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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자녀로 양육하는 비결 / 시 127:3,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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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7:3,엡6:4
하나님 자녀로 양육하는 비결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오늘 주일은 어린이주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거나 하면 대개 부모들은 선물로 아이들 환심을 사는 것으로 부모들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각종 선물가게에는 선물을 사는 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이제는 아이들 선물 수준을 보면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목이 고급들입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을 보니까 받고 싶은 선물이 디지털 카메라,핸드폰,애완용 강아지등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양육이 이런 일년에 한번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교육은 한두번의 선물사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세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요즈음 가장 고민 중의 하나가 어떻게해야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고 교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연구하였고 또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한 입장으로서 교육이론 상담이론은 잘 압니다. 그러나 가정이란 현실 속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에는 이것이 이론처럼 쉬운 것이 아니더라는 현실입니다.

종종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과 교회 직분자들의 가정의 자녀들이 탈선되는 현실들을 보게 됩니다.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같은 세상의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범죄자가 되어서 감옥에 가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결같이 말하기를 가장 어려운 농사가 자식농사라고 합니다.
저도 이것을 실감하는 것이 세아이를 키우면서 모범답안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우리들의 아이가 부모들의 열심과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 하고 싶은 대로 맡겨둘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많은 자녀를 준 아버지였습니다. 가정의 아버지로서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가정의 주인도 하나님이요 자녀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정을 내 힘과 노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들의 노력과 어떤 교육과 돈만 있으면 잘 양육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가장 지혜자였던 솔로몬이 가정과 자녀의 의미를 받아들일때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한계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상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업이란 말은 가정 현대적인 용어로 “숙제”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번역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여호와의 주신 숙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자녀는 부모에게 숙제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부담이 자녀입니다. 부모로서 성장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까? 그러나 반대로 얼마나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기 시편127편 3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엡6장 4절에서는 자녀들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부모들에게 “아비들아” 하면서 말씀하십니다.여기 자녀는 나의 자녀가 아니고 부모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자녀를 위탁하여 주셨습니다.

이땅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대리부모입니다. 대리부모인 우리들에게 맡겨주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양육하라고 책임을 부여하였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자녀로 잘 양육할 수 있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기 위하여 부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해야 할 2가지 비결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여기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쓰여진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양육에 있어서 불완전성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된다고 해서 자녀 양육에 저절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속의 죄성이 우리의 자녀양육에도 영향을 미치고 문제점을 낳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함부로 내맘대로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왜 부모들이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고 상처를 쉽게 주는 것일까요? 목사인 저도 자녀를 양육할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양육하니까 나의 소유로 생각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자꾸 나의 자녀로 양육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인정하셔야 할 것이 자녀는 우리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낳았고 내가 투자하였으니까 ‘죽이든지 살리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저의 어린시절 저는 개인적으로 부모들 때문에 상처가 되고 그래서 알게 모르게 마음에 분노가 쌓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우에 어린 시절 가장 어른들에 대한 불만은 어른들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본이 되지 못한 삶이 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른들의 권위적인 언어,부모들의 획일적인 언어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일장 훈계조로 “이렇게 해라,저렇게 해라”명령하고 지시하고 간섭합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명령합니다.그래서 저의 감정이 굉장히 상한 적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자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어른들의 끊임없는 잔소리,훈계,설교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부모들은 잔소리를 하고 참견을 하는 것일까요? 사실 부모들에게 좋은 자녀교육의 모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의 눈높이에서 자녀들을 맞추어가려고 합니다.그리고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들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성공심리가 포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부모들이 가장 범하는 잘못은 자녀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들고 아이들을 특기교육을 위해 예능중심의 학원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자녀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 언제든지 하기 싫다면 끊어줄테니까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녀석에게 가끔 질문을 합니다. “하기 싫냐? 피곤하면 그만두라”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 하나도 그만둔다는 아이가 없습니다. 기를 쓰고 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강제로 하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잔소리하면서 강제로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각자 주신 달란트가 있고 능력이 있는대로 해야 합니다.

