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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게 하신 것 /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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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신 것 (에베소서 4:1-6)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서로가 화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화해의 메시지를 주신 것같이 우리도 이 화해의 메시지를 hdlcu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화해의 메시지를 외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하나됨의 모본을 이룰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됨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됨의 근거가 무엇인가? 4절부터 6절까지 보시면 이 하나됨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크리스천의 하나됨의 근거는 혈통 때문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혈통이 달라도 하나일 수가 있습니다. 문화나 언어가 달라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이 크리스천의 하나됨의 원리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4절-6절을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또 한 구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또 우리가 한 성령님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가 아니더냐?'

이것이 오늘 하나됨을 권면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4장4절을 보면 제일 중요한 강조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이라는 단어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그 다음에 5절에서 강조된 중요한 단어는 주라는 단어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그 다음에 6절에서 강조된 단어는 하나님 혹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성령님, 그 다음에 주 그리스도, 그 다음에 성부 하나님.

그런데 이 4절 말씀을 더 자세히 보면 성령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다른 것이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성령이 몸과 소망이란 단어와 나란히 열거되어 있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여기서 몸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은 나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동일한 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소망, 천국의 소망, 꼭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강조점은 성령이지만 성령이 몸과 소망과 더불어 언급되면서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5절을 보면 주 그리스도입니다만 이 주 라는 단어와 더불어 나란히 언급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믿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믿음을 고백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고백의 의식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고백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동일하신 주님 그리고 동일한 믿음 그리고 동일한 내용의 신앙 고백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6절에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도 하나이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그 순간 그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진 것처럼 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만유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믿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한 하나님, 한 아버지를 우리는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동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동일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됨의 근거인 것입니다.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신앙 고백도 하나,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 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속해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한 가족이요 한 지체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우리의 하나됨의 움직일 수 없는 영원한 근거가 있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가 하나됨을 어떻게 삶 속에서 진짜 이루어갈 수가 있느냐?
이 하나됨을 지키는 덕목들에 관한 교훈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에 4가지 덕목들이 나옵니다.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 이렇게 4가지가 나옵니다.
여러분 성도의 사이에 어떤 금이 가고 서로가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이 4가지 덕목 중 무언가 하나가 결핍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거나,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거나,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이 덕목들을 이루는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는 이 4가지는 따로 떨어진 덕목들이 아니라 이것은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덕목들이란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겸손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온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오래 참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오래 참을 수가 있는 자라야 사랑 가운데 용납할 수가 있다. 이것은 따로 떨어진 덕목들이 아니라 이것은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덕목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주장을 꺽을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물론 교만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서 이것은 최초로 나타났던 죄악입니다.
사탄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유혹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싶은 끊임없는 유혹, 이것은 본래 사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인간 타락의 가장 중요한 죄가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죄인이었던 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허의 자리, 거기서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그 단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이미지처럼 온유한 사람 그러면 아주 약한 사람을 연상하기가 쉬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이 빌빌대는 사람을 보고 온유한 사람이고 하지 않습니다.
온유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이란 뜻입니다. 일종의 거의 자기 통제의 의미, 그것이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은 있어도 그것을 통제 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는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쉽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 내고 폭발시키는 사람들은 서로가 교제하기 힘들고, 또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 온유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면서 제일 먼저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그의 인격 가운데 첫 자리를 창조하는 가장 강조된 덕성은 바로 이 온유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한다면 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온유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유명한 리더였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결코 약하다는 이미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뻣뻣하다거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시면 이 모세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가 온유하기가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보다 승했다"고 했습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던 사람, 그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덕성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바로 이 온유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앞에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이 온유함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의 자리에 설 때 우리의 교제는 더 아름다워져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덕목은 인내입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오래참음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남남이 한 몸을 이루어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갈라서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부부 사이에 무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면 구체적으로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았고 참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서로 참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부부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 이웃들에게도 베풀 수 있다면 이웃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참을 수가 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내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내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또한 성경은 가르칩니다.

네 번째 덕목은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여기서 용납은 참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용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용납하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4장8절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평화가 흔들릴 때 교제가 상처를 받을 때보면 항상 남의 허물을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가운데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 드러내고 공격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동체의 문화는 축복의 문화가 아니라 그것은 정죄의 문화가 됩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얘기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가 이런 얘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본능대로 미워하고 복수하고플 때 우리는 짐승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살고자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축복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다는 것이요,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라 벽을 허무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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