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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기상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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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상조론 -- 학 1:1-15

*도입
학개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기 약 10년전에 태어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있다가 해방을 맞은 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기간이 약 70년쯤 되었으니까 학개선지자의 연세는 아마 80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 학개서는 성경전체 중에서 두 번째로 짧습니다. 그리고 학개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서 별로 알려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70년간의 포로생활중에 몸에 배었던 나쁜 습관들을 다 버리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시기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것도 80연세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선지자를 통해서 뭔가 애타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학개선지자의 음성을 오늘 이시간에 우리도 듣기를 원합니다.

*역사적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학개서 1장 1-15절 말씀은 에스라서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을 때, 고레스라는 사람이 바벨론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한가지 선물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자기 나라로 돌아가도 좋다는 해방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스라엘백성들은 고향 예루살렘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스라서 2장을 읽어보면 약 5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성전 건축을 서둘렀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전건축은 무엇보다 앞서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성전재건은 민족적으로 보면 해방후에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또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성전재건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시편을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많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 걸터앉아서 옛성전을 생각하고, 또 옛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일들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장면들을 나옵니다.
그 시편을 읽으면 성전을 잃고 슬퍼하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주춧돌을 놓는 그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이 시작되자 마자 1년도 안되어서 성전재건이 중단됩니다. 시작하자마자 중단되었어요. 이 중단하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의 방해 때문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들과 우상을 섬기던 이방민족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민족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전을 짓는데 자신들도 참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성전을 짓는데 이들을 참여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했는데 이때부터 성전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라 4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이렇게 성전건축이 중단된채로 약 15년이 흘러갔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성전건축의 열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성전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방해꾼들 때문에 그들은 성전 건축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건축이 중단된 이후에 어떻게든 난관을 이겨내고 다시 성전건축을 시도했어야 하는데,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에 성전건축에 대한 처음의 열망이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건축에 대한 꿈과 열망을 다 잊어버리고 모든 관심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넓히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이렇게 15년의 세월이 흘러가서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열망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되고 말았던 바로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열망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세운 선지자가 바로 학개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태도와 하나님의 책망
이 학개선지자는 등장하자마자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해서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 1장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전은 버려져서 황폐하게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집은 아주 화려하게 치장을 해놓고 사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마디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을 중단하게 된 원인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때문이었습니다. 분명히 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있었습니다.  1장 2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성전을 재건하던 중 어려움을 만나자 이들은 곧 시기상조론을 폅니다. 주변의 상황을 보니 반대세력들이 있고, 또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아예 싸워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채, 아직은 성전을 지을 시기가 아니다라면서 쉽게 포기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자신들에게로 돌려버렸습니다. 9절입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외적인 환경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바로 얼마전에 성전건축을 마쳤습니다. 그동안 모든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속을 얼마나 태웠습니까?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해도 번번히 펑크내는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속이 탔습니까? 오죽하면 장로님이 직접 자재생산현장까지 가보셨겠습니까?
비단 이 일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어지는 형편을 보고, 좀 어렵겠다 싶을때마다 아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면서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온다면 아무것도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때로 이런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녀의 교육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강남의 어느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에게 이제 고3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잘 해오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자식의 신앙보다는 대학을 더 염려한 그 집사님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 그러니 지금은 공부에만 집중해라. 그리고 교회는 입시가 끝난 뒤에 가면 된다".
그러면서 주일에 고액과외를 시켰습니다. 당연히 교회출석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못가게 된 이 아들도 처음에는 마음이 좀 불안하더니 본문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날이 갈수록 점점 무감각해졌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원하던 명문대에 진학는 했지만 이때부터 이 집사님에게는 큰 아픔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이 아들이 학교행사다 뭐다 하면서 도통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술먹고 늦게 들어오고, 신앙인으로서의 이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로 달래보기도 하고, 화도 내보았지만 이미 아들은 신앙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지금은 공부해야 할 때라고 시기상조론을 편 부모로부터 그 아들은 신앙생활은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주님을 떠나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절대 놓아주지 않아요. 주님밖에서 성공한 사람, 마귀가 써먹기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된 사람은 성공하든 못하든 항상 주님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안전이에요. 그것이 평안입니다.
또 능력면에서 시기상조론을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봉사할 부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봉사는 각각의 받은 달란트를 사용해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 자신의 능력없음을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더 배우고 난 다음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를 때 응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봉사를 부탁할때 처음보는 사람에게 하지 않습니다. 좀 두고 본 후에,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적합하다고 생각된 사람에게 합니다.
어느 누구도 능력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봉사는 능력이 출중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자는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감당합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하나님께 사용받음을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자를 써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 시기상조론을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돈을 좀 벌 때라는 것입니다. 돈 좀 벌고 성공한 후에 그때 한번 열심히 해보겠노라고 합니다. 주일성수, 교회봉사도 좋지만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한번 멋들어지게 하겠다는 것이죠.
바로 오늘본문의 이스라엘백성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는 관심을 쓸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만 집중했습니다. 즉 흔히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적인 삶을 향해 모든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그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애쓰지만 효과가 없는 삶, 만족하지 못하고 늘 아쉽고 궁핍하고 모자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 소위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순서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먼저 세우고 자기의 집을 세워야 하는데 자기의 집을 먼저 세우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하다 보니까 계속 모자라고 아쉽고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약 15년 동안.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큰 교훈을 줍니다. 지금 다시 성전을 세우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일에 한번 힘을 쏟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잘 살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충성이나 하나님을 위해 물질을 바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절 이하의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학개 선지자의 도전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들이 과연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헌금해서 망했다는 사람 없습니다. 주일성수해서 망했다는 사람없습니다. 교회봉사하느라 망했다는 사람없습니다. 오히려 주일성수하는 것이 복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복받는 길입니다.

