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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눅 24: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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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24:24-35
제목: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평소에 수없이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음에도 이것을 믿고 기다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예수 부활에 대하여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더라 제자들도 들었습니다. 도마도 들었습니다. 이제는 부활에 대하여 듣고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어느 독일의 신학자는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색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 같은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믿어지고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불행이 무엇입니까?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의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이 믿어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믿어져야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하심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찬성자가 있고 반대하는 이가 있는 것 같이 어떤 엄연한 사건에도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믿어져야 부활주일 예배와 깊은 관계가 있게 됩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고 나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고 믿어지고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1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던 날에 두 사람의 제자가 믿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이들도 역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릅니다. 이론과 체험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내려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엠마오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제자들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요?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시청자 여러분들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1. 눈이 밝아졌습니다.

31절을 보세요. 처음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도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눈이 열려야 보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자신이 보입니다. 자기 자신을 못 보기에 되지 못하고 된 줄 압니다. 이것을 착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너그럽습니다. 자기가 실수한 것은 너그럽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자신을 냉철하게 봅니다. 어부인 시몬이 게네사렛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밤을 세우면서 그물을 던졌으나 빈 그물입니다. 예수께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보아라. 그럽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시몬은 즉시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순간에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선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공문서를 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눈이 열립니다. 우리는 보이는 눈이 열려야 하는데 깊이 그리고 넓게 열려야 합니다. 바울은 눈이 열리니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적은 사도라”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9 자신을 더 깊이 보니까 하는 “성도 중에 적은 성도라”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8 더 깊이 열리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하였습니다.(딤전 1:15) 볼 수 있을 때에 행복하여 집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을 보면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재산을 분배 받고 객지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여 가진 재산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고 갈 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와 품꾼의 한 사람으로 라도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행복한 아들이 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시야가 넓어져야 합니다. 처음에 운전 면허를 얻고 운전하게 되면 앞만 보입니다. 옆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익숙해지면 옆도 뒤도 잘 보입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처음에는 나만 보이지만 성숙해지면 다른 이웃도 보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보입니다. 열려야 합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교수가 있는데 그의 저서에서(종교체험의 다양성) 성숙한 종교적 인격자는 네 가지 품격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서 일상적인 삶이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넓고 큰 삶을 비전으로 삼고 산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얄팍한 이해관계에서 움직입니다. 이권을 생각하고 말하고 일합니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 손해를 보아도 좋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유거나 못했거나 오래 살거나 좀더 빨리 세상을 떠나거나 너무 깊이 집착하지 않는 초월한 삶을 사는 이가 성숙한 성자형 사람입니다.

둘째는 관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친애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다른 이웃과 관계를 맺고 원만하게 살아갑니다.

셋째, 성숙한 사람은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초월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기주의에 매이지 아니 합니다. 욕심에 매이지 아니합니다. 나 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삽니다.

넷째는 감정의 중심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애정으로 살아갑니다. 법으로 살지 아니합니다. 그런 법이 아니요 법대로 합시다. 그렇지 않습니다. 법도 도덕도 원칙도 있으나 애정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함으로 기도합니다. 사랑함으로 충성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2.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열정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을 마음이 냉랭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이 전도한다는데 전혀 자기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찬 마음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마음에 의심과 부정적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에 새로운 열정이 생겨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가 재능입니다. 지능입니다. 알지 못하고는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연습입니다. 계속 하고 계속 연습하여 익숙해져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탁월함이 나타나려면 10년 이상 그 분야에서 일해야 합니다.
넷째는 에너지입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성공하였습니다.
넷째는 집중력입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는 분명한 목표입니다. 우리는 실패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장애물은 넘어야 하고 비난을 받거나 방해가 있어도 오직 한 가지 일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함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 사람의 가슴에 불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열정으로 뜨거워졌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열정은 에너지입니다. 열정은 집중력을 갖게 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공허함과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의 선교열정이 세계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열정이 사명을 다하게 만듭니다. 열정이 사람으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듭니다.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열정적으로 작곡을 하였습니다. 하나의 곡을 열두 번 이상 다시 썼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8백 개 이상의 곡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는 그의 나이 66세 때 발표한 곡입니다. 창작의 열정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차디찬 마음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열정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이 시대는 불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맹렬하게 붙어오는 산불을 끄려면 맞불 작전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계는 음란과 패역, 이기주의의 불이 붙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맞불작전을 해야 할 때입니다. 병든 현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무관심, 냉혹함, 자기 중심으로 잘못되어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겠습니다.
웨슬리에게 동료 사역자가 물었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청중들을 모으느냐. 그때 대답하기를 “전도자가 불탄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불을 보기 위하여 모여든다” 고 대답하더랍니다. 개인의 가슴이 뜨거워지면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버트란드 럿셀은 자서전을 통하여 자신을 지배했던 열정과 영향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열정 세 가지가 있었다. 이 열정이 나의 인생을 좌우했다. 즉 사랑에의 갈망과 지식의 탐구였으며 그리고 인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까?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뜨거움이 미치게 만듭니다.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나는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내 아들이 교회에 미쳤다고 걱정합니다. 교회에 미치기만 하면 안심하세요. 사람은 어차피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성에 미친 사람은 다른 짓을 하지 않습니다. 놀음에 미치면 역시 보이는 게 없습니다. 마약에 미친 사람은 다른 짓은 안 합니다. 마약만 있으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미치면 걱정 없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로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충성된 마음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이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3. 변화되었습니다.

