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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부활했는데 (요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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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부활했는데(요20:1-18)

우리 주님의 부활의 복된 소식이 교우 여러분과 가정, 하시는 모든 일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후에 그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막아보려던 모든 일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일들이 되었습니다. 큰 돌을 가져다가 무덤 문을 막고, 행정력을 동원하여 인봉한 것을 성경은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27:6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해 무덤을 지키게 한 일 등은 예수님을 부활을 더욱 확실한 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장례 문화에 삼우제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흘 동안 계속해 무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곧바로 떠나지 않고 무덤 주위에서 맴돌다가 얼굴이 썩기 시작하면 그제야 육체를 떠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안식일 예비일 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 무덤을 찾지 못하고, 안식 후 첫날에야 비로소 무덤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은 이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기는커녕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태도를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28:1)’,‘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막16:1)’,‘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눅24:1)’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자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시신을 보며 위로하고자 찾아왔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남겨진 빈 무덤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하지 못하고 시체를 찾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빈 무덤에 당황한 여인들은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요20:3-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자인 사랑받는 제자가 젊은이이기에 보다 빨리 무덤에 도착했으나 그보다 연장자인 베드로에게 주님의 부활을 먼저 목격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두 제자가 돌아간 이후에도 시체를 찾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무덤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도 부활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계속 울고만 있던 여인들은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20:13)’라며 주의 천사에게 시체를 돌려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요20:14).’며 동산지기인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요20:16) 하며 비로소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거나 슬픔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며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잘못된 소원으로 무덤을 찾았으나 결국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겠다고 여러 번 예언하셨고, 성경에서도 기록하고 있었지만, 부활을 깨닫거나 생각조차 못하고 시체만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은 잘못된 소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체 대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소원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으나, 진실한 마음, 간절한 소원과 사랑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바꾸어 주십니다.
플레처는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무조건 타당하다고만 할 수 없을 지라도, 잘못된 방법이라도 승화시켜서 결국은 부활하신 거룩한 몸을 제일 먼저 만나는 특권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혹 잘못된 동기의 신앙이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달려 나올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하신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미 부활하셨는데 아직도 무덤만을 맴도는 전성만을 갖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놀람의 얼굴이 아닌 기쁨과 소망의 얼굴로 내가 만난 주님을 전하러 달려갑시다. 그저 그 기쁨을 혼자만 누리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부활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온전히 부활을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청년처럼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도 믿지 못하고 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던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전파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식은 계속 증거됩니다. 그것은 큰 역사를 낳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 일어난 후처럼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함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이 지배하였던 것처럼 오늘에도 힘의 논리가 인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힘과 경건의 능력은 추락하여 영적 혼란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들을 해결할 길은 예수 부활의 복음이 전하여지고 그 능력이 어둠의 권세들을 물리치는 길 뿐입니다. 내가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 뵙고 혹시 잘못된 소원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시는 은총의 자리에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전합시다. 두려움과 놀람의 얼굴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얼굴로 주님의 말씀을 전합시다.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우리의 삶의 자리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이자 또한 장애우선교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 장애우들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의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애나 영혼의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온전하신 못한 것을 우리 모두도 깨닫고 부활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 놀라운 변화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직까지도 여전히 무덤에서 맴돌고 시체에만 집착하고 있는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며 그 소망으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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