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접이 있는 열린 가정 / 마 10:34-42

  • 잡초 잡초
  • 244
  • 0

첨부 1


마태복음 10:34-42
"영접이 있는 열린 가정"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가정의 달'이라는 별명이 붙는 달입니다. 아마 '한 해 중 가장 밝고 화려한 색채를 지닌 달'이 5월일 것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다 이 한 달에 들어 있습니다. 어린이날인 5월 5일이 되면 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함박웃음을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됩니다. 또 8일이 되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공경하자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됩니다. 이렇게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정하고 자식 사랑, 부모 공경을 새삼 말하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인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소중한 자리인지는 떠나보면 압니다. 타향살이, 객지살이를 해보면 마냥 그리운 것은 언제나 집입니다. 아무리 즐거운 여행도 일주일이 지나면 집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집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다 '단란하다', '오붓하다', '다정하다'는 표현들을 어우리며 행복의 터전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거미 지고 하루가 저물 때면 사람들은 '어디 가냐'고 묻는 말에 대부분 '집에 간다'고 말합니다. 여기 집은 눈비를 피하고 함께 기거하는 공간 곧 house를 말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함께 삶을 영위하는 공간, 곧 가정인 family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에 간다'고 할 때 거기에는 '우리'라는 한정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집엘 가되 바로 '우리 집'에 가는 겁니다. 천지에 수많은 집들이 널려 있지만 내가 가는 집은 '내' 집 또는 '우리' 집입니다.

