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계 5:1-14

  • 잡초 잡초
  • 438
  • 0

첨부 1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계 5:1-14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우리는 자연히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그분이 걸어간 행적을 묵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 기록들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들을 마음에 담고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어린 양이란  주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죽는 속죄 제물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세상 죄를 지고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속죄양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마주 앉은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그러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던지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미신 잔임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제자들은 한사코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 잔은 마시면 안 된다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일부러 가실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어느 순간 주님은 너무 힘들고 두려워, 마음이 고통스러워 땅에 엎드려 피땀을 쏟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일도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그러나 결국은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도가 아니면서도 강도들과 함께 죽으셨습니다. 강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시면서 마치 강도의 두목이나 되는 것처럼 두 강도 사이에 높이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법적으로 신분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노예를 죽일 때나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 언도 되는 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예나 반역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잔혹한 십자가 형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6~10시간 동안 서서히 죽어가는 무서운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선 그 무서운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기독교 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기독교를 나타낼만한 상징 한 가지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는 5만개 이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좁은 한반도 한 모퉁이에 5만 개 이상의 십자가 상이 사방에 촘촘히 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음식점의 경우 30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비록 음식점 간판보다는 작지만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을 찾으라면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십자가 상을 높이 세울까요? 기독교를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였던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처녀 몸을 통해 잉태했다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경에 많이 기록되진 않았지만 예수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인 교훈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헌신적으로 종의 삶을 보여주신 봉사활동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부활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부활도 아니다. 그러면 뭘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다스린다는 통치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존 스타트의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죽음이 기독교의 중심이요, 계시의 중심이다."라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20세기에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요, 교회의 상징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상징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경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검토하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모든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십자가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전에 예수님을 안다는 소리를 하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깊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 받게 되면,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본질이요, 기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중심이 예수님의 죽음, 또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요한계시록 5장을 펼쳐보면 우리에게 또 한번 이 사실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중심에 서 있는 사건이면서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서 귀양살이를 할 때, 하루는 환상 중에 하나님나라에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찬란한 어전이 그의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 어전을 보니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 계시고, 그 주위에는 24장로들이 앉아 있고, 또 네 생물이 있고, 그들을 둘러 호위하는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장 중앙, 하나님 바로 앞에는 어린 양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6절) 왜 하필이면 어린양입니까?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의 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왜 어린양의 모습으로 계십니까? 승리하신 만왕의 왕으로 서 계시지 않고 왜 어린양의 모습으로 계십니까? 어린양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흔적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는 다음 내용에서 밝히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보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구나!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그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도록 그런 모습으로 주님이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영광의 몸을 입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손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있었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도마에겐 만져보라고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이 그 상처를 그 몸에 그대로 가지고 계실까요? 마치 요한이 본 하늘나라의 어린양과 그 다음에 부활하셨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상처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 구원하시고, 이 땅에 모든 어두운 권세와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을 심판하신 다음,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고 영원히 통치하시는 그날이 되기까지는 아마 그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여전히 지니고 계실 것 같습니다. 여전히 어린양의 모습으로 계실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찬송가를 보면 유명한 맹인 작사가인 크로스 비가 쓴 찬송가가 있습니다. 바로 231장을 보면 거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그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주의 곁에 서서 배우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가슴이 찡한 기막힌 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에 서 계시는 분이 십자가의 흔적을 갖고 계신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 손에 책,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그 책에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스케줄이 다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두운 권세, 심지어 죽음과 사탄과 모든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모든 계획과 스케줄이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 6장 이하에 전개되는 모든 내용이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요, 심판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 책을 기록한 후에는 7번이나 봉인하여 아무도 함부로 펴보지 못하도록 비밀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거기에 기록된 대로 세상을 심판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책을 받아서 그 책에 있는 기록대로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얼른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자리에서 대성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곡과 불안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두루마리 그 책을 자기 앞에 서 있는 어린양 예수에게 주셨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인봉을 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자격자임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어린양 예수,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자요, 만 왕의 왕이시요, 영원한 제사장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 두루마리를 그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역사의 주인공이요, 중심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요한계시록을 잘 보면 어린양이라는 단어가 27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이 어린양 예수님의 존재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받들고 있는 척추 뼈와 같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 신앙의 중심이요, 기독교의 중심이요. 기독교의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할 때,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 싶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주목하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을 공부하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서 깊이 아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명희라는 분이 참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로 통한다. 어떤 길도 십자가의 길이 아니면 되돌아와야 한다. 어떤 화려한 말도 십자가가 아니면 맛을 잃는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로 마쳐야 한다. 십자가 터널을 지나, 십자가 그늘에서 쉼을 얻어야 한다."아름다운 시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항상 주목하고 바라보고 따르려면 다음 3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죽으신 주님, 어린양을 꼭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9절 중간을 보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 할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이와 같이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로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히 사함 받고, 그 용서함은 영원토록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도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이 사실을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인정하지만, 예수님이 정말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나름대로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실존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긍정하지만은 그 십자가로 인해 내 모든 죄가 영원히 용서 받는다는 확신은 받지 못합니다. 믿는 것 같은데 안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 특별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 중에 안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 초창기 멤버였던 오태영 장로님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이미 책에서도 이분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설교에도 한두 번 인용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설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분은 고급 장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과거 정부 때 나름대로 힘이 있는 자리에서 활동하신 분입니다. 