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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함께 주의 일에 참여합시다 / 눅 19: 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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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주의 일에 참여합시다
눅 19: 28-40


  오늘은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4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함께 주의 일에 참여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의 일에"라는 말은 "주의 고난에"로 바꾸어서 "다함께 주의 고난에 참여합시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길바닥에 종려나무를 깔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기도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주님의 고난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이 극치를 이루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합시다 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 한가지 일로 모두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말씀을 따라 그들이 주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한 것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헌신으로 참여 (28-35)

  우리들의 몸은 귀합니다. 천하의 한아름 되는 금덩어리를 줄 테니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또 당신의 아내를 내놓으라 할 때에도 아내를 내놓을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만큼 나 자신의 몸이나 아내의 몸은 천하를 갖다 주어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귀한 몸을 가지고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고난에 동참하며 충성한다는 것은 굉장히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에서 3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여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헌신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은 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려 하실 때 베다니와 벳바게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두 제자를 불러서 건너편 마을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이에 곧 주님의 명하심을 받고 가서 나귀를 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심부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올라갈 때에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예수님이 뽑으셨고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심부름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니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몸으로 직접 뛰는 것이 심부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로는 명한 대로 헌신했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건너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시키지 않은 것 중에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은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라고 시키는 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이름 없이 헌신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두 제자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으면 이름을 밝혀줄만 한데도 성경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봉사하고 섬길 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을 앞세우게 되면 그런 봉사는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자발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나귀를 주님 앞으로 끌고 온 후에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걸쳐놓았습니다. 그 겉옷 위에 앉으시라는 뜻입니다.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를 많이 타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를 타고 10리만 가면 소에게서 땀이 나서 바지가 젖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소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바지에 때가 끼게 되고, 소에게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바지에 배고, 소에게서 빠진 잔털이 바지에 붙습니다. 나중에는 옷이 정말 더러워집니다. 이렇듯 두 제자들은 주님이 아무 깔개 없이 나귀를 타면 바지가 더러워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걸쳐놓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옷은 더러워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입니까?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돈 받고 한 것입니까? 알아서 한 일입니다. 봉사는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사실상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도 이런 헌신으로 동참하고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 한 주간은 절제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제2차대전 때, 독일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가 폭격을 맞아서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쓰러져서 땅에 묻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 갔던 교인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묻힌 동상을 꺼냈는데 손목이 잘려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교인들이 의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전의 손과 똑같이 만들어 붙이자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그 동상을 녹여서 새로 만들자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세우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나중에는 그대로 세우자는 의견이 많아서 그대로 세웠는데 예수님의 손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동상의 밑에 글을 새겨 넣었는데 "주님, 주님의 손이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바로 우리의 손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이 한 주간도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즉 주님의 고난에 헌신으로 참여하자는 말입니다.

  둘째, 가진 것으로 참여 (31-34)

  우리들은 없다고 해도 가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네게 있는 경우가 많듯이, 네게 없는 것이 내게 있는 것도 많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밀라노 한인장로교회 집회를 다녀왔는데 성가대에 대해서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가대의 전원이 이태리 밀라노로 성악 유학을 온 유학생들이었습니다. 성악전공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얼마나 찬양을 잘하는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서울시립합창단, 안산시립합창단 또는 부천시립합창단들과 같이 노래 잘하는 전공자들에게 월급을 주고 뽑아서 이루어진 합창단의 노래는 많이 들어봤지만, 성악전공자로만 이루어진 교회의 성가대는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이 돈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들의 재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달란트인 노래로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충성된 삶을 살고 있는데 그분들은 아주 복되고 귀하더라는 것입니다.

