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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덧입기를 사모합시다 / 고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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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입기를 사모합시다 /  고후 5:1-5


[고린도후서 5장 1-5절]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 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활’의 신비스러움도 봄과 함께 주셨습니다. 봄은 ‘솟아오른다, 약동한다’는 뜻입니다. 겨울동안 죽은 듯이 숨어 있던 생명들이 봄이 되자 약동하고 솟아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봄이 되어 만물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건보다 훨씬 더 놀랍고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봄을 노래하고 꽃과 잎사귀와 수목들을 바라보면서 탄성을 지르면서 기뻐하지만 말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2000년 전 지나간 옛적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버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오늘 이 시간에도 위대한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중대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덧입는다(be clothed)와 ’벗은 자(naked)"라는 두 단어입니다. 고로 오늘 설교의 주제와 결론은 ‘덧입읍시다/ 덧입기를 사모합시다.’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옷을 단단히 껴입읍시다./ 옷 똑바로 입읍시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말 아닐까요? 3절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Because when we are clothed, we will not be found naked(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의 주제는 ‘벗고 입는 것/ 입고 벗는’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벗는 것(NIV의 naked를 그대로 번역하면) 나체, 알몸이 된다는 뜻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거 먹고살기 어려웠을 때에 ‘헐벗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애환이 깊이 서려있는 말입니다. 입을 옷이 없으므로 걸칠 것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예배당이 마루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봄, 여름에도 양말을 신고 가는 것이 품위 있게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예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교회들이 가난해서 의자를 놓을 수 없어서 마루바닥을 깔았는데 정작 가난한 교인들이 봄, 여름에도 양말(그 당시로는 정말 상류층 아니고서는 여름철에 양말 신는다는 것은 상상 못할 일이었다)을 신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요, 어색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배 시간 내내 양말 신지 아니한 두 발을 처리(?)하느라고 온통 거기에 신경을 쓰는 교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는 것(신는 것)’이 좋건만 입을 것이 없으므로 벗고 있어야만 하는 처지는 그 당사자로서는 아픔이요, 슬픔이요, 상처였습니다.

엊그제 서울지방법원(민사26단독 임영우판사)에서는 서울 여의도에서 노조 집회를 열다가 현행범으로 구로 경찰서에 연행된 7명의 여성들이 유치장 입감시 경찰관이 가운도 입히지 않은 채 옷을 벗게 하고 상의 끈을 가위로 자르는 등 여성으로서 극도의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과잉수색으로 인해 겪은 정신적 고통과 인격 침해에 대하여 국가는 100만원 또는 2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 단체들은 극도로 성적 수치심을 일으켰던 과잉 수색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비해 위자료가 턱없이 적다며 지금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입어야 할 최소한의 옷을 입지 못하고, 그래서 가려야 할 수치를 가리지 못함으로 그 수치 되는 부분을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떤 여성들은 참을 수 없어서 목숨까지 내 버립니다.

성경도 수치 되는 부분을 이야기 할 때 벗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창3:7,10. 계3:17) 그러므로 우리는 벗었다는 것과 새로이 덧입어야 할 이유를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벗은 자들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 땅에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 육신, 인간 실존을 가리킵니다.

땅에 있는 우리는 벌거벗고 사는 자들입니다. 물론 옷들을 입고 계시지요! 그러나 그 옷이란 모두 인공적인 것들입니다. 인간의 자랑, 교만, 과시, 자기공로, 지식, 철학, 도덕....들입니다. 이것들로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수치를 가리울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머리를 짜내어 나뭇잎을 엮어 옷을 해 입었습니다만 자신들의 수치를 결코 가리울 수 없었습니다.


* 우리의 장막 집입니다.

