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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눅 1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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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사랑과 함께 갑니다
누가복음 18장 15-17절

< 아이들이 철은 없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많습니다 >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로 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좇아갔습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배가 고파 지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상황을 연민의 눈으로 보았던 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으려고 가지고 왔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가 담긴 도시락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아이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자신의 배고픔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혼자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자신의 배부름을 포기했습니다. 그 일은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헌신이 담긴 일은 작은 일이라도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통로가 됩니다. 결국 그 오병이어는 수많은 사람들은 먹이는 기적의 오병이어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언제나 사랑의 헌신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그런 헌신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이기적이고 철이 없다고 합니다. 대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하기 때문에 잘 가르치면 누구보다 이타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백지와 같기 때문에 감동이 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것이 좋으면 그것만 좋은 줄 알고 순수하게 매달리는 의리와 뚝심도 있습니다. 정말 의리가 없는 사람들은 비상구를 두고 기분과 상황과 철에 따라 이동하는 어른들입니다.

요새 제일 인기 없는 정치인이 철새 정치인입니다. 아이들이 철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 어른들처럼 철새는 아닙니다. 물론 요즘에는 아이들 중에서도 철새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처음부터 철새 기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로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기 때문에 아이들도 철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잘 인도하면 얼마나 의리를 잘 지키고, 얼마나 순수하게 헌신하는지 모릅니다.

지난주 건축 헌금 봉투에 은혜와 한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이틀 전에 이유를 알았습니다. 엄마가 "얘야! 교회 이사를 하는데 너희들 헌금할래!" 하니까 두말없이 2년 동안 모든 세뱃돈을 천 원 짜리만 남기고 다 헌금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아이들은 기회만 생기면 오백 원 달라, 천 원 달라고 졸라대면서 자기들 돈은 거의 쓰지 않고 2년 동안 조그만 장난감 지갑에 돈을 모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고사리 손으로 지갑을 열어보며 흡족한 얼굴을 하기에 철 없는 욕심꾸러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의리가 있습니다. 교육받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른들이 진실하게 가르치면 아이들이 얼마나 그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지 모릅니다. 물론 어른에 비해 아이들이 철이 없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잘 가르침을 받으면 아이들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녀 교육을 위해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 자녀를 물로 보지 마십시오 >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가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시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6-17절)

제자들은 아이들을 물로 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물로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아이들과 같은 자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물로 보고 다 쫓아내면 하나님도 우리가 있는 자리에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 아이들을 물로 봅니까?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가끔 공치사를 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는지 아니!" 그 부모의 공로를 모르는 자녀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공치사입니다. 자녀들이 싫어하는 것은 바로 그 공치사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주기도 하지만 자녀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얻는 것도 많고, 간접적으로 얻는 것도 많습니다.

직접적으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맑고 순수함을 얻고, 활기를 얻고, 생동감을 얻습니다.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을 치는 것이 영적인 공기를 얼마나 맑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없는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에 아이들이 없는 교회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아이들이 적절하게 떠들어 주고 장난을 쳐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가끔 차에서 아이들이 정신없이 떠들면 "너희들 조용히 좀 못하겠니!"하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다가 정말 아이들이 조용할 때가 있습니다. 차멀미를 할 때입니다. 아이들이 멍한 모습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토하고 싶은 것을 참는 모습을 보면 차 안의 분위기가 얼마나 썰렁해지고 칙칙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아이들이 떠드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축복도 있습니다.

그처럼 아이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는 것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얻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겸손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거칠 것이 없이 살던 사람, 자신 있게 살던 사람도 자녀가 수술대 위에 누울 때, 자녀가 학력고사 시험장으로 들어갈 때, 자녀가 훈련소로 들어갈 때 자신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때로 자녀들이 비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기도도 간접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자녀가 갑자기 사라졌거나 늦게 들어옵니다. 자연히 우리에게는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저의 자녀를 지켜주세요!" 그런 식으로 자녀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용기도 얻게 됩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가끔 삶에 절망적인 순간, 지치는 순간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다시 한번 의욕이 생기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자녀를 생각할 때였습니다. 자녀를 행복하게 해야 하는 삶의 의무를 느끼면서 다시 살아갈 의욕을 얻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자녀를 소중히 여기는 삶 3가지 >

