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울의 기도 / 엡 3:14-21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제 목 바울의 기도 (엡 3:14-21)

한 무명성도의 헌금으로 지난해 기도원을 구입하고 지난 주 토요일에는 기도원 오픈 하우스 감사예배를 드렸다. 기도원을 통해 앞으로 좀더 기도하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기를 바란다. 모든 영적 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은 기도운동에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화요일에는 몇 분이 국무성에 가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정부가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부탁과 그 동안 서명한 것을 전달하였다. 지난 해 9월에 파월 장관을 만나서 이산가족 상봉을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한 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번에는 아세아 담당 차관보 케리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국무성 한국 데스크에 젊은 한국 여성외교관이 일하고 있어서 반갑게 만났다. 그 아버지가 오렌지카운티 한인교회 정재훈장로님이신데 저희가 국무성을 방문한다니까 아버지께 전화해서 어떤 분들인가 물어 보았다고 해요, 아버지가 훌륭한 분들이니까 잘 맞이하라고 해서 아주 친절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있어서 국무성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 국회 하원을 잠깐 방청했다. 앞 의장석 옆 벽에는 In God We Trust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고 원목이 제일 먼저 나와서 기도하므로 회의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미국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로 시작된 나라이다.

기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기도는 흔히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육신이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은 기도를 떠나 생존해 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도는 어떤 어려움에도 대비케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안전 벨트이다. 여러분 안전벨트가 보통 때는 별로 필요없는 것처럼 느끼고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사고가 나면 그것이 생명을 보호해 주고 구해주는 것이다. 기도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보통 때는 기도가 시간을 빼앗는 것 같고 우리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되지만 문제가 생길 때는 그것을 막아주고 우리를 구원해 주는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과 영적 사귐이며 대화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나의 말과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지만 또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이 쌍방통행(two way communication)인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공급받게 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며 보다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나가게 된다.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처럼 불쌍한 성도가 없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가 있고 또한 내가 기도할 대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으로 가장 큰 축복의 하나이다.

6.25동란 때 미국사병으로 근무하던 Henry Swain의 간증 중에 이런 감명 깊은 이야기가 있다. 1953년 미군이 중공군과 38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미군 16명이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돌격작전을 벌리게 되었다. Henry Swain은 그 중의 한 명으로 진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동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

이 날도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 달려 기도했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기도의 반려자인 부인의 마음속에 기도의 무거운 짐을 느끼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했다. 사실 전쟁터에서 드리는 기도만큼 급박하고 절실한 기도가 별로 없는 것이다. 새벽 4시 45분 그들에게 신호가 주어지자 16명의 군인들이 상대방 고지를 향해 진격해 갔다. 총탄이 사방에서 날아왔지만 그들의 생명은 무사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중공군이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들이 쳐 놓았던 철조망이 막혀 있어 앞으로 진격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때 중공군들은 미군을 향해 미제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류탄이 얼마 있어야 터지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은 그 수류탄을 다시 상대방에게 던져 공박했다. 이렇게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이번에는 특수 다이너마이트가 부착된 폭탄이 날아와 가까이 에서 터지는 바람에 미군사병들은 다 죽는 줄 알았다. 몸들이 하늘로 몇 피트나 떴다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모두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앞에 가로 놓였던 바리케이드가 크게 구멍이 나서 그들은 고지를 향해 진전해 갈 수 있었고 마침내 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그들이 중공군에 포위된 것을 발견했다. 중공군들이 차차 그 포위망을 좁혀 왔다. 미군들은 탄약이 다 떨어졌다. 이젠 영락없이 다 죽었구나 생각하니 하나님께 더욱 매달려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두 개의 조명탄이 하늘에서 폭발했으며 중공군들이 황급히 언덕으로 후퇴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스코트란 미군사병이 탄약이 떨어져 주변에 있는 탄약을 주어서 쓰려고 찾다가 한 중공군 장교가 죽어 있는 옆에 이상한 두 개의 총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군을 향해 발사했다. 그런데 그것은 중공군 지휘관만이 가지고 있는 중공군들이 후퇴신호로 사용하는 조명탄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열흘 후에 Henry Swain의 부인께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잠을 자는데 갑자기 무거운 짐이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잠에서 깨어나 남편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약 4시간동안 기도했을 때 그 무거운 짐이 벗겨졌다. 나중에 그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그 때가 한참 사역을 헤매면서 치열한 전투에 임했을 때고 전쟁터에서 매어 달려 기도를 드린 때였다.