1) 절망이 희망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삶 전체가 어둡습니다. 모든 게 어둡게 보입니다. 우리는 환경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마음입니다. 절망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는 이는 죽을 병에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행복합니다. 희망, 나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희망을 상실한 이들입니다. 희망이 없는데 기쁨이 생길리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곤돌메기라는 물고기를 가지고 인간의 좌절감에 대하여 연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 어항 속에 곤돌메기를 넣고 그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충분히 넣고 얼마든지 잡아먹도록 한 다음 투명한 막을 곤돌메기와 먹이 사이에 세웠습니다. 곤돌메기는 허기를 느끼고 먹이를 향해 달려가면 투명한 막에 몸이 부딪히는 고통만 겪을 뿐 먹이는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 막을 걷어내고 곤돌메기 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봅니다. 장애물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먹이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 풍성한 먹이를 앞에 둔 체 굶어죽었습니다. 장애물에 부딪쳤던 경험 때문에 더 이상 시도하지 않고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좌절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상실하고 좌절하게 되면 기쁨은 없어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인간에게 희망은 큰 힘이 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원이 됩니다. 희망을 갖고 살면 순간마다 새 힘이 솟아납니다. 창조적인 능력이 주어집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거나 기죽지 아니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식이 없어 홀로 지내는 이들 외롭게 보입니다. 배움이 적어 움츠리는 사람, 건강하지 못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가난하여 하루살기가 어렵다는 사람 등 이들이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행을 치료하는 약이 있는데 바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신앙이요, 반드시 되어진다는 적극적인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희망을 상실한 채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희망을 갖게 되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2) 불신이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한국교회를 비판하기를 신앙은 철저한 보수 같은데 삶에 결여되어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믿습니다 라고 쌍시옷까지 부쳐서 말하는데 실제 삶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랄 때 부모는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자라서 말을 하게 되면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말 잘 들어야 한다 라고 주문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그러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믿음이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이제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기다립니다. 제자들 같이 즉시 다른 길을 가지 아니합니다.

불신앙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산다는 믿음 아니 죽어야 산다는 믿음입니다. 윌리엄 부스는 구세군 창시자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병을 얻었답니다. 중병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의사는 충고하기를 “이런 몸으로 전도생활을 계속하면 1년도 살지 못합니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부스는 깊이 생각한 이후에 죽음을 각오하고 열심히 전도생활을 계속합니다. 마침내 그는 병을 이기고 구세군을 창설했으며 84세를 살았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의사는 나를 버렸다. 그래서 나도 의사를 버렸습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죽고자 하면 아니 죽어야 삽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이런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산다.  죽어야 산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방향전환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 길이라 하면 먼저 사람이 다니는 통행의 길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도 길이요, 철도도 길입니다. 다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를 길이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도리를 따라 살고 짐승은 본능대로 산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도 바른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가는 길은 차도입니다. 사람이 가는 길은 인도입니다. 장사하는 이들이 가는 길은 상도입니다. 스승에게는 사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렇게나 가는 게 아닙니다. 정도로 가야 합니다. 영생의 길로 가야 합니다. 길은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도는 좁은 길입니다. 이 길로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좁은 길이 정도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을 택하고 가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통과하여야 가나안에 도착합니다.

제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다가 바른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엠마오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이 길은 사명의 길입니다. 육신을 위해 살려고 가던 길이 사명을 위해 사는 길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방향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만납시다. 영안이 밝아집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엠마오의 실패의 길에서 예루살렘의 헌신의 길로 바뀌어지는 부활주일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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