우리는 자녀들을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축복해주시고 행복하게 만드시려고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선물(은사)입니다. 가끔 은사를 추구하는 분들이 있는데 무엇보다 소중한 은사가 자기 자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27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요 보상입니다. 자녀를 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게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녀를 보고 생각하십시오. "저 자녀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자녀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자녀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1. 자녀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는 삶

우리는 자녀의 인격을 소중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부모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새는 자녀를 심하게 때리는 부모가 거의 없지만 자녀를 향해 습관적으로 심한 말을 툭툭 내뱉는 부모는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고치지 않으면 꿈과 비전과 넓은 가슴을 가진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끔 사극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불행이 느껴집니다. 넓은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기상은 별로 보이지 않고 좁은 세계 안에서 서로 싸우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 민족의 잘못된 언어 습관이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엄격한 서열과 장유유서의 문화 속에서 자녀의 꿈은 부모를 위해 철저히 희생되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녀가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면 무섭게 욕을 했습니다. "빌어먹을 자식! 망할 자식! 문디 자식!" 그런 말 한 마디가 자녀의 꿈과 희망을 말살했습니다.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우상처럼 생각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지나친 사람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과거에 가슴을 쥐어뜯었던 부모의 말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왜 그 모양이냐?" 그러니까 정말 그 모양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면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자녀에게 믿음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믿음의 말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이 교회에서 제일 십일조 많이 내게 해주세요!"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해도 너무 무식하게 기도한다고 했지만 그는 진지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삼수생이 시험 전날 식사하다가 물컵이 떨어졌습니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물컵 떨어졌네!" 하니까 진짜 떨어져 사수생이 되었습니다. 다음해에는 입시 며칠 전부터 조심스럽게 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접시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접시가 땅에 붙었네!" 해서 그해 붙었다고 합니다. 항상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자녀를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

자녀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자녀가 부모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면 얼마나 영적으로 건강하고 지혜로운 자녀가 되는지 모릅니다. 과외 많이 시킬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자양분을 통해 자녀의 머리도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주변 상황 판단 능력이 느립니다. 그 점이 사회 생활의 큰 약점입니다. 얼마 전에 그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은혜, 한나가 지혜롭고 맑은 아이들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 한번 더 만져주고 쓰다듬어 주라는 마음속의 감동을 주셨습니다. 어른들도 스킨십이 있으면 잠을 잘 자고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하물며 아이들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새 사랑을 더 느끼게 하도록 열심히 스킨십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3. 자녀에게 믿음을 물려주는 삶

내 자녀는 내 자녀가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로 키우도록 잠시 양육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내 소유처럼 "내 뜻을 이루어다오!"라고 하지 말아야 하고, "내 원수를 갚아다오!" 하는 모습은 더욱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합니까? 돈과 안락한 환경입니까? 아닙니다. 자녀에게 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앙보다 교육에 매달립니다. 그래서 유치원부터 무섭게 가르칩니다. 요새 유치원 선생님들이 가장 개탄하는 것은 부모들이 한글, 영어, 산수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치원은 백지 같은 아이들의 마음에 바른 삶의 기초를 가르치는 곳인데 그렇게 공부만 시키면 아이들이 정말 잘되고 행복하게 살까요?

요즘 아이들 과외비 마련하느라고 대형 할인매장 주부사원으로 나가고, 파출부 나가고, 청소 나가는 엄마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처럼 막대한 과외비를 써서 점수를 올리면 행복할까요? 점수가 조금 높아지고 아이들이 병든 나무가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앙 교육부터 잘 시켜야 영혼이 잘 되고, 인격이 잘 되고, 큰 재목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과외를 잘 못시켜도 부모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신앙 교육을 시키면 그 자녀들 중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자녀를 어디에 맡기겠습니까? 영어 학원에 맡기겠습니까? 컴퓨터 학원에 맡기겠습니까? 아니면 내 힘으로 맡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자녀를 위해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말씀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정말 똑똑하게 자라기를 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정말 똑똑해집니까?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전 세계 인구가 천 명이라면 그 중의 3명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노벨상을 탄 유대인 비율은 천 명 중에 350명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유대인들에게 말씀 교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교육은 어떤 지식 교육보다 자녀들을 똑똑하고 지혜롭게 만듭니다.

