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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부활과 나 /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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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활주일] 주님의 부활과 나(4/20)
본 문 요한복음 11:25~26

지난 4월 1일 갑작스런 홍콩 배우 장국영의 자살 소식이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가 자살한 이유가 밝혀지자 많은 영화 팬들은 더 큰 충격을 받게 됐습니다.

그는 소문대로 당당이라는 남자와 지난 17년 동안 동성연애를 해 왔답니다. 그러던 중에 최근에 20대 초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당당과 갈등을 빚게 되었답니다.

이제 17년 간 사귀던 당당과 이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 사귀게 된 청년을 버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고, 묵고 있던 호텔 24층에서 투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자살 사이트가 난무하면서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에 대한 막연한 동경까지 가지게 된 마당입니다. 이제 장국영과 같은 스타의 자살이 영화처럼 아름답게 미화되어 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매우 우려가 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결정적인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생, 번민, 갈등, 고통 이 모든 것이 죽음으로써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과연 죽으면 그만일까요? 마치 바둑을 두다가 생각대로 잘 안되면 돌을 던지고 다시 두듯이, 인생도 돌을 던지면 다시 둘 수 있는 것인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단지 통과 의례나 통과 절차가 아닙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넘어가는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은 무서운 힘을 가진 실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고전 15:55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죽음이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이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 고통, 견디기 힘든 문제들을 피해 죽음을 택했는데 더 큰 상대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컨대 늑대를 피해서 도망을 치다가 호랑이 굴로 들어간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힘겨워서 죽음을 택했는데 이 죽음은 인생의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자기를 공격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패배와 멸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

죽음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 인간에게 밀어 닥칩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우리에게 엄습해 옵니다. 그 놀라운 힘이 무서운 권세로 우리 인생을 짓누릅니다.

사망의 무서운 힘과 권세를 독사의 먹이 사냥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독사가 쥐를 사냥할 때 사냥행동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식간에 공격해서 독을 주입시킵니다. 다음으로 서서히 독이 몸 안에 퍼져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크게 벌려서 통째로 삼킵니다.

앞에서 살핀 고전 15:55를 보면 사망이 휘두르는 무서운 권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는 것입니다. 쏘는 것은 뱀이 독니로 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이기는 것은 독사가 독기 운에 꼼짝 못하는 먹이를 삼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망의 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켄트론(kevntron)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독충의 침이 사람을 찌르는 것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갈이나 독거미와 같은 독충들이 다른 동물을 공격해서 독침을 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망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마치 이런 독충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독사가 공격해서 독니로 무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합니다.

고전 15:56을 보면 이 사망이 쏘는 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공격해서 우리 안에 주입하는 독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 몸 안에 들어오면 마치 독처럼 서서히 우리 몸을 마비시킵니다. 우리가 우리 뜻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은 죄의 노예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망의 무서운 위력이요, 그가 휘두르는 권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망은 아직 죽기 전인데도 그 무서운 권세로 이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 단절된 채 비참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사망의 이기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니코스(ni'ko")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정복하다 승리하다 라는 뜻입니다. 마치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이라크를 완전히 장악하고 점령한 것처럼 정복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망이 이긴다는 것은 사망이 이제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독사가 독을 주입해서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먹이를 그 큰 입을 벌려서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죄라는 독이 이미 온 몸에 퍼져서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끌려 다니며 비참한 삶을 살던 인생들을 사망이 무덤의 문을 활짝 열고 삼키는 것을 말합니다.

계 21 8을 보면 사망에 삼키고 나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독사의 입에 삼키고 나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사망에게 삼키고 나면 영원히 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준비 없이 죽으면 큰 일 납니다. 겁 없이 스스로 자살하면 큰 일 납니다.

결국 사망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 쏘면서 공격해 와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죄 중에 죽게 되면 우리를 완전히 삼켜서 저 멸망의 구렁텅이로 내 던져버립니다. 이 무서운 사망의 권세가 지금 이 땅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이 사망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이 권세와 대항해 싸울 수가 없고, 이 권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

그런데 여기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이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망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시기 전에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릴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심과 동시에 부활의 능력을 얻게 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사망 권세를 깨뜨릴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주님은 이틀이나 지난 뒤에 오셨습니다. 물론 나사로는 이미 죽은 뒤입니다.

주님을 보자 마르다가 따지듯이 주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11:21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죽을 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 마르다는 그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믿음은 거기가 끝입니다. 일단 죽은 뒤라서 주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미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 버린 뒤라서 이제는 아무리 능력이 많으신 주님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주님도 사망 권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이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장차 십자가를 지신 뒤에 3일 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 당신 자신께서 곧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사망 권세를 무너뜨릴 능력 곧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망 권세가 주님을 무너뜨릴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주님께서 오히려 사망 권세를 무너뜨릴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서커스에서 동물 쇼를 본 일이 있습니다. 조련사가 호랑이를 조련해서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는 쇼입니다. 조련사는 채찍 하나를 들고 호랑이 십여 마리가 우굴 거리는 철장 안에서 혼자 호랑이에게 호령을 합니다. 앉으라면 안고 서라면 서고 불붙는 원통을 통과하라면 합니다.

만약에 조련사가 아니고 일반인이 그 안에 있었다면 벌써 호랑이의 밥이 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조련사가 호랑이를 뜻대로 다루시는 것처럼 사망을 다루십니다. 아무리 사망이 거센 힘으로 사람을 공격하고 무덤 속에 삼켜버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조련사 앞에서의 호랑이와 같습니다. 사망이 감히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실을 마르다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병을 고쳐주시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망 권세까지도 주님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런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신 사건입니다. 친히 무덤에 사흘 동안 갇히셨다가 보기 좋게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치 사망에게 KO펀치를 날리신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망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나

여기 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so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조련사의 도움을 받아 어린 아이가 호랑이 철장 속에 들어가 호랑이에게 호령하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의 능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도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0에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첫 열매이고 그리고 믿는 성도들의 그 다음 열매라는 것입니다. 나무 열매가 첫 열매하나 따고 마는 것이 아니고 계속 수많은 열매를 따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비밀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죽은 뒤에 부활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살아있는 동안에도 사망 권세의 지배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고전 15:55과 57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주님을 믿는 우리도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도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이 켄트론을 휘둘러 우리 안에 죄라는 독을 주입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죄 짓게 만들고 그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비참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이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망구스라는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동물은 저 무시무시한 코브라 뱀을 공격하는 코프라의 천적입니다. 코브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동물이 그 어떤 동물도 없는데 어떻게 해서 이 망구스만은 코브라와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코브라를 잡아먹기까지 할까요? 이 망구스의 몸에는 뱀의 독을 해독하는 알파뉴로톡신이라는 물질이 있어서 코브라에 물려서 그 독이 몸 안에 들어와도 죽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부활하신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죄를 다 씻어냅니다. 그 죄가 더 이상 우리 안에서는 독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도 사망의 삼키는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습니다. 일단 사망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일이 못 돼서 무던 밖으로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키었다가 물고기가 그를 토해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죽어 무덤 속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그 무던 속게 가두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재림하실 때 토해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에 아멘으로 답하면 그 즉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이 임합니다. 장차 다시 부활할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죄로 인해 신음하던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늘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던 사람들이 주님 주시는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담대하게 됩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절망하던 사람이 새로운 소망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게 해 줍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 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능력있는 삶,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 떠나는 날 장차 부활할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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