어린이들도 하나님 앞에 귀한 영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된 입장에서 우리가 사소하게 여길 수 있고 무시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앞에 어린이들이 나오는 것을 금지하면서 무시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이들을 어른과 같이 인격적으로 인정하여주고 그들을 높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잘 대해주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부모들은 자식을 주의 교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엡6:4“오직 주의 교양과”
여기 교양이란 자녀양육에 있어서 예방에 해당되는 양육입니다. 의학 중에 우리 건강을 유지하려면 예방과 치유라는 두개의 방편을 사용합니다. 교양이란 ‘일정한 지침을 가지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어떤 가이드 라인이나 규칙을 가지고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분명한 규범을 주셨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어릴때부터 이 규범서인 성경에 기준하여 양육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릴때부터 반복하여 성경으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신명기6:6-7“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말씀을 가지고 강론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집에 있어도 길에 있어도 누워있어도 일어나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항상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자녀들에게 교양으로 가르칠때 몇가지 원칙적인 지침들이 있습니다.
첫째 먼저 부모들의 삶이 자녀교양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하여 보십시오.이렇게 항상 반복하여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부모믿음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먼저 주의 교양으로 본을 보이며 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우리 부모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주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제일 겁나는 것이 우리 아이들입니다. 아직 꾀가 없는 막내는 저를 당혹하게 하는 말을 종종 하곤 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 중에 생활교육을 많이 강조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방은 자기가 치우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덮던 이불은 자기가 개고 자기 방은 자기가 청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경고하다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야단치고 엎드려 뻩치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매를 들어서 엉덩이를 때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이불을 개지 않은 것을 보고 ‘아빠도 이불 개지 않았잖아요“라고 합니다. ”밥 남기지 말라“고 해놓고 제가 남기면 ”아빠도 남겼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순간 제 자신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구약 성경 창12장과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창 26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와 결점이 아들이었던 이삭의 생애 속에 반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가끔 자녀들에게 ‘누가 제일 존경스러우냐’라고 질문할 때 종종 ‘우리 아버지요’ ‘우리 어머니요’라고 하는 대답을 들을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부모야말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장 비참한 부모가 누구일까요? ‘우리 부모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부모가 되도록 교양하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자녀가 어렸을적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남을 가르치고 남을 섬겨도 자녀들이 예수믿지 않으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가정인데 부모님이 교회의 중직자인데 예수님믿지 않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납니까? 평소에 충분히 자녀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충분한 인격적인 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렷을적부터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지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이 청소년시기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러운 것중에 하나가 어렷을적부터 부모님들로부터 신앙으로 잘 양육받고 믿음으로 잘 자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렸을적부터 영적인 좋은 습관을 갖는다면 우리 인생에서 믿음 생활에서 아주 긍정적인 역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간증을 들어보면 예수님믿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 부모님들이 아니고 나중에 커서 수련회에서 부흥회에서 만났다고 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고백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 가슴아픈 것은 아예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오늘 집으로 돌아가시면 아이들과 앉아서 진지하게 영적인 문제를 갖고 한번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부모들의 영적인 관심만큼 우리 자녀들의 영적건강이 결정되고 주의 교양으로 무장되게 됩니다.


셋째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도록 교양해야 합니다.

