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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대한 반응이 복입니다(미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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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2:6-13 말씀에 대한 반응
                                            5, 7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길을 말씀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아담에게 생명의 길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그 종 선지자들을 세워 생명의 길을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비롯 사람들의 지혜와 다르다 하더라고 하나님 말씀을 따름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곧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아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려 쪼개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귀와 기도할 수 있는 입술이 있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말씀을 잘 듣기만 하면 소생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생들은 쓴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나에게 사탕처럼 단 말씀은 듣는데 나에게 약처럼 쓴 말씀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탕처럼 단 말씀보다 약처럼 쓴 말씀이 보약이 되는데 영적으로 무지한 인생들은 쓴 말씀에 귀를 막습니다.

대통령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쓴 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첨하는 측근들의 말만 믿고 결정을 하기에 나중에 실패한 대통령이 됩니다. 자기에게 쓴 소리하는 언론이나 학자들을 박해합니다. 쏜 소리를 싫어하는 대통령은 망합니다. 쓴 소리를 싫어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결국은 망합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운전자는 자기가 갈 길이 얼마나 막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평상시 운전했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고 빠른 길을 택하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보면 어떤 길이 얼마나 막혔는지 압니다. 그리고 운전자에게 전합니다. '어떤 길이 막혔으니 돌아가시오.' 그런데 운전자는 고집을 부르며 경험상으로 볼 때 이 길은 절대 막히지 않는다고 우기면서 간다면 나중에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낭패를 당하기 전에 미리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업신여기고 고집을 부리고 자기 길로 가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본문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약처럼 쓴 말씀이 주어질 때 귀를 막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6절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미가 선지자는 쓴 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침상에서 악을 궤계를 꾸미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보시고 계시고 돌이키라고 합니다(1절).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나 나무뿌리에 놓은 것과 같다고 외친 세례요한처럼  쓴소리를 할 때 사람들은 미가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설교하려면 강대상에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꾸 죄를 지적하고 아픈 부위를 건드려 기분 상하게 하면 다른 교회 가겠다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어떤 말씀을 좋아할까요?
11절 거짓 예언이라도 좋으니 사탕처럼 입에 단 말씀을 달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인 것을 뻔히 아는데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 말하면 좋아합니다. 거짓인 것을 알지만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시대가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기보다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만 전달해 달라고 합니다. 죄와 잘못은 지적하지 말고, 번영과 풍요만 말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도 번영과 풍요를 말하면 아멘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입을 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쓴 말씀에 귀를 막을까요? 죄를 지적하면 거북하고 죄를 버리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8잘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사람의 겉옷을 벗깁니다.
9절 여인들을 즐거운 집에서 쫓아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영광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렇게 약한 자를 못살게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지적하니 그런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헤롯의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맞는 말이지만 품고 있는 헤로디아를 버릴 용기가 없어 세례요한을 죽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이미 즐기고 있는 죄에서 돌이키기 싫어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입맛에 맞지 않는 말씀에 대해 귀를 막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조금만 강한 말씀을 전하면 바이러스 걸립니다. 마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만 빠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 것처럼 강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강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시대는 면역성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돌이킴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니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린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선고가 10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 땅을 가나안을 떠나라.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다. 이 땅을 더럽게 하였기에 멸망을 받을 것이니 떠나라고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안식을 즐기지 못합니다. 다시 포로로 잡혀 가야만 합니다. 말씀을 버린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포로가 되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남은 사람을 모으는 것입니다(2:12, 4:7, 5:7 8:7,18)
12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읍니다. 남은 자란 말씀으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말씀을 통해 심판을 받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 자들이다. 포로를 통해 우리가 잘못되었구나 깨닫고 말씀으로 돌아온 자를 모으십니다. 포로 중에 순수히 말씀을 받는 고난을 통해 돌이키는 사람들을 다시 모읍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으로 돌아오는 기회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고 철저하게 삶을 돌이키는 기회입니다. 고난 중에라도 말씀으로 돌아올 때 새 길이 열립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해 말씀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고난 중에도 고집을 부리는 자는 유기된 버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를 모으십니다. 보스라의 양떼같이 초장의 양떼같이 모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받은 자에게 길을 여십니다.
말씀을 통해 돌이킨 사람들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사막의 길을 여는 자를 보내십니다(13절). 그래서 사막의 샘이 광야의 길을 만들어 다시 안식의 땅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말씀을 들음이 복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그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www.sansung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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