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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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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에베소서 6장 4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저가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씀 가운데 ‘농사 중에서 자식 농사가 상농사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겨졌으며 평생에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에게 있어서는 자식이야말로 기쁨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 속에 심어 주시는 본능입니다.

‘자식농사’ 잘 짓고 싶지 않는 부모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마7:11)”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공부 잘하기를 기대합니다. 신앙생활 잘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되면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 꾸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부모 앞에서 병들거나 심지어 먼저 세상을 떠나가 버리는 자녀가 있습니다. 공부하기를 싫어하여 부모의 속을 태우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삐뚤어져서 부모에게 반항을 하거나 집을 나가 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부모는 속이 새카맣게 다 타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나 자식 키우기가 더 힘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1950년-1960년대는 가정마다 자식들이 오죽 많았습니까? 그래도 부모 속썩이는 자식은 별로 없었습니다. 가족 간에는 인정이 넘쳤습니다. 먹을 것은 별로 없어도 열심히 먹었습니다. 배만 부를 수 있고, 누워서 잠 잘 수만 있으면 특별히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들은 여기 저기서 위험 신호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을 쓴 Elvin Toffler교수는 ‘파괴도리 가족’이라는 무서운 제목으로 제 11장을 시작합니다. 그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직면할 가장 큰 위기는 ‘가정의 위기’라고 전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삶의 가치 기준’이 없어집니다. 그 누구도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되면 도덕, 양심, 정의 같은 고상한 덕성은 힘을 잃게 됩니다.

그 결과 현대사회는 어떻게 변질되고 있습니까? 가정해체 현상이 가장 심각하게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게임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홈쇼핑 재미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 채팅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족의 전통적인 특징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셔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로 만들어 선물로 주신 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을 살려야 합니다. 쉬지 않고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가정을 세워 나가는 길에는 어려운 고비가 여러 번 다가올 것입니다. 특히 자녀를 양육하고 뒷바라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아픔과 논쟁과 슬픔과 절망을 요구하는 것인지를 부모 되어 보신 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말세에 마귀는 사람들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것이 자신의 의도를 성공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가정들을 공격하면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신자들의 가정까지도 공격대상으로 삼아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가정을 흔들면 신앙까지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리합니다. 그러므로 특히 우리 신자들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가정들을 튼튼히 지켜서 마귀가 넘볼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은 결국 부부와 자녀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만 성공하면 가정은 탄탄대로가 됩니다.

오늘은 자녀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다음 주일에는 부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녀는 우리의 분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입니다. 자식농사가 최고 중요한 농사입니다. 일반 농사도 그 때 그 때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하듯이 자식농사도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자.

아이든 어른이든 노엽게 해놓고서는 교육의 효과가 없습니다. 아이라고 해서 노여워할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햅니다. 어른의 위세에 눌려서 침묵하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노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상대할 때도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하면 그 효과가 훨씬 큽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어른들은 아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감정도, 기분도, 자존심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격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1) 상반되는 가치관(이중적인 가치관/ 상황윤리)을 요구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만듭니다.

* 어머니는 교회 다니는데 아버지는 교회를 나오지 않을 때, 이것은 자녀들에게 가치관에 혼란을 심어줍니다. 어머니는 주일에 교회로 향하는데 아버지는 주일에 바다로 낚시하러 향할 때 자녀들은 가치관에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서는 신앙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물론 당연히 교회로 모아야지요.(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 부모님 효도문제도 이중적인 가치관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가 쉽습니다. 아이들이라고 어리다고 모를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다 지켜봅니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엄마는 나보고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엄마 속 썩이면 엄마 오래 못 살아! 저렇게 말씀하면서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좀 더 친절하게 해드리지 않을까?’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는 것 마땅합니다만 내 자녀들에게 가치관의 갈등이나 교육상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연로하신 부모님을 잘 봉양해 드립시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을 노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 교회 봉사에서도 상반되는 가치관을 보여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보고는 ‘교회 가거라/ 주일학교 늦겠다/ 예배 빠지지 말아라.’ 이렇게 다그치면서 부모는 예사로 주일을 빠집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 가버립니다. 아니면 아버지는 주일에 교회 가는 경우보다 꼭두새벽부터 놀러 가는 경우가 더 많아 버리면 엄마가 아이들에게 교회 빠지지 말라고 강조해 본들 말의 신용이 자꾸 떨어집니다. 창원의 아무개 교회에서는 중직자인 아버지가 시험에 들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유인물까지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배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중에 나쁜 감정을 가지고 시험에 들어서 저지른 일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온 교인들로부터 원망과 불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남도 아니고 자녀들이 아버지의 비뚤어진 행위에 대하여 심하게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부모를 재촉하여 멀리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상식을 벗어나고 신앙적이지도 아니한 처신에 대하여 분노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모순된 신앙형태를 알고나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맙니다.

