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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는 목마름으로 / 마 5:6, 시 42: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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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타는 목마름으로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6절, 시편 42편 1 - 2절


  몇 년 전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읽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 : 마음을 열어주고 영혼에 불을 붙이는 101가지 이야기」인데 한국에서는「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란 제목으로 출판된 것이죠. 이 책은 당시(1995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무려 700만 권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책의 성공에 힘입어 여러 종류의 치킨 수프 시리즈가 소개되었습니다.「어머니의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10대의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노동자의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등등
  1998년 5월 말부터 6월까지 5주간 동안 미국의 베스트 셀러 랭킹 10위권 안에 치킨 수프 시리즈가 무려 5개나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타임지에서는 "치킨 수프의 강"이라는 기사로 이 책을 소개했습니다. 지금 까지 나온 여러 종류의 치킨 수프 시리즈는 무려 3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말 그대로 당시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완전히 치킨 수프 돌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어 봤지만 이 책은 모두 101가지의 간단한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T.V 선전에도 나온 내용인데 "인디에나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데. 브라이언이라는 15세의 소년이 뇌종양으로 인하여 방사능 치료와 화학요법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창피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브라이언의 같은 반 친구들이 뇌종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만이 학교 전체에서 유일하게 머리카락이 없는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삭발을 하게 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들의 제목을 보면 모두 '영혼을 위한'이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사람들의 영혼은 뭔가에 갈급 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과 배고픔을 '간단한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치킨 수프 즉 닭죽으로 채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들이 느끼고 있는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과연 '감동적인 한 그릇의 치킨 수프 이야기로 채워질 수 있을까?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그릇 치킨 수프와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면 오늘 날 우리 성도들은 어떤 것에 배고파하며 무엇에 갈급 해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무엇에 배고파하고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힘 중에 하나가 있다면 목마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자신이 이룬 그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목말라 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성취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작년 6월 월드컵의 그 감동을, 우리 한국 축구가 4강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라는 한 인물의 한국 축구에 대한 배고픔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의 유명한 말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한 게임 잘 싸웠다고, 한 게임 이겼다고 배불러 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이상과 목표 앞에서 배고파했던 히딩크라는 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축구의 수준이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성장을 합니까?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성장에 대해 목말라 하는 사람이 성장을 합니다. 그냥 그렇게 주일 하나 잘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신앙인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목말라 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합니까? 부흥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저 밤낮으로 "하나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교회의 황무함을 보시옵소서. 부흥의 불길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바람 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교회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 이런 부흥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목마름을 사용하셔서 부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영혼을 살립니까? 영혼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을 대하고도 그저 "저건 남자고 저건 여자고 - 야, 멋지네, 예쁘네"하며 아무런 주림과 갈급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면 눈물이 흐르고 그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고 불쌍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영혼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낙스는 하나님께 기도 할 때마다 "주님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아니면 제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존 낙스와 같은 이런 갈급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가장 강력한 공동체는 목마름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건 조직이건 목마름이 없는 공동체는 오합지졸에 불과 합니다.

  옛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이 생각만 하는데 그분들은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항상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갈망하는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쓰레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이 땅과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겠다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새비전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목마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께로 나아갑니까?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배가 부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고 뭐고 필요 없는 것이예요.

어떤 사람이 기도 합니까? 목마른 사람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 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말씀하셨는데 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까? 아쉬운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자꾸 위기를 주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갖게 하시려는 까닭입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하고 납작 엎드리라고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크게 쓰시기 위해서 시시 때때로 그들에게 목마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 사람들의 복은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복은 주리고 목마름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목마르고 주린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하는 갈급함을 늘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주리고 목마름을 가지고 나아 갈 때에 모든 것들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모라비안 교파를 창시한 분인데, 신분이 백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와 조건들을 다 내 팽개쳐버리고 복음을 위해서 맨발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다 버리고 복음을 외치면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까?" 그때 그가 대답하기를 "내 안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렇습니다. 목마름이 있으면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가요하기 전에 그 사람 속에 타는 목마름이 있다면 가만히 놔두어도 헌신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꾸 목말라지자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계속해서 마음이 바짝 바짝 마르고 목마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데 나의 꼴은 이게 뭔가? 하는 목마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더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더 많은 헌신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목마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목이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늘 하나님께 목말라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죠.

  시편 42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요단강 건너 마하나임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 주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지은 시를 고라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수집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저는 이 한 편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아들이 반역을 하여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주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누리던 그 호화롭고 아름다운 자신의 왕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앉아 있던 보좌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어렵고 힘든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대성인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어야 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고 있어야 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목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는 거치른 광야에서 자기 한 몸 의지 할 곳 없어서 이리저리 쫓기고 다닐 때나 왕이 되어 호화로운 왕궁에 거할 때나 아들에게 쫓기어 비가 내리는 밤에 맨발로 도망가야 했던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께 목말라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물이 떨러지게 되었습니다. 물을 찾아 헤매다가 짐 꾸러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혹시 물이 있는가 싶어가 뛰어가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엄청나게 값진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나그네가 외친 한마디 "겨우 진주야!! 겨우 다이아몬드야!!"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필요합니다.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나 진주가 시시해 보이는 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도 시시해 보이는 법입니다. 예배에 목마른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도 시시해 보입니다. 기도에 목마른 사람은 아무리 재미있는 T.V 프로그램도 시시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에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에 목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혼 구원에 목이 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새비전 교회의 부흥에 목이 마른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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