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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인 어린이들 / 마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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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배인 어린이들 ♥
마 18:1-7, 2003,05.04.

할렐루야!!
5월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날은 어느 한 날로 부족하다고 하여서 5월 한 달 동안을 가정의 달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늘찬양교회에서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5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5월 11일은 '어버이 주일'로 5월 18일은 '부부 주일'로 5월 21일은 '부부의 날'로 그리고 5월의 마지막 주일인 5월25일에는 '공동체 주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뜨거운 참여와 기도로 5월 가정의 달 행사가 아름답게 마무리 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어린이에 관한 영적 교훈을 몇 차례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제자들은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어린이를 어떠한 자세로 바라보고 대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어린이들을 통하여 본 받고 배워야 할 영적 자세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에 주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지난번에도 요한의 어머니가 오셔서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달라고"(막10:37) 부탁하는 바람에 제자들간에 시기심이 일어나서 다투다가 크게 책망받은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다음 4가지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교훈 한 4가지 영적 교훈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교훈입니다.(3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여기에 "돌이켜"라는 말은 '돌아서는 것','다른 길로 가는 것''to turn'으로 회개(悔改)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선포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 제일 조건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참 회개인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본문이 그 해답을 던져주고 있는데 그 방법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 무죄하던 사람들이 (영적으로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순수했던 ) 어른이 되면서 사기를 치고 남을 죽이는 등 각종 죄를 짓고 살기 때문에 빨리 회개하여 어린 아이들처럼 좋은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일이란 우리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의 모습은 순수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보면 무지개를 손으로 잡고 싶고, 하늘에 떠도는 흰 구름을 보면 구름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싶고, 아빠를 보면 아빠와 같이 되고 싶고, 엄마를 보면 엄마와 같이 되고 싶고, 선생님을 보면 선생님과 같이 되고 싶어하는 소원을 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주님의 구원하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범사에 감사하며 늘 찬양하는 삶을 살았는데 지금은 여러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주님보다 세상의 일과 성공이 그리고 정욕이 눈에 보이다 보니 그전처럼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마치 요즈음 어린 아이들이 어린이의 심성에 맞는 순수함이 아니라 변질된 타락된 마음으로 친구를 때리고 왕따 시키고 심지어 죽이는 그런 일들이 빈번해지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끼리 시기하고 분냄하고 원망하며 다투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첫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만 뽐내지 말고, 전통과 역사와 교리만 자랑하지 말고 순수한 어린 아이의 심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그러면 사람이 늙으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미련한 말을 하였는데, 이 때에 거듭난다는 말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되어 주님을 좇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자기를 낮추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배우라는 것입니다.(4절)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큰 자(大者)'가 셋이 나오는데
① 동방에서 가장 큰 자 욥이 있습니다.(욥1:3)
② 세상에서 가장 큰 자 침례(세례)요한이 있습니다.(마11:11)
③ 천국에서 가장 큰 자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마18:4)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큰 자 세 사람 중에 가장 늦게 나오는 '어린 아이'가 가장 큰 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어떤 특별한 재주와 재능을 가진 특별한 어린이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욥보다 침(세)례요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비결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에 비해서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겸비합니다.
나는 차를 운행할 때마다 횡단보도나 길거리를 건너는 어린아이들이 한 손을 높이 들고 건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아이들의 겸손함과 위대함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한 손을 들고 건너갑니까? 아니면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차가 없으면 획하고 손살같이 신호등도 지키지 않고 건너갑니까? 대부분의 어른들이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건너지 않습니까? 저부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들은 지금도 한 손을 높이 치켜들고 아장아장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가 든 이 귀한 손은 경찰 아저씨가 든 손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답고 힘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겸손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모순 같은 진리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기 언급된 대로 자기를 낮추어 겸손해지면 높아지고 자기가 높고자 하여 교만을 부리면 반대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어린이, 즉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는 어린 아이들을 모방하고 따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 라면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할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낮아짐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며 순수하고 진실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교훈입니다.(5절)

예수님은 본문 5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迎接)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겸손하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어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린아이들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병원이라든가? 사회시설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는 경제권이 없고 대부분이 부모님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어린아이들을 위한 전문치과 병원이라든가 이빈후과 병원 한의원들이 속속들이 문을 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린이들이 주 고객 대상인 업종들에 한하여 변화되어진 일부분이지 전체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고 있던 당시 유대 땅에도 어린 아이들을 멸시하는 사상이 농후하였습니다. 심지어 헤롯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힘없는 어린 사내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도록 지시하였으며(마2:16), 어떤 부모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와 안수 기도를 부탁하려고 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막10:13)

