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에 동참한 자들 / 눅 23:26-38

  • 잡초 잡초
  • 409
  • 0

첨부 1


Subject : 십자가에 동참한 자들(03/04/13)
            (눅23:26-38)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주간은, 예수님이 인간 형벌 중 가장 무서운 십
자가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고난주간입니다. 키케로는 말하기를 "십자가형
은 가장 잔인하고도 소름끼치는 사형이기 때문에 전율로 몸을 떨지 않고는
그것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법은 본래 요
즈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의 옛날 왕국인 페르샤의 사형방법입니다.
페르샤인들은 땅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죄인이나 악인의 시체로 땅을 모독
할 수가 없다는 사상으로 높이 달아 죽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신 분, 일생을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산 분을 가장 악독한 죄인에게나 내려지는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컬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의 집행 방법은 죄
인이 재판을 받아 유죄선고를 받으면 재판장은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선언
합니다. 그러면 네 사람의 로마군인들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사
형장으로 가게됩니다.

십자가에 사형 당하기 전에 채찍으로 맞는 무서운 태형(笞刑)을 당하게 되
는데, 로마 채찍은 가죽끈에다가 짐승의 뼈들을 넣으므로 그 채찍에 맞으면
온 몸에 뼈가 박히면서 휘감깁니다. 그리고 잡아 다니면 그 뼈들이 온 몸에
살 고랑을 내면서 찢기어지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갈 때 될수록 많은 거리를 지나가야 합
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범죄자는 이렇게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경고로 알려주는 전시효과 때문이요,
(2)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갈 때에 한 사람이 앞에서 죄상을 적은 죄패를
메고 가는 데, 사람들이 이것을 읽고 이의가 있으면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판단대로 아무 죄가 없음에
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이 거리, 저 거리로 끌려 지나가십
니다.

군중들은 온갖 욕을 퍼 붇고 놀리고 빈정거립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넘
어지셨습니다. 전날 저녁 최후의 만찬 시에는 제자들에게 "이 떡은 내 몸이
라" "이 잔은 내 피라"고 하시면서 자기가 잡수실 음식을 모두 나누어 주셨
기에 굶으신 상태였는 데다가, 감람산에서 체포당하신 다음에 밤새도록 일곱
번이나 이곳 저 곳으로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당하시노라 전혀 주무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그 무서운 채찍으로 연약한 몸에 실컷 매 맞으시고, 또 가시관
을 쓰셨기에 이마에 피가 흘려 얼굴과 몸을 적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걸어
가기도 힘에 겨운 판에 80관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는 것은 무리였습
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10년 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보
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거리가 700-800미터 가량인데, 나중에는 높
은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부르는데 그냥 걸어가는 데도 다리
가 대단히 아픈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14개의 지점이 있고 그곳마다 기념
교회나 기념상이 있었습니다. 그 지점 중 4번째 장소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신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사
정없이 채찍질하시면서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다시 일어나셔서 10미
터쯤 가시고 다시 쓰러지십니다. 이번에는 아무리 매질해도 너무 무거워 못
일어나십니다.

그러자 옆에 구경하고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합니
다. 여기가 제5지점입니다. 또한 제9지점은 예수님이 맨몸으로 올라가시다가
쓰러지신 곳입니다. 여기서부터 약 30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 해골이라는 언
덕, 골고다에 이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 틀에 눕히고 양손과 양발
을 묶습니다. 그리고 18센티나 되는 큰못으로 양발과 양손을 잔인하게 못박
습니다. 지금 로마에 가면 그 못 중의 하나가 보관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얼
마나 큰지 보기가 끔찍합니다.

십자가 중간에는 안장으로 불쑥 나온 나무 조각이 있는데 이 안장이 없으
면 죄수의 중량에 지탱을 못하여 양손이 찢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마침내 십
자가를 세웁니다. 십자가형의 무서움이란 이 때부터 가장 심합니다. 죄수는
이글거리는 정오의 태양과 밤의 추위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낮은 무섭게 덥고 밤은 대단히 춥습니다.

