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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를 다스리라 / 시 39:3~4, 마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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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를 다스리라

                        2003년 4월 27일, Internet 설교문
                        시편 39:3~4, 마태복음 18:7, 11:21
                                 
베트남의 승려이자 시인이며 평화 운동가인 틱낫한(Thich Nhat Hanh)은 열여섯의 나이에 불가에 입문하여 평생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죽어 가는 동포들을 위해 전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과 법회를 열고 불교 평화 대표단 의장으로서 파리 평화 회의를 이끌어 왔습니다. 이런 활동으로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 받지만 베트남 정부 박해를 받아 귀국을 금지 당했습니다.

1960년대 그가 주창한 참여 불교는 내세론에 기댄 기존 불교의 빗장을 열고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삼아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현대인에게 영적 안식을 주며 종교의 실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은 바로 살아 있는 법문 그 자체입니다. 그의 저서로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화"라고 하는 책은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화를 품고 사는 것은 마음 속에 독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오늘의 사회를 진단하면서 가정에서 아내나 남편에게 혹은 자녀에게 직장에서 상사나 부하 혹은 동료 직원에게 연인이나 친구 혹은 자기 자신에게 사회 정치적 현상에 잔뜩 화가 난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가 빈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니 몸집이 절구통 같은 부인이 푸들 강아지를 데리고 의자를 둘씩이나 차지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한사람 몫의 좌석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몹시 피곤하고 지쳐 있었으므로 부인에게 예의 바른 태도로 양해를 구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좌석을 비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부인은 못 들은 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개 대신 저를 앉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머리를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사나이는 화가 나서 그 강아지를 버스 창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나이가 그를 한심한 듯 바라보면서 "나쁜건 강아지가 아니라 그 여자가 아니요? 당신은 엉뚱한 것에 화를 내고 있군요. 마치 엉뚱한 것을 칭찬하듯이 말이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보면 엉뚱한 것에 화를 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언젠가 지하철을 탔을 때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중년의 아저씨가 이제 막 전철을 탄 백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백발노인은 한사코 자리에 앉지 않겠다며 겸손하게 양보를 거절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중년의 아저씨는 계속해서 자리에 앉기를 권하다가 아예 자신도 서서 가겠다고 말하며 백발의 노인 옆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서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전동차는 다음 역에 도착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학생이 재빨리 두 사람을 밀치고 들어가 그 빈자리에 앉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른 척 즐겁게 이야기만 나눌 뿐이었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도 양보가 몸에 밴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그들의 믿음직한 모습을 보면 굳었던 마음도 금세 훈훈하게 풀립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화를 안고 살아갑니다. 화는 기쁨, 슬픔, 즐거움, 두려움 등과 같은 일상적인 감정들 중 현대인의 마음 속에 가장 많이 출몰합니다. 그 원인에는 타인과의 부딪힘이나 욕구에 대한 불만족, 과다한 경쟁, 잦은 스트레스 등을 먼저 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먹는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거나 절망할 때 혹은 폭력 적인 성향으로 번할 때 우리의 몸은 먹는 음식과 밀접한 관계 있습니다. 분노와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먼저 식사와 소비의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사는 문명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가 음식물을 재배하는 방식 우리가 먹는 음식의 종류 그리고 그것을 먹는 방식이 문명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평화를 가져 올 수도 있고 고통을 몰아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에게 화를 일으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음식에 화가 들어 있는 경우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광우병에 걸리 소의 고기를 먹을 때 그 고기에는 화가 들어 있습니다. 계란이나 닭고기에도 엄청난 양의 화가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화를 먹는 셈이며 따라서 그것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그 화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음식을 잘 살펴서 먹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요즘에는 닭이 최신 시설을 갖춘 대규모 농장에서 사육됩니다. 닭이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흙 속에서 먹이를 찾아 먹지도 못하고 순전히 사람이 주는 모이만을 먹고 자랍니다.

늘 비좁은 우리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전혀 움직일 수도 없고 밤이나 낮이나 늘 서 있어야 합니다. 걷거나 뛸 자유가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낮 없이 한곳에서 꼼짝도 못하고 지내야 하는 상태를 상상해봅시다. 틀림없이 미쳐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는 닭들도 당연히 미쳐 버립니다.