저보다도 나이가 거의 15세 이상 연장자입니다. 처음에 그분과 같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인이라고 해봐야 10명, 20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이미 제대하고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얼마나 저를 좋아하고 존경하면서 신앙적인 지도를 받으려고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통하지 않는 이상한 기류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뭔가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 다 맞는데도 이상하게 하나의 코드가 안 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나중에는 제가 짐작을 했습니다. 이분 신앙의 근본 바탕에 문제가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다니면서 전도하는데 사용하던 사영리를 들고 찾아가서 방안에 단 둘이 앉아 그 사영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영리는 안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글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이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행히도 그런 책을 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펴놓고 같이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에 왔을 때, 그분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목사님"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실토를 해야 되겠습니다. 저는 장로 집안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군대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없는 부대에 가면 교회도 세우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 말씀을 조용히 목사님과 함께 나누면서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구나!' 그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한번도 인정한 일이 없고, 믿은 일이 없습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리고는 둘이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시간에 성령이 우리 두 사람에게 임하셔서 그 시간에 그는 거듭났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자기의 공로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얼마나 그분이 달라지고, 평생 은혜 가운데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하나님나라에 계십니다. 미국에 여행을 갔을 때에도 가끔 교회로부터 사랑의교회 장로라는 사실 때문에 간증을 요청 받으면, 그 때 사영리를 읽으면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시곤 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믿는 것 같은데 진짜 중요한 것은 안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안 믿어진다면 무릎을 꿇으십시오. 내 지혜로는 절대 믿지 못합니다. 머리가 좋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영안을 열어 골고다의 언덕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감동시키실 때 나도 모르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고 "주여, 나 같은 죄인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하고 주님께 매달리면 주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믿도록 해주십니다. 안 믿으면서 믿는체하고 교회 다니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10년, 20년 다녀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둘째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믿는다면 사랑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 이것을 믿어라."고 할 때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다고 믿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다. 믿어라."고 할 때 예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신다. 믿어라."고 할 때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믿어야 될, 또 믿고 있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말씀대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지금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분을 믿는다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말만 할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빠진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사역하던 35년 전, 그 당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던 마음이 참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과 사역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너무 감동이 되어 대학생 몇 명을 모아놓고 주일날 집회할 때마다 102장을 불렀습니다. R. F. 밀러가 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입니다. 세상에 그것보다도 더 진한 사랑의 고백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내용보다 진한 사랑의 고백을 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을 그분께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 찬송 가사가 너무 좋아 매주 모일 때마다 불렀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불렀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공부차 미국에 갔기 때문에 안 불렀습니다. 우리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25년이 넘도록 주기도문 송을 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너무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매주 불렀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참 기가 막힌 사랑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 대학생들과 이 찬송을 부르고 나서는 지난 30년 가까이 이 찬송을 잘 안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내가 이 찬송을 그 동안 너무 안 불렀구나. 내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렸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주님 앞에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금년 들어서는 저 혼자 개인 기도하는 시간마다, 이 찬송을 먼저 부릅니다. 주님을 다시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말입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 분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나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신 구원자도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변치 않는 사랑을 가지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주님,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으로 돌아가서 요한이 본 환상을 보면 기가 막힌 사건이 있습니다. 천상에서 삼중 코러스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책을 받아 펴기 시작하자 놀라운 합창이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8절에 보면 24명의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어린양 앞에서 거문고를 켜며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1절에서는 그 어전을 호위하고 있던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찬양을 시작합니다. 천사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양 예수를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13절에 넘어가면 땅,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 땅 아래 있는 자, 모든 우주 만물이 어린양 예수를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땅 아래 있는 자들이란 누구일까요? 아마 마귀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악한 세력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삼중 코러스가 천상에서부터 이미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도 교회를 통해서 이 합창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이 되면, 온 우주 만물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종려나무를 흔들고 거문고를 켜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찬양하는 삶을 좀더 보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 찬양하게 됩니까? 주님을 믿을 때 찬양하는 것입니다. 언제 찬양합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가 찬양하게 됩니다. 그 주님 때문에 내가 하늘에 있는 복과 땅에 있는 복을 다 받아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게 되었음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면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찬양하는데, 나중에는 온 우주 만물이 다 찬양하는데, 날마다 '주여, 주여' 하는 우리의 입에서 찬양이 안 나온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존경하는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을 아실 것입이다. 참 존경스러운 분인데, 이분이 쓰신 많은 책 가운데 뉴욕 어느 극장의 문지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그 극장에서 문지기 생활을 17년 동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 극장에서 문지기 생활을 할 동안 공연 장소 안에 들어가서 관람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17년 동안 한번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참 이것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공연장에 가면, 문 밖에 있는 사람과 공연장 안에 들어가서 관람하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예술의 전당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갔습니다. 주빈 메타가 지휘하고, 빈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와서 연주하는 자리입니다.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예수 잘 믿는 장연주 양이 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협연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갔습니다. 그 장 양이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선율이 주는 그 짜릿한 느낌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연주하던 장면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내 귀에 그 음악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밖에 서서 표나 주고 받는 사람은 관람석에서 느끼는 장면에 절대로 감동을 받을 수가 없는 거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골고다 정문 초소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거기서 바쁩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뭔가 요란하긴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저 골고다, 저 깊은 곳 언덕 위에까지는 생전 안 가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까지 날마다 나가서 그 놀라운 주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찬양하고 감동하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문 밖에서 문이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는 공연장에 들어가야 됩니다. 골고다 정문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 현장 앞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을 향해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 때문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찬양이란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 드리는 유일한 선물이라고도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은 영원에서도 시간이 짧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이 몇 년 되지 않는 생을 살면서 이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이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모르면 기독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이것이 우리 삶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우리 함께 이 찬양을 부를까요?
"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너는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로 가까이......"(찬송가 496장)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 머리 숙인 귀한 주의 자녀들을 이 시간 만나 주옵소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진정 주님을 믿으며, 진정 주님을 사랑하며, 진정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는 행복, 주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여, 이 놀라운 은혜를 이 귀한 자녀들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