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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 / 요한1서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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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금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 
본문 : 요한1서 3:1~7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는 무척 간단하다. 아주 단순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한복음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지만, 신약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다.

바울도 복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강조해서 말씀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조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의 말씀에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6이하)

인종에 상관없이, 연령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이것이 곧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영원히 살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 세상 사는 동안 필요한 은혜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목이 아파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분이 있었다. 목 수술을 하고 자기의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몇 달을 고생했다. 그러다가 자기의 목소리를 찾는 수술을 하고 몇일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에 부부가 찾아와서 남편이 말하기를 “목사님 저희 집사람 목소리 개통식하러 왔습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처음의 목소리를 하나님께 들려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목사를 찾아온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무슨 말을 처음 하도록 부탁할까하고 생각하다가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시켰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함께 감격의 시간을 가졌다. 그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때에 돌아가셔서 집사님의 기억에는 아버지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교회에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아버지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어색해서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목소리를 잃고, 회복되면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눈물로 고백하게 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시간을 함께 가졌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완전히 성장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어린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왔다.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쫓아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꾸중하시면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금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이다.”

에릭 번(Eric Bern)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성격 기능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어버이 기능으로, 권위적이고 양육적인 기능이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기능이다. 두 번째는 어른 기능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기능이다. 세 번째는 어린이 기능으로, 인간에게 순수성과 생동감을 주고 인간 본연의 맛을 나게 하는 기능이다. 이 중에서 특히 어린이 기능은 울고 웃고 하는 놀이의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소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캔터키 주립병원에는 6명의 목사가 정신이상자로 입원해 있었다. 그들의 병명은 '어린이 상실증'이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다가 어느 날 돌아버리는 병이다. 어린이 기능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온전한 인간성을 상실하여 버린 것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이들처럼 어린이 기능, 즉 마음속에 살아서 뛰어 놀아야 할 어린이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삭막해지고 메말라 간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아버지의 기능, 어른의 기능은 잘 감당하고 있지만 어린이의 기능이 마비되면 온전한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어린 자녀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면, 어린 자녀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스스로 설 수 없고, 스스로 할 수 없기에 반드시 의지하는 것이 어린이의 특징이다. 수영장에서 들어가서 물놀이를 한다. 어린이가 깊은 곳에 갈 수 없다. 그러나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가면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험란한 파도가 치는 인생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을 때에 우리는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

미국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에 조카가 3살이었다. 갑자기 정전이 되니까 아이가 얼마나 놀랬겠는가? 중혁이가 “큰 아빠 날 좀 잡아줘요”라고 이야기 한다. 아이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불이 나가 캄캄해 졌지만 아이에게 불안은 사라졌다. 아무런 염려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이 모두 캄캄해 지고 어디에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임을 고백할 때에 우리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한 소년이 깊은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퍼붇는 바람에 집 앞에 있는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아버렸다. 소년은 혼자서 그 나무를 치워보려고 기를 썼지만 소년이 힘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나무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와서 물었다.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해 보았니?“ "예, 아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해보았는데도 이 나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아니다, 네가 이직도 하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단다. 그게 무엇인지 알겠니?" "잘 모르겠는데요?" "너는 이 아빠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당신은 정말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까?

어린 자녀는 반드시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에게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자. 아들과 함께 목욕탕을 갈 때면 느끼는 것이 많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목이 마르다. 자기의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냉장고에서 마음껏 꺼내 먹는다. 음료수를 먹고, 찐계란도 마음 껏 먹는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빠 앞이니까 저렇게 하지? 그러면 내가 돈을 꺼내 놓고 계산해 준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이같이 하나님의 어린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 또한 어린 자녀의 특징이 있다.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어린이의 뇌는 완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라고 한다. 12살 이전까지 외국어에 관계된 뇌신경이 발달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12살 이전에는 얼마든지 여러 나라의 말을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30대, 40대가 되어 외국어를 배우려면 잘 되지 않는다. 왜냐면 외국어에 관계된 뇌신경이 이미 퇴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참으로 어려워진다. 어린이에게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어느 유치원 차에 “이 차에 장래의 대통령이 타고 계십니다”라고 쓰여있고, 어느 음악학원 차에는 “이 차에는 장래의 모차르트가 타고 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어린이에게는 열려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어린 자녀라고 하는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은 “이 나이에 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 가능성이 있다.

모세를 보라. 모세가 120세를 살았는데 그는 40년 동안 왕궁에서, 40년 동안 살인자 도망자로서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다. 그는 그렇게 그의 인생이 마무리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을 맡기셨다. 출애굽의 사명을 주셨다. 80세면 인생을 정리해야할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 앞에선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은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늘 하나님 앞에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기능도 필요하고, 어른의 기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의 기능을 잃어버리면 않된다. 어린이에게는 가능성이 있듯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먹지 못해 아이가 굶어죽었다. 이 불쌍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에 남루한 옷을 입고 충혈된 눈으로 찾아온 한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틈을 타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벗겼고 그걸 팔아 술을 마신 그 사람은 바로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20년후 시카고 제일 장로교회에서는 수 천명의 성도들 앞에서 한 사람이 외치고 있었다. "죽은 딸의 장례식에서 신발을 훔쳤던 파렴치범은 바로 저였습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은 나를 다시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을 삼아 주신 분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바로 시카고의 부흥사 엘 트라더 목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볼 때 폐품 같고 불량품 같지만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속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오래 전에 TV에서 방영한 프로그램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출연자가 골동품을 가지고 나와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면 전문가는 의뢰품을 감정하여 그것의 가격으로 얼마의 가치가 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골동품을 감정 의뢰하기 위해 출연한 약 20세 후반의 남자가 흰색으로 된 주둥이가 넓은 투박한 항아리를 갖고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별로 귀중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항아리였다. 사회자가 출연자에게 감정을 요청한 항아리 가격을 얼마로 예상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 청년은 약간의 장난 끼가 섞인 표정과 함께 "약 5,000만원"이라고 답하자 출연한 사람들이 놀랬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와 가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감정 가격은 현시가로 최소 1억2천만 원이라고 했다. 그것은 약 300년 된 '백자호'라고 하는 '항아리'로서 백자 항아리 가운데 높게 평가하는 '달 항아리'라고 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감정 평가도 평가이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출연자로부터 들은 지금까지의 항아리의 사용 용도이다. 그것은 사촌친척이 지금까지 그렇게 귀중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사용 할 만한 용도가 없었기에 가장 적합한 용도를 궁리하다가 결국 생각해 낸 것이 새우젓을 담아서 먹는 새우젓 통으로 사용했다 한다. 모두가 아연실색을 하였다. 그냥 그대로 새우젓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면 그러게 되고 만다. 그러나 그 항아리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된다.

계속해서 이렇게 가치있는 삶을 살려면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는 훈련을 해야 한다. 미가엘 성가대에서 수고하는 어느 집사님이 피스를 넣기 위해서 클리어 파일을 정리하는데 이 모습을 6학년 딸이 보았다. 엄마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우리 갈릴리 성가대도 그렇게 하면 아주 예쁘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지금 모은 돈이 십만원있는데 그 돈으로 우리 갈릴리 성가대 피스사용할 수 있도록 내가 할까? 하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얼마나 예쁜 마음인가? 어린이는 끊임없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도 끊임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자. 어린이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 처럼,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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