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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 요 1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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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본문 성경 : 요 11:24~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 11:25~26)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얼마나 희비가 엇갈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가까이 하던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단히 당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는 제목의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금년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하고 묻자, 약 67%가 "나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또 "그러면 앞으로 예수를 믿겠습니까?"하고 묻자, "그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까?"하고 묻자, "그것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사내용을 보고, "우리가 자손들에게 신앙을 철저하게 교육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전부 불신자 천국으로 만들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오늘 설교의 제목인 동시에 설교의 내용이며 뿐만 아니라 설교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 외에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과거를 말하는 회상의 종교이거나 미래에 대한 기대만 갖고 있는 종교가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현실을 중요시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했을지라도 오늘에 와서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며 집사, 권사, 장로였더라도 현재 신앙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완전히 불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교에서는 현실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 11장 24~27절의 말씀은 죽은 나사로에 관해서 그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예수님이 대화를 한 내용입니다.

마르다는 그녀의 오빠가 병이 들자 예수님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를 지내고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은 마르다는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참으로 후회스러운 말이요 원망스러운 말이요 안타까운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만약 예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자기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이와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리라"(요11: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마르다가 생각하는 것이 무척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르다의 오라비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반면에 마르다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무덤에 있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바꾼 마르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이때부터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에게서 "내가 믿습니다"하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후,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자신이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므로 오늘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고백함으로써 여러분이 살아나고 삶의 생기가 넘치는 영광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하신 말씀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빌라도를 찾아가서 군사들로 무덤을 돌로 막고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운명하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어 토요일 하루 동안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중요한 신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면서 주일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거룩한 날입니다. 생명이 있는 날입니다.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죄가 죽고 의가 승리한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

그러면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믿는 자에게도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친다면 거짓말을 하고 중상과 모략을 하면서 세상에서 활개를 치고 사는 세속적인 사람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나 보잘것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눅 12:9)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음란하고 음탕한 짓을 할 수 없고 도적질을 할 수 없으며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활을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싸우고 똑같이 욕심을 부린다면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모든 것을 참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깁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도 부활의 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믿음을 가진 자가 불신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자들이 왜 불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의 복음을 갖고 전파하는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전서 4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의의 사람은 비록 지금은 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때 강한 자가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는 신자가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가진 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의 중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같은 여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혹시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후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동할 가능성이 있으니 무덤에 사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잘 지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하게 지키던 군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일어나자 꼼짝을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1) 천둥, 번개가 쳤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자 군사들은 겁을 먹었습니다.

2)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때 땅이 갈라지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3) 돌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무덤을 꽉 막은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돌에 치이면 압사하겠기에 군사들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도망치면서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사들을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많은 돈을 줄 테니 절대로 예수가 살아났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그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고 하라"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권세로도 해결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외경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돈을 받았지만 예수가 부활하신 것은 확실하다"

2002년 부활절을 맞이한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가 살아나셨다"하고 외친 것처럼 여러분이 부활의 신앙을 확실하게 가짐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이 부활하고 은혜가 부활하며 주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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