  정신지체 장애아동을 교육하는 광성하늘빛학교의 선생님들을 보시면,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분들입니다. 일반학교 선생님들과는 다릅니다. 일반학교에서는 30∼40명의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면 모두가 말을 잘 듣지만 하늘빛학교 학생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 반의 학생이 6명이지만 그 학생들을 관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정신지체나 정서장애 아동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이 매일마다 순서를 정하여 각 반에서 교사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얼마나 그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가르치는지 1년만 공부하고 나면 달라지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을 통합해서 교육을 시키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나 이렇게 통합해서 교육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통합을 하면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모두 다같이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며 예배드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광성하늘빛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정말 잘 가르치는 특수교육의 재능이 있습니다. 일반 초등학교의 교사들과는 그런 면이 다릅니다. 그래서 장애아동을 잘 보살펴서 비장애아들과 잘 어울리도록 합니다. 하늘빛학교의 특수교사들에게는 이런 특별한 재능과 소명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사들은 자기들의 가진 재능으로 주의 일에 봉사함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에서 34절을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말없이 내놓았습니다. 즉 나귀의 주인들은 말없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면서 건너편 마을에 가서 매어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임자가 나타나서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만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건너편 마을에 갔더니 정말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나귀를 풀 때 임자들이 왜 푸느냐고 합니다. 주인이 한 명이 아닙니다. 임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나귀가 비싸기 때문에 혼자 살 힘이 없는지라 여러 명이 함께 샀습니다. 그런데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나귀를 보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봉사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니까 말없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조건 없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나귀는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물건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연자맷돌을 돌리기도 하면서 사람이 일하는 것의 두배 세배를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귀를 하루 빌려주면 그 나귀가 저녁때 돌아올 때에는 사람의 세배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아주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필요하니 하루만 쓰겠다는 의도였었습니다. 하루면 세 사람 몫의 품삯을 받을 수 있지만 임자들이 그것을 내놓으라고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 없이 대가없이 주님께 내놓았고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끝까지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나귀 주인이 처음에는 멋모르고 빌려줬다가 오후가 되어도 되돌려 주지 않으니까 찾아가서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쓰시고 싶은 대로 끝까지 쓰시도록 한 것입니다. 끝까지 봉사하고 끝까지 충성한 것입니다. 주께서 되돌려 줄 때까지입니다.
  넷째는 함께 내놓았습니다. 나귀 임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두사람 이상이기에 한사람만 강력하게 반대를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임자들은 하나같이 주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는 이 주간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주님께 내놓으며 봉사하고 충성하며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굉장한 부자 록펠러를 아실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리고 앳된 젊은이였을 때까지만 해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돈벌기 시작하자 돈독이 오르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50이 넘어서자 허탈감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면서 정신 이상증세가 오고 끼니를 거르며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첫째 벌기가 힘들고, 둘째 모으기 힘들고, 마지막으로 잘 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씀씀이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패가 갈라집니다. 록펠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교육사업을 시작하는데 학교를 짓는 일에는 열심히 동참했습니다. 이 사람이 직접 세운 학교가 미국에 있는 시카고 대학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짓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도와주었고 이분이 직접 세운 교회가 미국 맨하탄에 있습니다. 또 병원을 짓고, 자선사업을 합니다. 나아가서는 선교사업을 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기의 가진 것으로 주의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귀 임자들도 자기들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 나귀 한 마리를 어울러 산 것이 아닙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시니까 말없이, 조건 없이, 끝까지 내놓은 이런 봉사가 여러분들의 봉사요, 주의 일에 함께 하는 참여이기를 바랍니다.

  셋째, 찬송으로 참여 (36-40)

  본문의 36절에서 40절을 보면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며 찬송을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그 찬송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저희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찬송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행사를 체험하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하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병고침의 능력, 오천명을 먹이신 능력,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능력의 모든 것을 본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뻐하며"찬송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지겨워하며 억지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를 부를 때 5절까지 있는 찬송 그것도 두 쪽에 걸쳐있는 긴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 인상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또 한번 더 부르자고 하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런 찬송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없습니다.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즉 열정적이요, 최선을 다해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런 찬송으로 주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찬송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불만을 토했습니다. 찬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찬송을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찬송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찬송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봉사하는, 충성하는, 신앙고백 적인 찬송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첫째로 헌신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가진 것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이 갖지 못하는 것,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 됩니다. 셋째로는 찬송으로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체험을 통해서 기뻐하며 큰소리로 찬송할 때 주님은 열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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