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 요 11:25

  • 잡초 잡초
  • 247
  • 0

첨부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11 : 25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 부활자체를 부인하는가 하면 온건한 입장의 사람들일지라도 부활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부활 전의 몸과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등 무성한 의심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한편 구석에서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친히 게바에게 보이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셨고 열 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들과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으며 자신의 부활을 40일 동안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에 부활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생명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생명은 생명됨의 표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생명은 지금 이 시간에도 죽음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의 주체 입니다.

1) 예수는 죽은 한 소녀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는 허탈감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아버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막 5:36). 그 집에 도착한 예수님은 죽음이란 참혹한 정체 앞에 딸의 생명을 빼앗기고 울고 있는 통곡의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마가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40절에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우는 자들을 그 방에서 밖으로 다 내어보내신 후에 그 소녀의 부모와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열 두살난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주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심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부활을 확증해 주었습니다(막 5:42-43).
죽은 자를 소생시켰던 이적들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회생시킨 것이나(왕하 4:32-37)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사건이(행 20:7-12)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기적을 나타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써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어린 딸을 데려갔던 사망의 정체는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사망의 정체를 내어쫓은 그 집은 부활의 기쁨으로 인하여 넘치는 즐거움과 행복을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 예수는 죽은 한 청년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인성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의 거리에 위치한 곳이며 그 부근에는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던 곳인 수넴지방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지금 이 과부의 아들은 죽은 시신이 되어 관속에 담겨서 공동묘지로 운반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사망과 부활이 마주치고 있는 순간입니다. 죽음과 마주친 부활은 마침내 죽음을 호령하였습니다. 주님은 죽음에게 빼앗긴 아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죽음이 원수였습니다. 그녀는 이 죽음의 원수에게 아들을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빼앗긴 과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눅 7:13). 그리고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사망을 향하여 호령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리는 시간입니다.

그 결과 누가복음 7장 15-16절은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능력이 사망 앞에 유감없이 발휘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부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3) 예수는 죽은 나사로에게 부활을 명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3-44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입니다. 베다니는 "베이뜨" 즉, '집'이라는 명사와 "아니" 즉, '슬픔'이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슬픔의 집'에서 살았던 나사로였습니다. 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하는 자였습니다(요 11:3).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1:11). 그는 병으로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를 깨우기 위하여 나사로의 시체가 안치된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사망의 무덤 앞에 부활의 생명이 당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망을 향하여 큰 소리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했습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되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완전 사망의 정체를 향하여 호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부활을 명받은 죽은 나사로는 수건을 동인 채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개인을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그 공동묘지에 있는 시체들을 다 불렀다고 하면 다 일어날 것인데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최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하여 나사로 하나만을 부활시켰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활을 명령할 때 수건을 동인 것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겠다든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어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일어설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은 나사로 편에서의 사정이고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바로 신앙세계입니다.

성경이 죽은 시체가 부활한다고 하면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나 과학으로도 증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픔의 집 베다니는 이제는 베다니가 아니라 기쁨과 환희의 잔치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온통 베다니입니다. 이 세상은 슬픔의 집입니다. 괴로움의 집입니다. 그 슬픔의 집에서 부활 생명의 잔치를 배설하는 곳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 의 구원을 확증했습니다.

1) 믿는 자들의 의(義)의 본질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2) 믿는 자들의 영화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부활의 소망이 사라지면 모든 구조는 결단이 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3) 믿는 자들의 승리의 힘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4)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5)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23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습니다.

6)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우리의 구원은 죄를 속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그의 부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라고 했습니다(로마서 주석 p.102).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 각자의 부활의 확실한 보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역 사의 절정입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하는 말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너무 막연합니다. 역사란 어떤 이상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화 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꽃이자 절정이 분명합니다.

1) 믿는 자들에게 승리한 부활이 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에도 실패한 부활이 있고 승리한 부활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자는 심판의 부활이고 후자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승리한 부활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1)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인정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2) 신약시대 교회 시작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 부활 승천 이후 임하였고 이것은 바로 교회 출생의 기원이 되었고 교회 출생의 멤버는 사도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후 본격적으로 복음전파를 시작했습니다.

3) 복음전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 사건은 신약시대 교회의 혁명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부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활 사건은 왜 혁명적이지 못하고 전설처럼 쓸모 없는 이데올로기로 취급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부활 사건을 믿고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그의 죽음 자체를 화려한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예수 자신이 심판의 주시요 구원의 주이십니다. 구원의 수단이 구속이라고 할 때 예수는 구속 자체입니다. 예수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예수 자신이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인 영적 중생입니다(요 5:25).
그리고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았습니다(요 5:29). 이것이 둘째 부활인데 영원한 부활입니다(롬 8:23).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을 명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안에 있는 자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제2아담) 안에 있는 자는 부활과 영생을 보장 받은 행복한 자입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날 때 구차한 이유는 소녀 편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세계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소녀는 일어나는 순서밖에 없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이 청년은 일어나는 순서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친구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서 베다니를 걸어나와 가족과 함께 이 세상 괴로움의 집인 베다니 한 복판에서 예수를 위하여 가족들과 함께 부활감사의 잔치를 하는 순서밖에 다른 순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역사는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기를 쳤다고 할 것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았고 지금도 지구상의 기독교인 38 % 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땅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유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선하고 착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나라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인정되었습니다.
예수 부활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확증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칼빈(Calvin)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부활의 향기는 나드유와 값비싼 약이 없어도 온 세상을 살릴 만큼 충분한 효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