뿐만 아니라 유대 풍속에 사람들의 수(數)를 셀 때에 여자와 아이들은 그 숫자에서 제외하는 어린아이 멸시사상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에서도 어린이부가 없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많은 시간을 걸쳐 투자해야 하고 또 아이들은 자주 이사하고 자주 바뀌기 때문에 당장 투자비를 거둘 수 있는 장년부에 초점을 두고 목회를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초기부터 시작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고 지금도 그 열정과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에게 놀이방과 선교원도 허락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페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가 어른이 되어서 자녀들로부터 보상을 받고 또 늘어서 의지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귀엽고 감사한 마음에 키우듯이 더 나아가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기억하고 나는 아이가 성장하기까지 잠시 아이를 맡아 양육하고 지도하는 청지기임을 기억하고 주님 섬기듯이 섬기며 자녀들과 아이들을 돌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결국 어린아이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상은 순결하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뜻이 되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는 일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임을 믿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어린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참 부모의 모습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넷째: 어린아이들을 실족(失足)케 말라는 교훈입니다.(6절)


본문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7,14절)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어린 아이를 잘못 양육하여 그 아이의 마음에 멍이 들게 하였다거나 또는 그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여 그 아이가 병신이 되거나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 죄는 용서함을 받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문제가 '자녀 폭력'과 '어린이 성폭력'문제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직장에서 강제 퇴직한 아빠들이 직장을 얻지 못하고 집에 머무르면서 그 화풀이를 아이들에게 하는 성향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아빠만이 아닙니다. 엄마들도 아빠에게 하지 못한 분풀이를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한 매질로 인하여 살이 찢겨나가서 뼈가 드러난 아이, 불로 살을 지져진 아이들, 머리를 각목이나 기타 물건으로 마저 두개골이 세 번이나 쪼개진 아이들..... 그래서 실어증에 걸려 정신 착란증으로 고통 하는 아이들, 대인관계 공포증으로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는 아이들,.... 그 뿐만 아니라 살기가 힘들다고 고아원이나 보육원 앞에 제 자식을 버리곤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너무 많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버림받고 매맞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살인보다 무서운 것이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살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에 보면 이런 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예수님이 분낸 일들이 별로 없습니다. 성전 숙청사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에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에 분을 내셨고 그리고는 별로 분을 낸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분 내셨다고 그랬습니다. 이는 어린애들을 잘못 대하여 또는 어린 생명들을 잘못 인도하여 그 어린 아이가 나쁘게 될 때 그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의 역사가 나피엘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린 소녀가 유리 조각을 주우며 우는 것을 보고 왜 그러느냐? 고 물었더니 몹시 사나운 주인집의 유리병을 잘 못하여 깨뜨려서 그런다고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나피엘 은 자기가 그 깨어진 그릇을 사 주겠다고 했지만 마침 자기에게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내일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이튿날이 마침 자기의 연구비를 도와주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 때 나피엘은 어느 쪽을 택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많은 연구비를 못 받는 한이 있어 도 그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거절을 하고 그 소녀를 만나서 깨어진 그릇을 사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폰서가 그 다음날 더 많은 연구비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정신과 어긋나게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키울 때 가 많습니다. 어느 교회 학교 어린이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추운 겨울 새벽 에 아버지가 일어나시기 전에 내복을 따뜻하게 해 드리려고 입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일어나시자 마자 "아침부터 어린것이 어른의 옷을 왜 입고 있니?"
하고 꾸짖었다고 하니 그 어린 동심 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어느 26세의 젊은이가 자신 이 열등감이란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고민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청년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올라갔더니 그의 부모는 자기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해도, 운동에 우승을 해도, 모형 비행기를 잘 만들어도 부모가 칭찬은 해주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다는 듯이 트집만 잡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 청년은 만사에 자신이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생활 할 때에 회사에서는 사장에게, 교회에서는 목사님께,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반항적이고 불평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칭찬해 주면 교만한 성격이 자리잡게 될 염려도 있기는 하지만, 부모가 말과 행동으로 잘 표현 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대단히 주요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사랑을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꼭 안아 주며, 궁둥이를 두들겨 주거나 뺨에 뽀뽀해 주거나 어깨를 툭툭 치고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이 다음에 커서서 훌륭한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어린아이를 특별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었어도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큰 자도 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땅의 참 보배이며 가정과 늘찬양교회의 보배인 우리 어린 아이들이 주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하고 지혜롭고 총명하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순수한 믿음과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소원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을 좇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내 자식이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힘써 양육하고 돌보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늘찬양교회와 이 민족이 하나님께 복 받은 민족으로 부흥 발전하는 교회와 축복된 가정으로 거듭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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