* 그러므로 부부가 화목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가면 이것이 아이들의 정서와 인격과 영성함양에 최고 보약이요, 자산이 됩니다. 부부사이가 불화하고 갈등이 끊이지 아니하면 아이들은 속으로 노여워합니다. 분노하게 됩니다.

* 그리고 아이들 보는 앞에서 성실과 정직과 박애의 삶을 꾸준히 지속해 가십시오. 이것이 아이들에게 아주 감동적인 자산이 되어집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부모가 바로 살지 않으면서 자녀들이 바로 서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입니다. 가치관의 혼돈 현상은 아주 많습니다.

미국교회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부친께서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아들의 설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항상 시작은 좋았으나 아들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면 조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자는 설교중 조는 교인들이 있으면 가장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는 자기 어린 아들에게 매주일 팁으로 1달러를 줄 터이니 “할아버지께서 조시면 깨워드려라.‘고 일을(?) 맡겼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예배를 잘 드리도록 깨워 드리기보다 매주일 1달러를 받는다는 재미에 손자는 할아버지를 열심히 깨워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나서 그 다음 주일, 할아버지는 여전히 목사 설교가 시작되자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목사의 어린아들이 할아버지를 깨울 생각을 않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눈으로, 얼굴로 자기 아들에게 신호를 보내어도 본척만척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너무 답답하였습니다. 겨우 예배가 끝났습니다. 목사는 너무나 답답하고 궁금해서 곧장 어린 아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왜 오늘은 깨워드리지 않았는지를 조금은 흥분하여 따져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목사의 어린 아들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빠, 할아버지께서 매주일 예배시간에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3달러를 주신다고 하셨어요‘


2.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합시다.

여기서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무엇이냐를 구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육체적 양육(보양 feed and care 먹이고 보호함)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나이와 능력을 가질 때까지 부모가 먹여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다고 해서 아직도 어리디 어린 자녀를 내팽개쳐 버리고 종적을 감추는 부모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命令을 무시하고 비웃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순종하여 저 미물의 짐승들, 동물들마저도 자기 새끼를(눈물겹도록 고생하면서도) 먹이고 보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허기에 지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손수 음식을 준비하신 일이 있습니다.(요21:12-13)


2) 가르치고 권고하고 타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로써 훈계하고 격려의 말로서 타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갈수록 ‘권고하고 격려하고 타이르는 것’이 효력을 가져옵니다. 완력으로나 강압적으로 해서는(겉으로 승복하는 척할는지 모르나) 결코 그 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수가성 여인에게와 여리고 성의 삭개오에게 이 방법을 적용하셨고 효과 만점이었습니다.


3) 징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히12:5, 참 부모와 자녀사이라면 때로 ‘징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징계는 라틴어로는 displina입니다. 이것은 ‘법칙과 규율을 서로의 합의 아래 정해 놓고, 이를 어겼을 때 징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벌을 세운다든지 매를 들 수도 있습니다. 미리 告知되어 있고, 합의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의 징계이므로 이것은(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마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제사장, 율법사, 장로)을 향하여 이 성격의 책망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율법이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위반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만과 타락과 혼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선민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독교 교인으로 양육해 나가야 하니 이야말로 전쟁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하는 치열한 전투입니다. 그래서 자녀 양육을 가리켜 ‘농사’라 하고,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도 그러합니다. 교총(교원단체 총연합회), 전교조, 교육부, 전국 학교장 협의회, 학부모회..... 모두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교회, 신자들, 주일학교 교사) 또한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가지고 자녀 양육을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눈물과 기도와 사랑과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녀들과 아이들을 기필코 잘 키워서 하나님 나라의 자랑스러운 보배들로 하나님께 바쳐 드립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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