이것을 안 믿는 사람들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분명히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었고 성령의 역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도의 응답과 능력의 체험한 크리스천들은 기도를 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게 된다. 출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과 심판을 돌이키셨다고 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기도의 팩임은 가장 귀하고 중요한 사명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가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는 더욱 귀하고 값진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린 아름다운 중보의 기도를 읽을 수 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비노니"하는 말로 그의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기도의 자세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다음 몇 가지 기도의 자세를 취했다.

① 서서 기도하는 자세이다. (삼상 1:26, 왕상 8:14) 이것은 보통기도의 자세이다.

② 서서 손을 펴 들고 드리는 기도의 자세가 있었다. (왕상 8:22, 시 28:2, 출 17:11) 이것을 축복의 기도이다.

③ 엎드려 드리는 기도의 자세이다. (스 10:1, 눅 18:11) 이것은 자복과 회개의 기도이다.

④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의 자세였다. (행 7:60) 이것은 간절한 기도의 자세이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했다. 그 때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그냥 앉아 있을 순 없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옛날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도 이스라엘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했다. (대하 6:13) 이런 것들은 모두 간절한 애원의 기도를 뜻한다. 그럼 바울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무엇?

첫째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해 기도했다.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얼마 전에 한국에 사는 제 처제가 큰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제 아내가 나가서 두 주일간 간호를 해 주었다. 저는 병원에 심방갈 때마다 건강하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새삼 깨닫고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심령의 건강이요 속 사람의 건강이다. 육신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속 사람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건강을 위해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속 사람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내적 삶의 강건을 위해 힘쓴다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인간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다. 하나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겉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생각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속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개의 자아가 안에서 항상 싸우며 그럴 때마다 육신의 자아에 의해 패배 당하는 아픔을 경험한다고 토로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악만을 행하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 7:19, 24)

우리의 몸에 병이 생기면 입맛이 없어지게 된다. 기쁨이 사라지고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우리의 심령이 병들 때 그것은 더욱 더 심각한 것이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진다. 마음의 기쁨과 평화가 사라진다. 건강해야 세상과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켜 갈 수 있는 영적 힘이 있는 것이다.

저는 최근 우리 한국사회나 이민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 사람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염려를 하게 된다. 몇 년전 어느 신문 칼럼에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는 글이 실렸다.

'3대 허무주의가 우리 주변을 감싼다. 정치의 허무, 경제의 허무, 도덕의 허무가 그것이다.. 부실의 모래성이 무너져 내려앉는 거리엔 비리의 모래알만 흐트러져 있다.'

우리의 정신적 질환을 정확하게 진단 내린 진단서라고 하겠다. 최근 한국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 풍토, 각종 비리사건들, 폭력들 그리고 사회적 혼란은 한국사회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중병에 걸려 있음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하겠다.

언젠가 한국에서 온 어떤 분과 만나 이야기하는 중에 운전시험을 치는 시험관이 몇 십만 원씩 받고 면허증을 해 주다가 어떤 사람이 빨리 안 해 준다고 고발해서 들통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자기의 생명 뿐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죽일 수 있는 그런 책임이 따르는 운전면허증을 함부로 남발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무서운 짓인가?

한국에서 30-40대 중에 교통사고로 제일 많이 사망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고 면허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너무나 팽배해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정신적 존재요. 양심적 존재란 데 있다. 우리는 짐승이 죄를 짓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될 수 있는 것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양심의 고통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 수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와 회개를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이 회복되는 것이다. 건강해 지는 것이다. 존 칼뱅은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더 자랄 여지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인간은 다만 회개와 참회를 통해 온전을 향해 걸어 갈 뿐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통해 건강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이다. 속 사람의 강건은 내 노력과 결단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기"를 위해 기도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이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시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속 사람이 강건하기를 위해서도 주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셔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내 마음에 거하게 하는 비결은 믿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온전히 주장해 달라는 기도이다. 내 생각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세상에 가장 큰 축복의 하나가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함께 계심이다" 노래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이루리라 했다.

저는 세 종료의 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이다. 사람을 의식하면 형식주의자가 되고 위선적이 된다.

