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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녀 교육 /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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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그리스도인의 자녀 교육
성경말씀 : 마가복음 10:13-16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기 아이들을 훌륭한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 받게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같은 전통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족장들은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아들들을 불러 모으고 한 사람씩 축복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모가 축복한대로 그 자식들이 복을 받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제자들로서 선생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자꾸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예수님께서 쉬실 겨를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시고 분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말씀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고 해서 자녀들을 우리의 소유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은 내가 낳았더라도 나의 소유는 아닙니다. 자녀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장성할 때까지 부모에게 의존하고 부모의 보호 아래서 양육 받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부모의 소유는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결과, 부모가 신세를 비관해서 자살하면서 자녀들과 함께 죽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벌써 3천 4백 년 전에 부모와 자식이 독립된 인격체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죄로 심판을 받아 죽었으나 그의 아들들은 아비의 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29절로 30절에는 “29)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식을 잉태하거나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아들을 갖기 원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죽은 자와 방불한 백세나 되어 아들 이삭을 품에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자식을 잉태하지 못해서 슬퍼하던 중,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요즘도 자녀를 낳고 싶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애태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혹 그런 분이 있으시거든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함은 자녀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선물할 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좋은 것, 값진 것을 선물하기 원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면서 하찮은 것을 주실 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귀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혹 보면, 자기 자녀를 귀하게 여긴답시고 본능적인 애정을 쏟는 데만 치중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일전에 신문에 보니까 자기 자녀가 학교에서 잘못을 저질러서 선생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고 해서 ‘남의 귀한 자식을 때리다니’ 그러면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폭언을 한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식이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예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것은 어린 아이를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만들뿐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하므로 좋지 않습니다. 자식이 귀할수록 남을 배려할 줄 알도록 키우고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이라 함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키우라는 뜻입니다. 흔히, 자녀를 부모가 원하는 사람으로 키우는가 하면, 자녀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자녀들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린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면 먼저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 와야 합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먼저 믿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다섯 살 난 딸을 주일학교에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에게 “왜 어린 딸을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대답하기를 “아이가 교회 오는 것을 싫어해서요. 신앙생활을 강제로 시킬 수도 없고요. 나중에 철이 들면 교회에 나오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어린 딸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모의 책임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듯이, 오늘날도 우리는 어린 자녀들을 주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주일학교로 데리고 와서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올바로 받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젖먹이 적부터 교회에 데리고 와서 뛰놀게 하십시오. 어린 아이들이 좀 떠든다고 해서 예배드리는데 방해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성도님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나게 하십시오. 그것이 신앙교육의 첫걸음입니다. 교회 가기 싫어하거든 따끔하게 혼을 내서라도 불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하는 길입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이나 어른의 영혼이나 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어른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마음이 순진해서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평소보다 많은 어린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과자 봉지를 선물로 받기 위해서입니다. 어른들은 과자를 준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아이들은 순진하기 때문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 과자 봉지 하나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설령 그 아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떨어져 나갔더라도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십년, 이십년, 혹은 삼십년 후에 그 아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다시금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어렸을 적에 교회에 한두 번 나가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주일학교에서 아동들에게 과자를 선물로 주는 것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먼 훗날을 보고 어린 연어새끼를 바다에 방류하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어린아이의 마음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오랜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그 아이 속에서 싹이 나서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전도를 받으면 불현듯 어렸을 적에 교회에 다녔던 일이 생각나고 ‘나도 이제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귀하게 여기고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어린 시절에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줍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잘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장소가 마가의 어머니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주로 모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마가는 서너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어쩌면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결과 마가는 장성해서 사도 베드로를 보좌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자라나도록 배려하시기 바랍니다. 신앙 위주의 가풍을 만들어서 어떠한 경우에도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십시오. 혹 보면, 아이들이 무슨 자격증 시험을 보느라고 주일 예배를 빼먹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안 됩니다. 주일에 자격증 시험을 볼 수밖에 없다면 1부 예배를 드리고 시험을 보러 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올바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 지식만 소유하면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지식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성공하면 할수록 제 욕망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부모가 쓸 것 쓰지 않고 아껴서 공부를 시켰지만 제가 잘나서 성공한줄 알고 부모를 무시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잘 난 자식은 다 부모 곁을 떠나서 살고 부모 공경을 등한히 하지만 못난 자식은 야망도 없고 능력도 없다보니까 욕심 없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자녀들의 세상적인 성공에만 관심을 두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사는 자녀들로 양육하는 데 목표를 두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디모데와 마가처럼 하나님과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녀들로 키워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서 영적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고 깔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들의 가치를 인정하신 분은 달리 없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는 어느 나라와 민족을 막론하고 아이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먼저 아버지가 살펴보아서 마음에 들면 키우고 그렇지 않으면 강물에 던졌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구조사를 할 때 20세 이상 되는 남자만 계수하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수에 넣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물리친 제자들의 행동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순진함입니다. 어른들은 세파에 시달려 때가 묻어서 그 마음이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합니다. 어린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면 맑은 호수와 같이 그 마음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의 눈은 탁해서 그 마음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로 2절에 "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투데이 잉글리쉬 버전에 의하면, “갓난아이들과 같이 되고, 항상 신령한 젖을 목말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갓난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갓난아이와 같이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를 고백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숨긴다면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가식을 버리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에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본보기요 스승인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아이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겸손합니다. 그들의 눈에 아빠, 엄마는 이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보신 것은 바로 이 겸손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베드로전서 5장 5절로 6절에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겸손할 때 일개 농부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그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을 때 버림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사례를 거울삼아 늘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어린아이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부모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부모에 대한 어린아이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기차가 아주 가파른 길을 올라갑니다.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한 낭떠러지입니다. 승객들은 기차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는 유쾌한 듯 콧노래를 부르고 차창 밖을 구경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무섭지도 않니?”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아니요. 나는 무섭지 않아요. 이 기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저의 아빠시거든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평소에 자기 아빠를 신뢰하니까 기차가 어떤 위험한 곳을 지날지라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은 말하기를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고 했습니다. 젖을 배불리 먹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이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 아이가 행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배가 불러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엄마 품이 주는 아늑함 때문만도 아닐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요소는 갓난아이가 자기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짐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안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험과 역경을 만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일은 어린이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유원지나 놀이동산에 놀러갈 것입니다. 모처럼 자녀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하루를 즐겁게 노는 날로만 보낸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자녀 교육에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가정교육은 실종되고, 학교 교육은 지식 전달에 그치고, 그나마도 학원에게 제 몫의 상당부분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부모들은 그저 자녀들에게 남보다 경쟁에서 앞설 것만 강요할 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들조차 그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녀 교육을 위한 변함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제일이 아니고 나도 잘살고 너도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말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한국 교회와 이 나라의 운명은 지금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많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힘을 합해서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교회와 민족을 위한 아름다운 꿈을 심어줄 때 저들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와 민족의 앞날에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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