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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기술자가 되라 /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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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의 기술자가 되라 김성철 / 2003-05-05 / 조회 : 80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이를 깊이 깨달은 성서기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복한 삶의 절대조건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 사랑을 전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7-8)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사랑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만, 인간을 참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소중한 사랑을 단순히 간직하고 느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사랑을 보존하고 관리할 뿐 아니라, 나누고 표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표현하기 위한 지혜가 바로 사랑의 기술입니다. 사랑의 삶을 위해서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을 최고의 사랑이 되게 하는 사랑의 기술을 본문의 말씀에서 찾게 됩니다.

사랑은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데 있어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며 관리하느냐는 것은 중요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어떻게 보면 ''오래참지 못하는 것''이나, ''온유하지 못하는 것'', ''투기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고 급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거칠어지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게 되고, 자랑하게 되고, 과시해보는 교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동물적이며 세속적 인간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인 육의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 곧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을 부인하는 자제력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세우는 데서 사랑의 기술이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물적이고 세속적 사랑을 억제하는 그리스도의 자제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제력의 사랑의 기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세속적 사랑의 속성을 초월한 자기억제의 자제력은 사랑의 깊은 기술입니다.

제가 성장한 교회에 백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그 지역에서 큰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은 화류계의 젊은 여인을 작은 부인으로 맞이했습니다. 권사님은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자신의 사랑을 깨뜨린 젊은 여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볼 때,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온유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투기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들에게 거친 행동이 앞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처했습니다. 정말 자제하는 사랑의 기술을 표현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용서와 함께,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의 자기절제의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권사님의 사랑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젊은 여인은 권사님의 사랑에 자신의 바른 모습을 찾고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권사님의 자제력 있는 사랑의 기술은 사랑이 병든 가정을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자제력 있는 사랑이 나타날 때, 가정이 회개와 바른 질서의 변화로 더 큰 행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는 사랑은 항상 지배와 간섭이 되어 상처를 만들어 낼뿐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랑은 섬세하지 못하여 모욕과 불쾌감만 만들어 냅니다. 투기하는 사랑은 비교와 경쟁으로 천박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교만한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되어 병든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오래 참는 사랑일 때 간섭하는 사랑이 아니고 관심을 주는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온유한 사랑이 될 때 부드럽고 섬세한 사랑이 됩니다. 투기하지 않는 사랑일 때,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성숙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사랑일 때, 자신의 오만을 드러내지 않는 깊은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랑의 기술은 자신을 억제할 줄 알고, 또 자제할 줄 아는데서 높아집니다. 이 자제할 줄 아는 사랑은 사랑의 깊은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어놓는 자기억제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구원이라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놓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자기자제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기술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내 입장에서 하는 사랑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는 사랑에는 방식상의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성서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

왜 무례한 행동이 나옵니까? 왜 자기의 유익만 구합니까? 왜 성냅니까?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의 입장에 서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의, 자신의 주장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에 무례히 행동하고, 자기유익만 구하고, 그리고 성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아름답고 성숙한 것이 되려면, 그 기준이 내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편에 있어야 합니다. 가령,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성취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 늘 서 있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에 항상 서 계시는 사랑을 가지셨기에 그분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나의 가정이 병들거나, 또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힌다면, 그것은 바로 내 입장에 서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께나, 아내나, 남편에게나, 이웃에 대하여 무례하고 자기의 유익만 구하고, 분노하며 성내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대상의 입장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병든 사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카운셀링에서 상담치료 효과를 위한 방법중 ''role-playing''(대역놀이)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역할을 바꾸어 대역해봄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 곧 자신의 병든 모습을 고치는 치료법인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의 입장에 서서 행하는 사랑은 우리의 병든 사랑을 치료합니다.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서있는 사랑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이룹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진리를 떠난 것이 될 때, 그 사랑은 동물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되어버려 공허한 것이 됩니다. 사랑이 진리를 떠나게 될 때, 그 사랑은 온갖 추악한 것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기쁨이 되기 위하여서는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서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65:16)라고 했습니다. 또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14:6)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는 ''성령님 자신''을 말합니다. 고로 "진리의 성령"(요16:13)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요17:17)을 가리킵니다.

사랑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도 참 행복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고,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기뻐하는 사랑이 되어야 축복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복하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아픔은 있으나 슬픔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랑,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랑이 될 때 진정 사랑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 되도록 하는 사랑이 바로 최고의 사랑의 기술입니다.

사랑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랑은 참아줍니다. 믿어주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사랑이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은 기다릴 수 있는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훌륭한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주는 것이며, 기대하여 주는 것이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될 때,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장의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보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상속받을 재산을 달라고 졸라 그 재산을 팔아 먼 타국에가 방탕하며 모든 것을 탕진한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를 믿어줍니다. 그리고 기대의 대상으로 여겨줍니다. 그리고 참고 견디어 줍니다. 끝까지 기다려 줍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참아주시고, 믿어주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걸고 계시며, 용서의 아픔(십자가)을 견디시면서 감내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술은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미숙한 사랑이고 "I need you. Because I love you."(내가 너를 필요로 하는 것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왜 필요한 대상과 기대하는 대상이 되었습니가? 내가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특별히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필요한 자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끄러움을 참고 견디어 주시며, 우리를 믿어주시고, 우리에게 기대를 걸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기다림의 사랑의 기술을 가지고 사랑할 때, 사랑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랑은 참아주고, 믿어주고, 바라며, 견디어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쉽게 포기하고, 정죄하고, 져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의 기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기술자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기술은 우리를 사랑의 능력자로 세워주십니다.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있는 사랑의 기술을 발휘하는 사랑의 능력자가 되십시오.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을 길을 자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술로 사랑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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