닭이 알을 더 많이 낳게 하기 위해서 농부는 인공적으로 밤과 낮을 만들어 냅니다. 즉 조명등을 이용해서 낮과 밤을 짧게 만들면 닭은 그새 24시간이 지난 것으로 믿고 또다시 알을 났습니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이 결국 엄청난 화와 좌절과 고통을 안게 됩니다. 닭은 그 화와 좌절과 고통을 다른 닭을 공격함으로써 표현합니다. 닭들은 부리로 서로를 쫍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며 죽는 닭이 허다합니다. 극심한 좌절에 빠진 닭이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농부는 닭의 부리를 잘라 버립니다. 이와 같은 닭이 낳은 계란을 먹을 때 우리는 그 화와 좌절을 먹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화를 먹으면 우리가 분노하게 되고 그 화를 표현하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닭이 낳은 행복한 계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가 난 암소에게서 짠 우유를 마셔서는 안됩니다. 순리대로 자란 암소에게서 짠 유기 우유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농부들이 가축을 더 자연스런 방식으로 기르는 데 도움을 주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유기적으로 길러진 채소를 먹어야 합니다. 값이 더 비싸지만 적게 먹으면 됩니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서도 화를 우리 몸에 받아 드립니다.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행태도 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소비의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잡지에서 읽는 것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 또한 독성을 품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도 화와 좌절을 내포하고 있으며 영화는 비프스테이크와도 같습니다. 거기에 화가 함유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우리는 곧 화와 좌절을 먹는 셈이 됩니다. 신문기사나 타인들과의 대화 같은 데도 많은 화가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더러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한 시간쯤 얘기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이 품고 있는 엄청난 양의 독성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엄청난 양의 화가 우리 몸에 흡수되고 나중에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게 됩니다. 우리가 모든 형태의 소비를 자각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방송에서 뉴스를 들을 때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어떤 문제를 놓고 타인들과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마치 생각도 없이 아무 음식이나 먹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는지 늘 유의해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인 시편 39장은 인생이란 짧고 헛된 것으로서 세상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현명한 삶의 자세를 찾는 것을 강조한 점이 본문의 내용이며 삶의 지혜는 창조자의 뜻을 따라 창조의 질서 회복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세상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악인이 자기 앞에 있을 때는 입에 자갈을 먹여 침묵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안전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언어 생활을 조심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화와 파괴와 살인 등의 악한 요소들이 발생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약 3:6). 본문은 말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 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입니다.

침묵을 지키며 고뇌하던 다윗은 자신의 폭발하는 감정을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 붓지 않고 살아 계신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느끼고 고민하는 바를 하나님께 호소하며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앞에서 말못할 일마저도 하나님께 아뢰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회개하므로 그 해결책을 찾습니다. 다윗은 짧은 삶을 살다가 인간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면서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임을 알고 인간의 모든 행위가 헛된 것이며, 결국에 가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인간의 이 노력은 허무함을 깨달으며 철저하게 회개하므로 화를 다스리자고 말씀의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을 알고 사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 안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그 삶의 자세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항상 얼굴을 찌푸립니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마음 한가득 퍼집니다. 잔뜩 화가 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의 말은 아주 신랄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가 쏟아 내는 악담은 듣는 이를 거북하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가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마음 한 가득 독이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면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그의 공격적인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화란 우리 마음 속의 일이므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도 우리 마음 속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났을 때는 무엇보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는 날 감자와 같은 것입니다. 감자를 날 것 그대로 먹을 수는 없습니다. 감자를 먹기 위해서는 냄비에 넣고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화가 났다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괴로워 하지말고 일단 마음을 추수려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화를 다스릴 때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잃어버린 사건, 행복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쁨, 사랑, 기도는 긍정적인 씨앗이며 반면에 짜증, 우울, 절망 같은 부정적인 씨앗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평화의 길이며 행복을 만드는 법칙입니다.

예수께서는 재앙을 미리 면하기 위해 "화를 다스리기 위해", "화 있을진저"하는 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증거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21절에 "화가 있을 진저, 고라신아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한 말이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임을 깨닫게 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비결"은 회개하는 마음임을 더욱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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