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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자 / 호 8:1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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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자 
> 설교자  :  황요한목사 
> 본문    :  호세아 8장 1절-7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호세아를 통해 ‘내가 이만큼 사랑한다’며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노라면 너무나도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5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로 인하여 분노가 끓는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자식들이 빗나간 삶을 살며 불순종 할 때 부모들이 마음의 분노를 표현하면서 "속이 끓는다 끓어 ...."라고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분노하게 하셨을까요? 먼저 그들의 문제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1절 중반에 보면,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하였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관계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문제였습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맺은 인격적 약속을 깨뜨린 삶의 모습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베델성서대학에서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하나님과의 부조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니까 자신과의 조화도 깨어지게 되고 결국은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도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환경문제는 바로 파괴자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되돌아온 하나님의 심판이요 자연의 항거인 셈입니다.

축복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저주하는 자가 되어버렸고, 예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버렸으며, 감사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오히려 불평하며 육신의 정욕으로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모든면에서 부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 번째 문제가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부르짖기를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언제나 그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교회를 잘 알아, 나는 성경을 잘 알아, 나는 목사님을 잘 알아.....’,그렇게 언제나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그 말을 뒷받침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4절에 있습니다. ‘저희가 왕을 세웠으나 내게로 말미암지 않았고,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고 자부심을 가졌지만 실상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민족들이 왕을 세우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국ㄱ가적인 일이나 가정적인 일에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이루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자기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만족하였고 아쉬울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는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은과 금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니까 그 우상들은 공장에서 만든 신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신이 어찌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우상이 어찌 사람의 손끝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 믿지 않는 가정을 방문하다보면 제일 먼저 분에 띄는 것이 바로 부적들입니다.문설주나 천정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심지어는 팬티 속에도 부적을 넣고 다니고, 자동차 엔진룸에도 마른 명태와 명주실을 함께 묶어서 다니기도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선지자 호세아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 앞에 스스로 엎드려 절하는 신세로 전락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믿음을 갖지 못했을 때 돼지머리 앞에서 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존재가 피조물인 짐승의 머리 앞에 절하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문화적, 전통적 삶의 단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왜 절을 합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해달라고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절하라고 요청합니다. 내 사업 좀 잘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말씀으로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남들보다 농사도 더 잘지어야 되겠고, 인생도 남보다 더 멋지게 즐겨야겠기에 욕심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도록 이끈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교회생활 조차도 삶의 실천적 모습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법을 지키며 순수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손해보지 않도록 배려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구조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알면서 법을 어깁니다.

