 후 물었답니다. 여러분들은 나사로가 되고 싶소? 부자가 되고 싶소?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가 되고싶다고 손을 들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나중에 보태기를 "솔직히 목사님! 살아서는 부자가 되고, 죽어서는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고 그러더랍니다.
이게 우리들의 현실적인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서 부자는 심판대에서 결코 나사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켜버립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한 하늘  가는 길이 밝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심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은 애굽을 떠났지만 마음은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는 한 우리 눈엔 하늘은 요원할 것입니다. 심판대가 그것을 알고는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어질 것을 붙잡고 떠나지 않으면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고 왔습니다 하고 봇다리를 내어놓았는데 그 속을 보니 다 썩어 냄새나고 구더기가 끓고 있을 것을 상상해본다면 . .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떠나고 버립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로 우리도 죽읍시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죽지 않고는 하늘 나라 가는 길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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