이 집은 우리 인생들의 손으로 지은 집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바벨탑을 쌓아 그 속으로 들어가 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 숨으면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라는 것은 ‘여기’있는 이 땅의 집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바벨탑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숨어 가지고는 결단코 인생의 수치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 바벨탑이 있던 곳을 이번 이라크전쟁 속에서 미군이 철저히 파멸시켜 버린 것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도록 해주고 있습니다.(벧후3:7,12 계20:11, 21:1)


* 벗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옷을 제대로 안 입히는 것이 극도로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것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들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수치요, 무서운 형벌입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라고 했으며 4절에도 보니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벗었다’라는 것은 우리(인생)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해 주신 그 인간다움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다움을 상처 입거나 상실했을 때 그보다 더 큰 부끄러움과 수치와 아픔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조국이 과거 1910년, ‘한국인다움’을 빼앗기고, 상실하고, 상처 입었을 때 우리 조상들은 너무 너무 부끄러워하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론인 장 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을 지어서 눈물로 읽었으며, 청년 장교 민 영환은 수치심에서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을 입어서 수치를 가려야 합니다. 계시록3:17-18을 들어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벗은 자들입니다? 입은 자들입니까?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벗은 몸’으로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물론 첫 번째 옷을 제대로 잘 갖추어 입으면 두 번째 옷, 세 번째 옷은 저절로 입혀 주십니다.(할렐루야)


첫 번째(우리가 입어야 할)옷은 ‘의의 옷’입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만들어 놓으신 공로가 바로 이 ‘의로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모셔들이면 선물로서 이의(의롭다 함)를 주십니다.(롬1:17, 3:22,26, 5:1-2, 8:1-2) 로마서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느니라“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
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의 옷/ 의인이라는 선포/ 의롭다는 판결을 주시고자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 주시려고 대신 옷을 벗기우고 수치를 당해 주셨습니다.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믿어 의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가 입어야 할)옷은 부활의 옷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꼭 입고 싶다/ 절대로 입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게 되어 있는 이 몸을 부활의 몸으로 변화 받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이 소원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바울 사도는 이 육체가 지니고 있는 연약함의 한계성으로 인생을 끝내 버릴 수는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육체를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맡겨 드림으로서 전능한 의사 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 즉 ‘부활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을 병 걸린 중환자가 의사에게 몸을 맡겨 수술을 통해 새롭게 살아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삽니다. 다음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합니다. 부활하되 ‘예수님의 생명’으로 부활해야 합니다.(할렐루야)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처럼 부활해야 합니다.(요11:25,-26, 고전15:20-21) 예수님을 믿어 ‘의의 옷’을 입은 우리는 ‘부활의 옷’을 반드시 입는 답니다. 그러므로 거짓종교, 거짓철학, 거짓의 영, 사탄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내세가 없다고 하는 말, 부활이 없다고 하는 말, 천국이 없다고 하는 말, 영원한 세계가 없다고 하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아침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영광의 주님으로 좌정하고 계십니다.(롬8:34, 골3:1-2, 마26:64)


세 번째 (우리가 입어야 할)옷은 천국 집입니다.

여러분! 서럽다 서럽다 해도 집없는 설움만큼 큰 설움도 없을 것입니다. 서울시민교회를 개척하던 시절, 당연한 일이요, 각오한 일이었지만 실제 당해보니 상처가 컸습니다. 정말 손바닥만한 단간방이었지요. 연탄 아궁이 하나 달랑 달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던 지요. 그 작은 한간 방에 책을 그냥 쌓아두어야 했고, 비키니 이불장 하나 있었지요. 19공탄 연탄난로를 그 좁은 방에 설치하고 그 연통에 아이 기저귀를 말려야 했습니다. 마루쪽 통로문 있어도 출입금지였으므로 쪽문 열고 나가 담장을 지나서 대문을 다시 열고 외진 재래식 화장실을 써야 했습니다. 좁은 방안에서 기저귀가 얼른 얼른 마를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햇살 나기를 기다려 오전 10쯤 옥상 빨랫줄에 기저귀를 말리러 가면 잠자는데 방해된다면서그것까지금지 시키더라고요. 할 일없이 밤 12시, 1시, 2시까지 놀다가 늦잠 자는 것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라고요. 그것도 우리보다 적어도 4-5살 어리면서 말입니다. 그 때 집없는 설움 정말 톡톡히 당해보았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장차 이 세상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면 다시 이 곳으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세상에서 거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할 곳이 없으면 우리(변화 받은 상태) 몸을 어떻게 의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천국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집이요, 영원한 집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를 위한 처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를 중요시하시고 준비를 하셨습니다.(요14:1-3) 그 집으로 들어가면 이 땅에서의 아픔과 눈물과 위험들이 다 사라지고 완벽한 보호를 받게됩니다.(계21:1-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옷’을 덧입고자 사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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