2) 자기 앞에서 살아가는 교인이다. 자기를 의지하는 교인은 교만해지거나 열등의식에 빠진다. 더 솔직히 말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만한 존재가 못되는 것이다. 한치 앞길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나 자신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3)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교인이다. In the sight of God or In the presence of God의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진실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다. 남편과 아내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아니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는 세상에 겁날 것이 없다. 외롭지 않다.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주님께서 주시는 내면적인 기쁨과 평화가 넘친다. 그래서 Henry Lyten은 이렇게 읊었다.

'덧없는 세상 나 잠시 더 보기 원치 않네

주여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사시듯

친밀 겸손 인내 자유의 주님

오셔서 오래 오래 나와 함께 하소서'

한 아들이 아버지께 찾아와서 무엇인가 요구를 할 듯했다. 아버지는 귀찮은 듯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현명한 대답인가. 아버지를 차지하면 그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 천국이 다른 곳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시고 주님이 온전히 지배하는 곳에 천국은 이뤄진다. 그래서 Carroll은 이렇게 읊었다.

'내 머리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만 생각하도록

내 입술에 주의 이를 새기소서. 평생 주님 위해 외치도록

내 발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님 위해 주님과 함께 걷도록

내 손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님 의해 일하도록

내 귀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님의 음성 듣도록

내 어깨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님 위해 십자가 지도록

내 눈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평생 주님만 바라보도록

내 몸 전체에 주의 이름 새기소서. 언제 어디서나 나는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도록'

셋째로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하였다. 특별히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달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이다. 사랑은 모든 인간의 육체적 영적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다. 어떤 의료팀이 암세포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침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의 침에 넣어 보았더니 사랑하는 사람의 침에서는 암세포가 증식을 못하고 곧 죽고, 미워하는 사람의 침에서는 증식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칼뱅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서 자기 힘으로 선이나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다.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결국 미움으로 끝난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만을 행하노라 고백했다.

이러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새 삶이 시작된다.

지난 1월에 세상을 떠난 크리스웰 목사는 젊어서 달라스 제일교회에 부임해서 사냥을 좋아해서 사냥하러 갔다가 사람을 소아 과실치사 하게 된다. 이일로 그는 큰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사람을 죽인 목사는 내 보내면 어디 가서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해서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서 40여 년간 목회하면서 그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을 뿐만 나이라 남침례교회 총회장을 지내는 등 많은 기여를 하게 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정말 눈물없이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통해 누구보다 주님의 뜨거운 사람을 늘 깨닫고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미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삐뚤어 보이고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매어 달려 사는 자에겐 언제나 궁극적 승리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새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폭풍이 불어오는 엄동설한도 따뜻한 봄 동산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곳엔 따뜻한 봄 동산도 오히려 쌀쌀한 엄동설한으로 바뀐다. 요셉은 형제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도 사랑으로 해로움도 선으로 바꿔지는 새 역사가 일어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에베소 교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꽃을 펴 주고 열매맺기를 기도했다. 일본 동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Stone선교사의 기념관이 있다. 한 기선이 침몰하게 되었다. 거기 탔던 수 백명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도 구명대를 갖고 다에 뛰어 내렸다. 그런데 몇 사람이 구명대를 얻지 못했다. 구명대가 부족했다. Stone선교사는 한 아기를 가진 젊은 여인이 구명대를 얻지 못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버둥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하나도 자기의 구명대를 줄 사람은 없었다.

그 때 Stone선교사는 마음의 갈등이 생긴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자기는 홀몸이지만 저 여인은 아기를 가졌고 남편이 있는 몸인데 살아야지. 그래서 자기의 구명대를 주고 희생당하게 된다. 그 후 보험회사에서 돈이 나와서 그 돈으로 그 Stone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관을 짓고 거기서 계속해서 농어촌 교역자를 위한 계속 교육과 그들 자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러면서 마음을 찢는 아픈 사랑의 이야기인가?

언제인가 신문에 보니까 김기두씨에 관한 이야기가 조그맣게 실렸다. 그는 26세 때 원산에서 단신 월남해서 지금은 조그만 건축회사를 경영하는 분인데 한 달에 수입 170만원을 쪼개어 불우한 이웃돕기에 힘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는 이름 있는 정치가나 실업가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해 가는 무명의 사랑의 봉사자에 의해 밝아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굴러가며 떠 받쳐 있다는 것을 발견케 된다.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를 이러한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