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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부활이요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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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요11: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어떤 마을에 꽃을 파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의 생활은 가난하셨습니다. 그래서 입고 계신 옷도 늘 허름했습니다. 또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손마디도 굵고 거칠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만큼은 늘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보고서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행복한 할머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 그렇게 많으시기에 늘 싱글벙글하십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 이 나이에 어찌 늘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행복을 지키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답니다.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만에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인답니다. '사흘만 기다리자! 믿음으로 삼일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내 마음이 한결 평안해 진답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사흘 뒤에는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조바심 내지 말고, 사흘 동안 믿음으로 잘 견뎌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중세 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어느 마을에 로잘린이라는 젊은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에 의해서 성지 예루살렘이 빼앗겼다는 사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십자군 전쟁에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서 로잘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로잘린의 부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틈을 타서 하인이 못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재산을 모두 빼앗고는 로잘린 부인을 그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잘린 부인은 자기의 시녀를 데리고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곳저곳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한 작은 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친절했습니다. 그들은 로잘린 부인과 그의 시녀가 그들의 마을에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로잘린 부인에게는 닭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양의 새인 닭은 유럽에서는 아주 귀할 때였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닭을 정성껏 키웠습니다. 매일매일 낳는 달걀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친절에 작은 것이지만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아놓은 달걀을 삶았습니다. 그리고는 달걀을 예쁘게 색칠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로잘린 가문의 오래된 가훈을 적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

로잘린 부인은 동네 어린 아이들을 모아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 날 오후였습니다. 한 초췌한 모습의 소년이 그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향집으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로잘린 부인은 그 아이의 손에도 삶은 달걀을 쥐어주면서 병든 어머니에게 갖다 주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삶은 달걀을 가지고 병든 어머니를 찾아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허기진 모습으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십자군 병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병든 어머니에게 주려고 가지고 가던 달걀을 십자군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허기진 병사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 쥐고서 먹으려고 껍질을 까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집 가훈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
그는 바로 젊은 귀족 로잘린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와서 보니까 아내는 어디론가 떠나간 뒤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기진맥진해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달걀이 계기가 되어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잘린 부부는 그 때부터 부활절이 되면, 달걀을 삶고 예쁘게 색칠한 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절 달걀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뜻깊은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기쁨과 축복이 충만하게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슬픔을 당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마르다를 찾아오셔서 그를 위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26절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믿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의 부활이요, 나의 생명이신 분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내가 확실히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기의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마르다의 집에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되셔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금 살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부활의 신앙이 좀 더 확고해 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resurrection."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시라는 사실을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예컨대 요2:19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금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살아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 기적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물론 이런 부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금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금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죽어도 얼마든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아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꺼이 주를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 되십니다. 우리가 죽어도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여기에 야간 열차가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승객들이 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신분도 다릅니다. 한 가지 공통된 점은 누구든지 간에 각자를 위해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때, 정해진 정거장에서 모두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은 어둡습니다. 자기 스스로 한 번도 내려본 경험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리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정해진 정거장에서 어쩔 수 없이 다 내려야 합니다.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첫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차 안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었습니다. 돈 보따리가 커졌습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나만큼은 내리지 않고 영원히 이 열차 안에서 살아갈거야!"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처럼 그저 돈을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돈 보따리가 커졌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느 날 그를 위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는 발버둥을 쳐봅니다.
"내가 가진 돈 보따리를 다 줄 테니까 내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까? 꼭 내려야 한다면 돈 보따리를 가지고 내리면 안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도 빈 몸으로 쓸쓸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작가였습니다. 그가 내리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셋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차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러다 과로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자신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그가 내리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쉬워했습니다. 때가 되면 그를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삶을 본받아서 그가 한 일을 계속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승객과 같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승객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넷째 승객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때를 따라 힘써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종소리가 울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가 아닙니다. 영원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라는 신호입니다. 새롭게 출발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다. 용기를 가지십시다."
확신에 찬 그의 음성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십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도 넷째 승객처럼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시라는 사실을 힘써 증거하십시다. 그리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I am the life."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육이 산 사람이 아니고, 영이 산 사람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 곧 영원히 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이 살았다고는 하지만 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이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Moody가 임종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때 무디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Behold this is glories(보라 영화스럽도다)!"
"The earth recedes and the Heaven is coming(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임하는구나)!"
"God calls me(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났다 할지라도 믿지 마십시오! 무디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려 가지 않습니까?"
그는 환희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아들의 손을 꼭 쥐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큰 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Good bye!(잘 있거라!)"
작은 아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렇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얘야, See you again!(또 만나자!)"
왜 서로 다른 작별인사를 했을까요? 큰 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 그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어머니가 있는 천국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니까 어머니가 가 계신 천국으로 언젠가는 오게 될 것입니다. 다시 주 안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Good bye"와 "See you again"의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가 어떤 사람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서 위협을 합니다.
"있는 것 다 내놔! 안그러면 찔러 버릴거야!"


여러분, 생명이 중요합니까? 그까짓 물질이 중요합니까? 우선 살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있는 것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는 사정을 하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늘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깊은 뉘우침이 그의 마음 속에 감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건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건만……"
그것을 알면서도, 또 그 사실을 믿으면서도 그는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내게 생명을 주셨으니 내 가진 모든 것 예수님의 것입니다. 다 예수님께 드립니다. 다 가져가십시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드릴 때는 언제나 인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강도 앞에서는 목숨만 살려주면 모두 드리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강도를 믿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나의 주님은 나의 부활이시요, 나의 생명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마르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나의 부활이시요,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리할 때 마르다의 가정에 놀라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부활의 축복이 나타나서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만에 예수님이 다시금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태양 빛이 아무리 강하고 밝게 비추인다 할지도 뚜껑을 닫아놓은 항아리 속은 비출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시요, 우리의 생명이 되시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주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서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을 제창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다른 꿈이 있었습니다. 신문기자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무엇이든지 "내가 하면 된다!"라는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학점 관리를 잘 했습니다. 또 사회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원하는 신문사는 어디라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신문사에 시험을 치르고 면접도 보았습니다. 이제 합격통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편물을 열었습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신문기자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문사에서는 당신을 채용할 수 없음을 밝혀 드립니다."
그는 이제까지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신념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그 뒤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기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4:13의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필은 지금까지 뒷부분 말씀에만 집중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노력하고 애쓰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전반부를 빼먹은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되겠습니까? 그는 뉘우쳤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기 위해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진로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은 나의 부활이 되시고, 나의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와 같이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답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마르다의 가정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부활의 축복, 부활의 기적, 부활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귀한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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