*순종하는 이스라엘
참 감사하게도 학개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시 성전재건에 착수합니다. 12절입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또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13절을 보면 이렇게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앞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주어졌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는데 유월에 합니다. 유대인의 달력으로 볼 때 유월이면 지금의 구월쯤 됩니다. 이때는 추수기입니다. 1년중 가장 바쁠 때입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그들은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사실 한가한 시절에도 성전재건에 관심도 없던 이들이 이제는 가장 바쁜 때에 우선적으로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정해진 때가 없습니다. 해야 할 그때가 정해진 때입니다. 부름 받았을 때가 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들에게 위대한 능력으로 함께 해주십니다. 그 증거를 보겠습니다. 에스라 5장 17절입니다.
이제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국고에 조사하사 과녕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전을 예루살렘에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더라

그동안 성전건축을 방해했던 방해꾼들은 이스라엘백성이 다시 성전을 짓기 시작하자 이번 기회에 다시는 성전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서, 왕에게 고발합니다.
사실 성전건축은 이미 이전 고레스왕에게 허락받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이 거짓이라 생각한 방해꾼들은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당시의 왕인 다리오왕에게 그 사실을 고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그 사실이 거짓임을 밝혀서 이스라엘을 다시는 꼼짝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다리오 왕이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서고를 열고 찾아보니 그와같은 일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적극격려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6장 3-5절입니다. (읽는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다리오왕은 그동안 성전건축을 방해한 무리들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11-13절입니다. (읽는다)
"너희들이 말한대로 살펴보니 그것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성전재건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도 더 이상 방해말고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도 성전건축에 협력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방해꾼들의 표정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통쾌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힘이나 안들지요. 자기들의 재산을 빼앗기지나 안지요. 괜히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렸다가 방해는커녕 오히려 성전건축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실 이스라엘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 방해꾼들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큰 문제였습니다. 도저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히게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우선주의로 사는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성도들을 힘들게 하는 어떤 세력이라도 그 세력을 변화시켜서 우리를 돕게 만드십니다.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마귀의 모든 계략들을 수포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으로 살 때 그동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일들이 해결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15년동안 뼈빠지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형통치 못했던 그들의 삶이 성전건축에 힘씀으로 한순간에 형통해졌습니다.
즉 성도들이 하나님중심의 삶으로 돌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형통케 해주십니다. 어려운 일이 여러분 앞에 놓여있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여러분 앞에 놓여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십시오. 그리고 더욱 하나님중심으로 사시도록 힘쓰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형통케 되는 길입니다.

*결론
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보다는 상황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내 자녀라고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자녀의 앞날은 캄캄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자녀입니다.
학개서 전체를 마 6장 33절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많은 사람들이 시기상조론을 펴며 신앙을 뒤로 한채, 자기 삶에 빠른 이유는 사실 '이 모든 것' 즉 의식주에서 만족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이 모든 것을 얻는 비결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본향을 두고 사는 우리 성도들은 환경만 탓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큰 일을 하기 위해서 앞장설 때 아픔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할 때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려 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해주마"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행복은 그 분이 나를 아시고 나를 쓰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 사실 하나 때문에 오늘도 삽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주님께 봉사해오셨습니까? 얼마나 바른 자세로 주님을 섬겼습니까? 혹시 때로 시기상조론을 펴면서 내 개인적인 삶에 시간을 먼저 쓰고, 남는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최선의 것을 드리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다'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열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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