하지만 한 기업가가 믿음대로 사업하기로 작정하고서 법대로 사업을 하려니까 그것은 마치 100m 경주를 두 손 꽁꽁 묶어놓고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그냥 세상 풍조대로 따라하면 그만인데 믿음의 양심과 법대로 실천하려니까 온갖 장애가 가로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한 10년쯤 사업을 하다가 뒤를 돌아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기업이 머리가 되어있었노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나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때때로 손해같이 느껴지지만, 바보처럼 순수하게 그 말씀 지키며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줄 믿습니다. 그 분께서 세워 주셔야 승리요 축복인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평안의 교회도 만 20년을 지내오면서 정말 정도를 걸으려고 애썼습니다. 아마 그냥 오시는 분 다 받았으면 지금 2.000명도 넘었을 겁니다. 정도를 걷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바른 길을 가면서, 이제 모든 분들이 평안의 교회를 보면서, ‘그 교회는 정도를 걸어가는 교회야’ 그렇게 이제는 인정을 받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줄 믿습니다. 그것은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같이 협력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이지만,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찾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찾아가고, 애굽을 찾아가고 있지만 결과는 패망이었고, 오늘 말씀 7절에 마지막 결론을 보면 ‘너희들은 바람을 심었지만, 광풍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엄청난 저주를 지금 그들은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몇 가지 변화를 위한 중요한 말씀을 허락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함을 필요합니다. ‘주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제 문제가 그게 문제였군요’ 문제를 문제로 알지 못하니까 우상을 찾아가고, 바벨론에게 가고, 앗수르에게 가는 것 아니겠어요? 문제를 알고 나서 ‘이게 제 문제였습니다. 인정합니다’ 라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튕겨나가면 안 됩니다. 사실 체면이나 자존심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20년은 믿은 사람인데 이제와서 무슨 회개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고 나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해답이 1절 첫머리에 나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를 말씀하시지만, 그 해답을 먼저 말씀하시고 계신 거예요. ‘나팔을 내 입에 댈지어다’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은 나팔을 불어야지요. 목사의 사명은 나팔을 부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잠자는 영혼들을 깨워야 하는 겁니다. 기상 나팔을 불어야 하는 시간인지, 취침 나팔을 불어야 하는 시간인지, 지금 전쟁에서 전진해야할 나팔인지, 후퇴해야 할 나팔인지, 나팔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팔수가 나팔이 분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쟁을 바로 할 수 있겠느냐! 저는 늘 기도가 그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나팔수로 쓰시되, 바르게 쓰게 하옵소서. 나팔을 분명하게 불게 하옵소서. ‘황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제 설교는 제가 들어봐도 어려운 게 없어요. 신학적인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쉬워야 합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 말씀에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수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나팔수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성가대가 나팔을 잘 분다는 말은 성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거예요.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성가대라는 말을 쓰지 말고, 찬양대라고 하자. 그러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좋은 말씀이예요. 거룩한 노래가 인간을 위해서 부르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회갑잔치에, 칠순잔치에 결혼식에 가면 안 됩니다. 어디 가야 되요? 회갑예배, 결혼예배면 초청받아서 특송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배가 아닌 곳에는 성가대가 찬양대가 갈 수 없는 거예요. 정신 나간 겁니다. 예배는 주인공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팔을 분다고 할 때, 여러분 나름대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집사님으로써 불어야 할 나팔이 있고, 권사님으로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교사로써 불어야 할 나팔이 있고, 선교회원으로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이제 그 나팔을 입에 대라는 거예요. 이제는 내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고, 사명의 자리에 가라는 겁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서, 다른 데로 빈둥대고,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네가 지금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와 애굽으로 가 있고, 우상한테 가서 엉뚱한 곳에 있지 말라는 거예요. 죄악된 백성, 완악한 민족을 위해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들. 바로 그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해답을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을 우리는 고난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날이고, 이 날 주님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환호하느라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거나 들고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시러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 가신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고, 우리 성도들의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십자가의 길에도 영광이 있어요.

여러분 집사님 되시고, 권사님, 장로님 되신 것, 또 제가 목사가 된 것 다 이것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알고 보면 제가 후드를 하고 있는 것처럼, 소의 멍에를 형상화 한 것입니다. 목사의 멍에는 이만큼 큽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도 다 멍에가 있어요. 집사님이 장로 안 시켜 준다고, 권사 안 시켜 준다고 삐치는 것은 뭘 모르는 거지요. 작은 멍에를, 1Kg짜리 멍에를 10Kg짜리 멍에를 얹혀주겠다고 하는데, 이게 헌신과 결단과 생명을 내어 논 자세가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거 안 해주었다고 삐친다고 하면은, 시험 든다고 하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물론 고난의 길이 거룩하신 주님의 일이기에 우리는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는 고난의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물론 ‘호산나’ 환호했어요. 물론 해야 당연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들어가시고, 이제 이번주 금요일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1년 중에 가장 십자가를 여러분을 깊이 새기셔야 할 주간이 바로 이번 주간입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 주일은 우리가 가능하면 우리가 유흥에 관한, 즐거움에 대한 그런 것들을 절제하고 쉬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운동하는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이지만 그것도 좀 우리가 절제하자’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탄식과 분노밖에는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인 우리를 마지막 주님의 카드. 이제는 이 백성들을 위해서 이것 밖에는 안 되겠다고 하는 주님의 마지막 선택,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게 함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 줄 믿습니다. 당신의 허리를 창으로 찌르는 군사에게까지 ‘저가 하는 일을 저가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때문에 은혜를 입은 줄 믿습니다.

지금 오늘 1절부터 7절까지 어느 한 구석에 희망이 보입니까? 그런 우리를, 그런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하신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오늘 그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을 다시 한번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 삶 속을 지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용서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 십자가로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십자가로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 그 구원의 기쁨을 저희들 이제는 변함없이 간직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다시금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이 얼마나 컸음을 기억하며 새로워지는 한 주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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