그런 더위와 추위 속에서 거의 벌거벗긴 채 양손과 양발에서 피를 흘리는
고통과 목마름, 그리고 배고픔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 가는 것
입니다. 어느 강한 사람은 며칠씩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간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잔인한 형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다행히 오전 9시에 못
박히시고 6시간 고통을 당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
님은 육신과 정신, 영적인 고통이 극심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끔찍한 십자가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인류의 모든
죄 때문에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과거의 인간들, 현재의 인간들, 미래의
인간들의 엄청난 죄, 그리고 여러분과 여기 서 있는 저의 죄 때문에 대신 죗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명패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
라어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헬라는 인류에게 철학과 사
상을 배워주고, 로마는 법과 정치를 배워주었다면, 히브리 민족은 종교와 신
에 대한 예배를 배워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나라의 말은 당시로서는 세계 3개 언어요, 3대 대표적인
문화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3개국의 말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쓴 것은,
전 인류의 속죄 때문에 죽으신 왕임을 은연중에 증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십자가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
동참하지 않고는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죄를 위해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 속에 돌아가신 것을 믿고 그를 나의 대속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 처절한 고통을 받으시는 동안 나
도 그 십자가 고통 속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순간, 나의 모든 것, 나의 죄된 것, 나의 저주받을 미래도 다 죽고 사라진 것
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의 문을 여시고 부활하시는 순간, 나도 그
안에서 새로 태어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롬6:8에서 "만일 우리가 그
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고백한 대로
나도 그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대속주로
믿느냐, 안 믿느냐는 각자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서 영원한
축복이냐, 영원한 저주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심문한 다음, 분명히 죄가 없음을 깨달았고, 또 아
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살릴 수 있었
으나, 정치적인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준 비겁
자가 된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몇 년 후에는 총독에
서 쫓겨났고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나는 이 사람에게
서 아무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고함고함 지르면서 "예
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고함이 얼마나 살인적이었는지, 빌라도는 그의 보고서에서 술회하기를
"나는 가끔 시민폭동에서 노한 군중들을 목격하여 왔으나 이번처럼 격렬한
폭동은 본적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그러한 군중들의 압력
에 못 견딘 빌라도는 대야의 물에 손을 씻으면서 "마음대로 하라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자 백성들은 대답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왜 자기 후손들까지 저주를 자초하게 했는지 너무나 한심합니
다.

그 결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유대인과 그 후손들이 너무
나 큰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시 11만 6천명 몰살.
서기117-138년까지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986개 마을 파괴, 58만 학살, 11세
기-13세까지 십자군이 유럽의 모든 유대인 학살, 서기 1298년 호주에서 10만
학살, 서기 1348-1349년까지 흑사병 핑계로 100만 명 학살, 서기 1648년-1658
년까지 폴란드에서 40만 명 학살, 특히 1945년 독일 히틀러 의해서 가스실에
서 600만 명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한 자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강제로
십자가 졌던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을 믿게되었고, 또 주석가들에 의하면 안
디옥교회의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구레네 시몬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골고다를 향하실 때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손수건을 드렸다고
하는 데, 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 않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으로 알려지
고 있는데, 그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초상화가 나타났다고 하며 그 여인은 후
에 큰 믿음의 인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기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준 아리마대 요셉은
전설에 의하면 주후 61년에 빌립에 의해서 영국으로 파송되어 큰 능력을 행
했다고 하며 영국의 최초의 교회가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를 보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한 나라들은 많
은 복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거절한 나라들은 이라크처럼 석유 매장량이 엄
청난 데도 불구하고 저주가 가득찬 것을 확연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영접하느냐, 마
느냐는 각자 자유이지만, 그 결과 엄청난 줄 아시고 이번 고난 주간에 예수
님을 영접하시므로 십자가에 동참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때로 잘못을 범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것처럼 서원하거나 행동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
가는 예수님 만이 유일하게 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수난절 때 해외 토
픽을 보면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밧줄로 묶여 있거나 혹은 실제로 십자
가에 못 박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하나님의 성역을 범하는
교만 죄가 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졌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
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여인들이
울면서 따라올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
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보면 수도생활하면서 스스로 고행을 많이 합니
다.

금욕, 금식하면서 성자적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것도 잘못하면 교만 죄를 짓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
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십자가란,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 보면 생기는 어려움이나 고난을 말합니다. 때로 반대나 핍박
도 당하고 손해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 주님 때문에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투옥 당하기도 하고 순교 당하기도 하는 것을 바로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각자 감당할 만한 자기 십자가를 맡기십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에 동참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들은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면
서 자기 십자가는 아무 것도 지려고 하지 않고 은혜와 복만 받으려고 합니
다. 더 나가서는 주님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나 목회자를 원망하기에 바쁩니다.


지금도 북한 땅 등, 공산권이나 이교도 지역에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데, 잔인하게 순교를 당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데, 이처럼 자유로운 땅에서 교사나 찬양대, 구역일군이나 기관의 임
원의 일을 하다가 누가 조금 싫은 소리나 비판을 했다고 해서 화가 난 나머
지 "사표를 쓰니 마니, 다른 교회로 가니 마니"하면서 울근불근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
가를 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실 때 무슨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인 줄 아시고 피하지 말고 담대히 지고 주님
을 따라 가십시오. 이처럼 십자가에 동참하는 자에게 십자가 능력이 나타나
는 것이요, 또한 영육간의 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막1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이 복음
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100배나 받되 핍박
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
다. 주님의 고통을 함께 지고 있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
소의 그녀의 신조였습니다.

그녀는 1950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지옥과도 같은 인도 캘커타
의 빈민굴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47년 동안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
다. 문맹자들을 위하여 여러 학교를 세워 수많은 어린이들을 졸업시켰고, 54
개의 나병치료소를 만들고, 20여개 고아원을 지어 1천 6백여 명에 이르는 고
아들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숙소를 지어 의지할 곳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수천 수백의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가난한 인간들 속에
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과 십자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97년 87세 나이로 죽는 날까지 주님과 더불어 자기 십자
가를 졌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주님만 바라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질
수록 점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새의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새의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으로 날개 짓을 할 때마다
높이 높이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자기 십자가가 무거우나 지면 질
수록 점점 신앙적으로 올라가는 삶을 사는 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 십
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부활과 함께 새로워집시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십
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 되므로 승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
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