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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 사 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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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성경말씀 : 이사야 53:1-12



오늘 상고할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에 관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장의 예언과 복음서의 증언을 비교해 볼 때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50년경에 살았는데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두어 가지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이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11장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족보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사야서 35장에는 메시야가 행하실 기적에 관한 예언이 나오며, 53장에는 메시야가 받으실 고난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모스 3장 7절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메시야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 53장을 통해서 메시야가 받으실 고난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말씀해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비천한 신분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적에는 내세울만한 배경이 없으셨습니다. 양부 요셉은 목수였는데,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올라가서 결례를 행할 때 일년 된 어린양을 바치지 않고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눅 2:).

또 예수님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고 줄곧 이방인의 지역으로 취급받던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다는 사실 역시 그 당시의 시각으로 볼 때 비천한 신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것은 나중에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가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나서 자기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대뜸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처럼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동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많이 배우지 않으신 것을 알고 무시했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세계는 학문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아테네와 같은 도시는 철학으로 유명했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약 70만 부의 파피루스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문화가 발달한 다소 출신인 것과 유대에서 가장 탁월한 율법사인 가말리엘의 제자인 점을 내세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은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느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백성을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외모에 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외모에 관한 힌트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합니다. 키가 얼마나 되셨는지, 얼굴은 어떻게 생기셨는지, 목소리는 어떠했는지 도무지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이 복음서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외모가 평범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하기 때문에 외모가 수려한 사람은 대인 관계에서 한몫을 보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이런 이점을 누리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상적으로 볼 때 유리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 있는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수 없이 낮아지신 것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가난과 고단함과 슬픔을 몸소 겪으시기 위해서 더 낮은 자리로 임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하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대속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뿐 아니라 그 분의 생애 전부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삶이었습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고생을 하더라도 가족이 알아주면 견딜 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의를 가족이 인정하기는커녕 오해한다면 더 이상 가족을 위해 희생할 마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군대가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힘있는 사람들의 자식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만 가는 것이니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충성스럽고 강한 군대를 만들려면 군대생활을 영예스럽게 생각하도록 국가적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고 한 군가의 구절처럼 군복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떠나 이 죄악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시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조차도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당하신 슬픔은 다름 아닌 우리가 당해야 할 슬픔이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 52장 14절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속키 위해 심한 고난을 받으신 결과, 예수님의 얼굴과 몸은 몰라보게 상했고 수척해 지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는 인생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에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인생들에 대하여 가지신 불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붙잡혀서 심문을 받으시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았을 적에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처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사람들의 오해에 대하여 한번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왕에 마실 잔이라면 기꺼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고난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아셨기에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대로 가시면류관에 머리와 이마를 찔리셨고, 채찍에 맞아 등이 다 파이고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손발이 대못에 박혀 찢어졌고, 옆구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고 순전히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져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아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일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메시야의 태도에 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를 정죄할 증거를 찾았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증거를 찾지 못했으면 당연히 무죄 방면해야 마땅하지만 대제사장은 오히려 거짓 증인들을 두둔하면서 예수님께 묻기를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습니다. 법정에서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주님께서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고는 여러 가지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계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답답해서 묻기를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로 고소하는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이처럼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진리를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요 12:24).

우리도 이 진리를 배워서 압니다마는 실천하는 데는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신을 죽이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이 죽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덕을 세우려고 하지만 일단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그 때부터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다합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되면 될 수록 주님의 몸된 교회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으신 데도 묵묵히 죄인 취급을 당하신 예수님의 온유하신 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죽을 때 그로 인해 교회가 상처를 입지 않고 은혜롭게 될 뿐 아니라,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의 정당함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당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던 그 밤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와 함께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손에는 검과 몽치가 들려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자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셨습니다.

그 당시 로마 군대의 한 영은 6천명의 군사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열 두 영은 7만 2천명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기만 하면 즉시로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이 내려와서 대적들을 멸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난 받으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또 주님께서 대적들을 멸하시고 고난을 받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대속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모든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이와 같으신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서 어디서나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다 하심은 예수님께서 강도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12절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하신 예언 역시 성취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 27장 57절 이하에는 이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사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자였고,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허락을 받아 정성껏 장사를 치루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에 주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이로써 그 무덤이 부자와 함께 되었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고난 받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 받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말씀하면 “예수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신 분인데 어떻게 자손을 둘 수 있습니까?”라고 의아스럽게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신으로 사셨으므로 후손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영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을 일컬어 첫 사람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마지막 아담이라고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듯이, 마지막 아담 역시 인류의 조상입니다. 전자는 타락한 인류의 조상이고, 후자는 구원받은 모든 자의 조상입니다. 2천년 교회시대를 통틀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 한 분의 희생으로 인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이 지옥 형벌을 면하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던 예수님! 그러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을 적에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 놓았던 크고 질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갈라져 두 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만족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수많은 영혼은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탈취하신 전리품과 같아서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보시면서 흡족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무한하심으로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지 못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오랜 세월 믿어야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믿어도 즉시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기 위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불신 이웃에게 부지런히 생명의 주님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심으로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이 피곤하고 지칠 때, 세상 욕심이 우리를 유혹할 때, 고독할 때,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시금 힘을 얻게 되고, 주 안에서 자족하게 되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할 바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성도님들의 진실한 신앙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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