여기에 숨어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가정이란 그 가정의 구성원들에게는 무한히 따뜻하고 편한 곳이지만 이방인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곳이라는 겁니다. 즉 가정은 우리를 용납하는 자리이지 우리 아닌 타인에게 열려있는 자리는 아닌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정의 두 얼굴이 있고 양면성이 있습니다. 가정은 가장 헌신적인 사랑이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배타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우리' 라는 울타리가 둘러쳐진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건 아마 가정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일 것입니다. 안식의 공간으로서의 가정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고 사느냐 않느냐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자기 몸 속에 알을 낳아 키워 새끼들이 자라면 자기는 껍질만 남아 논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논고둥처럼 자식들이 커갈수록 부모들은 초라하게 껍질만 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부모들이 그걸 기꺼이 자원하고 자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그 자녀들은 바로 '내'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이기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부모의 헌신은 자기 자녀에게 국한됩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집 아이를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얘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다른 집 자녀들은 다 내 자녀의 경쟁자들입니다. 경계의 대상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사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적이 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격을 키워가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울타리,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지연, 학연이라는 암덩어리들로 변종되어 배양되어 나가는 겁니다. 그 시작이 바로 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부모에게 집중되는 곳, 그래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의 현장으로 전락될 위험을 안고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고 집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가족 해체론'을 내세웠습니다. 혈통의 소속을 따라 제 자식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양육하는 자연적 가족 개념을 배격했습니다. 그런 배타적 성격의 가족은 이상국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파편적 요소라고 본 것입니다. 혈연은 사회구성의 기본요소를 이루며 수많은 다른 연들 그러니까 지연, 학연 등의 존립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일차원적 인간관계의 아성을 구축해왔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것은 끈끈한 인정과 사사로운 의리에 사람들을 묶어둠으로써 끼리끼리의 담합은 촉진했지만 그것이 한 사회의 공공이념을 도출해 내고 보편적 가치를 배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부작용과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면이 없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병폐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줄과 빽, 출신 배경에 따라 시시비비가 얼마나 엇갈려 왔습니다. 이렇게 모든 세태의 저변에 가족이라는 이 유산이 한편으로는 유익의 자리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폐단의 자리로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가정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분께 가족은 보존과 극복의 양극적 대상이었습니다. 그분의 삶도 가정을 통한 삶이었습니다.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세상에 태어났고 그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들과의 나눔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혼인을 존중하셨고 가족의 신성함을 인정하셨으며 사람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며 이혼에 대해선 부정적일 만큼 가정의 소중함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가정관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론 가정을 꾸리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가정에 대해 비우호적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반가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건 가정 파괴적인 발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주님은 당신이 제자로 부른 한 사람이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한마디로 잘라버리십니다. 자식의 마지막 도리를 막은 겁니다. 가족끼리의 불화를 조성하고 죽은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거부한 주님의 가정을 향한 의도와 전망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당신이 오신 목적이 가정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어 가족간에 싸움을 붙이러 왔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가정을 부인하신 겁니까? 인간 역사와 더불어 오랜 유산인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풍지박산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가정은 가장 중요한 하부기본구조입니다. 그것의 해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임을 주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인정의 덫일 뿐이었습니다. 육신 공동체, 혈연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또 한번 거듭나야할 중생이 필요한 자리라고 본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정은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일차적 탄생을 지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또 다른 관문에 들어섬으로써 거듭나는 이차적 탄생으로 나갈 때에만 적절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혈통적 차원에서의 가정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장애가 되는 것임을 주님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냐'는 주님의 물음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정이 태반과 자궁에 기초한 가족의 일차원적 성격에 머물 때 그 가정을 올바른 가정으로 보질 않았습니다. 성이 같고 피가 같은 자들의 사랑 놀음을 대견하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건 짐승들도 하는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왔다'는 말에 '누가 내 형제며 자매며 어머니냐'고 반문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가 바로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대답하셨던 겁니다. 사람들에게 혈통상의 가족 개념을 혁파하는 충격적 일갈로 들렸던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은 가족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입니다.
주님은 낳아주고 기른 정만으로 진정한 의미의 어미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태반과 자궁에서 잉태되고 출산되어 한 어미의 젖을 먹었다고 그것이 형제의 전부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재정의한 가족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족화, 형제화가 그분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밴 태와 그를 먹인 젖이 복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기초월전 결단과 구체적인 실천이 있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 매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자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존 개념의 가족을 해체하셨습니다. 그럼으로서 자폐적 성채와 배타적 울타리로 기능하는 수많은 가족의 경계에 대해 도전하셨습니다. 혈통적 가족 제도가 그 일차원적 연대의 울타리 안에 머문 채 공공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할 경우 야만스런 짐승의 수준으로 퇴락할 위험을 주님을 그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보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참사랑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가정을 꾸리지 않거나 가정을 떠났습니다. 불가의 승려들이 그렇고 천주교의 사제들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떤 이들은 혼자 살았고 어떤 이들은 해혼하기도 했습니다. 결혼이란 혼인을 묶는다는 뜻이고 해혼이란 결혼을 푼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정을 이기심의 근원이라고 보았고 적어도 도를 닦는 데 있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바로 이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개봉되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픽션이긴 합니다만은 거기 보면 주님께서 받은 최후의 유혹은 막달라 마리아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며 꿈같은 일상에 빠져드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혼절한 채 이 강렬한 유혹에 둘러싸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온갖 종류의 유혹을 다 떨쳐낸 주님이셨지만 이 마지막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사명자에게 가정이 어떤 곳인지를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이 서른에 출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에게 있어 가정은 어떤 존재입니까? 가정이 필요하지만 가정에 묶이지 않아야 하는 이 딜레마는 핵가족화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가정이 가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측면들이 가동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정이 열린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새가정의 강령을 선언하신 후 이스라엘 속에 하나의 깊은 틈이 갈라지면서 가정들이 쪼개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반목과 대립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폭력과 불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재래의 가족구조가 지양되고 상대화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경계선을 깨뜨리고 진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방된 새가정의 구조가 모범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한마디로 가정을 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저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자기 가정을 오픈하고서 성도들을 초대하고 영접하면서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으로서 그들의 집은 공동체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를 지원하는 받침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길을 위해 떠나야 할 극복의 대상인 동시에 그 떠남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지속되어야 할 현실의 토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추구한 가정은 전통적 가족의 파격적 해체나 폐기, 곧 다 헐고 다시 짓는 게 아니라 리모델링,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가족의 전통적 가치를 깡그리 부인하지 않으면서 가족과의 인연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내성을 갖게 하셨는데 그것은 혈통상의 가족 굴레를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위계를 지녔으면서도 아버지의 일방적인 굴림과 통제가 아니라 대화와 소통의 관계로 이루어진 열린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을 맞으며 여러분은 어떤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의 가정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의 가정입니까? 가정을 여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여는 것은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해도 되고 안해도 괜찮은 그런 것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신앙적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영접'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십니까? '냉수 한 그릇의 영접이라도 상을 잃지 않겠다'는 말씀은 영접이 있는 열린 가정을 꾸리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연적인 것인가를 강조하는 겁니다.
영접이 있는 열린 가정, 그런 가정을 꾸리는 이 한달이 되어서 참으로 주님의 상이 풍성히 주어지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