종종 믿음의 자녀들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경제논리와 세상의 성공논리에 따라서 행동하고 따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종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하나는 직장 선택할 때와 다음 결혼할때입니다. 믿음에 덕이 되지 않고 반대가 되는 직장일지라도 돈만 많이 주면 따라갑니다. 배우자가 믿음이 없어도 조건만 좋으면 그냥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자녀들을 무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만일 믿음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런 가치관의 선택이 나타날경우에 대부분 그 문제는 자녀들보다 부모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교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로로 대통령까지 되신 어른이 기독교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권력을 남용하여 비리에 깊이 개입되어서 구속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대통령이 되신 장로님은 그 아들이 구속되면서 국민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깊이 사과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저를 더욱 괴롭고 민망하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제 자식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탄식의 발표를 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 자녀인데도 돈이 되는 일, 출세하는 일,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일이라면 미련없이 따라가는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손해가 되고 고생이 되고 어려워도 성경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먼저 지식보다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하나님을 가르치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부모들은 자식을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엡6:4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이 예방에 해당된다면 훈계는 치유에 해당합니다. 자녀양육에 있어서 예방적인 차원의 훈계도 중요하지만 치유적인 차원의 훈계도 중요합니다. 만일 교양은 있는데 훈계가 없으면 버릇없는 아이가 됩니다. 그러나 교양은 없고 훈계만 있으면 상처받은 아이로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의 분명한 잘못을 그냥 넘어가고 교정하지 않을 경우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잇습니다. 사무엘상 2장 27절-3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이 자기 자녀의 그릇된 행동을 교정하지 않고 방치하여 둔 것을 심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전임목회자입니다. 제사장으로 남을 지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는 잘 드리는데 자기 자녀들을 훈계하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교양으로 양육도 해야하지만 훈계도 해야 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 솔로몬은 잠29:15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훈계가 지혜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29:17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합니다. 징계가 부모를 평안을 가져다주고 기쁨을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왜 성경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징계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들도 그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죄성을 드러냅니다. 어릴적부터 죄악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잘 다듬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세대 부모들은 자녀들을 한명 두명만 낳아서 기르기 때문에 너무 아이들이 귀한 나머지 징계하고 매를 대지 않고 키우려고 합니다. 가끔 식당에서나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아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여도 그냥 허용합니다. 그래서 예의범절도 모르고 버릇없는 아이로 키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세살버릇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분명한 기준들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벌써 10살이 넘어가면 익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 기를 꺽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냥 허용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우리 아이들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죤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19명의 자녀들을 한결같이 잘 키워서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교육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수잔나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머리가 크기 전에 좀더 정확히는 다섯 살이 넘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꺽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어떻게 징계하고 교정하여야 할까요? 사실 이것이 말은 쉬워도 행동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이를 양육적 차원에서 교정하기 위해서 몇가지의 지침들이 필요합니다.

첫째 훈계에 대해서 부모가 서로 합의해야 합니다.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 부모가 서로 뜻이 같아야 합니다. 교육이 잘되는 집을 보면 엄마와 아빠가 분명히 서로 합의한 가운데 일관성있게 잘 됩니다. 그러나 잘되는 가정을 보면 엄마가 야단치면 아빠가 “당신은 왜 애들 갖고 매일 야단만 치느냐”“ 아이들이 다 그런거지 뭐 괜찮아”하면서 넘어가려고 합니다. 때로는 아이문제로 서로 부부싸움도 합니다.

한쪽이 징계할 경우에 한쪽은 슬쩍 비켜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야단하면 아빠가 자리를 피해주고 반대로 아빠가 야단하면 엄마가 피해주어야 합니다. 저도 어렷을 적 징계를 받을때에 가장 안좋았던 것은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엇습니다. 혼나고 있는데 옆에서 “저런 녀석은 맞아도 싸"하면서 말을 하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다음은 징계하기 전 후에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어떤 징계를 할 경우에 왜 혼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고 나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햇는지 스스로가 깨닫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징계를 하고 나서 무엇을 잘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반성문을 써갖고 오도록 합니다. 물론 그것이 강제로 시행되는 것이지만 자기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교정을 할 경우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 잘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몰아서 교정을 하면 교육적 효과가 떨어집니다. 전도서8:11“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감정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아이들이 상처가 됩니다. 부모들이 일관성있는 가치관을 갖고 아이들을 잘 다스려 줄 때 아이들은 부모를 신뢰하고 가르침을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들이 애정과 관심을 갖고 징계하여도 우리 자녀들은 고치지 않을 수 있고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가지 행동이 몸에 배기까지는 무한한 인내가 요구되는 것을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방 이불을 개는 한가지 행동이 쉽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죤웨슬리 가정의 일화입니다. 그 어머니 수잔나가 똑같은 일에 같은 소리로 무려 자녀들에게 20번이나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기가 막혀서 “여보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20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잔나가 “여보 만약 제가 19번만 하고 중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엇을까요” 이런 인내 참을성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면서 양육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는 부모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키워갈 때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자라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를 잘 양육할 때 그 자녀들이 교회와 국가에 크게 쓰임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기둥같은 재목들로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 요셉과 다니엘과 드로라 에스더와 같은 자녀들이 많이 생산되어지는 축복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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