가끔 자녀가 고 3이 되면 "대학교에 가서 신앙생활 잘 하면 된다!" 하면서 교회 다니는 시간마저 아깝게 여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녀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앙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통해 하실까요?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인격이고, 인격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난주에 중 고등부 예배에서 전도사님이 이렇게 광고했습니다. "여러분! 시험기간에도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신앙의 진실성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기간에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시험기간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학생이라면 그 학생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녀들은 나중에 인생의 큰 시험도 잘 이길 것입니다.

가끔 자녀들 공부하는 모습이 부모의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공부는 하는 것 같은데 딴 생각을 많이 하고 대충 합니다. 그러면 답답해서 "너! 그렇게 공부해서 어떻게 할래!"라고 야단을 칩니다. 아마 많은 부모들의 신앙생활이 그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요? 믿는 것 같은데 대충 믿습니다. 자꾸 세상에 한눈을 팝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 그렇게 믿어서 어떻게 할래!"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진실하지 못한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신앙교육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끔 자기는 본 교회에 다니면서 자녀들은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로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사람을 바꿀까요? 그런데 왜 프로그램이 많은 이 시대에 신앙은 더욱 죽어갑니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신앙 교육입니다. 부모가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보면 자녀의 앞날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부모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자녀의 신앙교육만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의 신앙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교육의 1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최선을 다해 자녀교육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당장에 유익이 없고 귀찮다고 해서 "애들은 가라!"고 하는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효율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래의 관점으로 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어린이 영어 성경공부 모임을 플로렌스가 인도하게 됩니다. 비록 흑인 자매이지만 자녀의 신앙교육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흑인 선생님을 통해서 흑백의 차별이 없는 마음가짐을 배우게 될 것이고, 국제적인 시야도 갖게 될 것이고, 선교적인 마인드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어를 배우게 되는 것보다 그런 것들을 얻는 것이 더 아이들 장래에 유익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

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입니다. 살다 보면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도 그 인격을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다른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 곁에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의 부족함을 파헤치라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부족함을 내가 채워주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의 허물이 보이면 "저 부족함을 채우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해야지 그 허물을 드러내라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낸 것입니까? 왜 행복한 길을 놔두고 불행한 길을 갑니까?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보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우리는 약자의 약점을 덮어주고,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대개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마음으로만 끝나지 말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만 위하고 사는 삶은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구체적인 사랑의 손길을 펼 때 사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고, 행복도 주어질 것입니다.

일본에 기구찌라는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할 때 항상 1등만 해서 백인의 시샘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독감에 걸려 몇 주간 결석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번 학기에는 백인이 1등을 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학기에도 역시 기구찌가 1등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항상 2등만 하던 브라운이란 백인 학생이 병상의 기구찌에게 강의한 것을 전달해 주었던 것입니다. 브라운은 1등을 못했지만 마음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구체적인 사랑의 손길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베풀면서 굳이 광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 모르게 사랑의 손길을 베풀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내 시선을 머물게 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서로 주려고 하는 곳이 천국이고, 서로 받으려고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의 삶은 서로 주려고 하는 삶이고, 지옥의 삶은 서로 받으려고 하는 삶입니다. 어떤 부인은 말합니다. "결혼생활이 항상 지옥 같았다!" 그 말은 서로 받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자기도 역시 받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삶을 살기를 원하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진정 복된 인생이 되길 원하면 적어도 선교사님 한 사람을 선택해서 기도만 하지 말고 물질로도 후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교회 이전 잔금 치르는 날이 2주 남았습니다. 이번에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이처럼,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빨이 참 쎕니다. 그러나 평소에 남을 위해서 땡전 한푼 주지도 않으면서 말만 논리적으로 잘하고 법이 내세우면 되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법과 원칙만 내세우지 마십시오. 탈레반 원칙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탈레반 때문에 아프간 경제가 50년 후퇴한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교인들 중에 정치에 관심이 많은 어떤 분은 철새 정치인을 무섭게 비판합니다. 자기는 완벽하게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면 그 사람도 다른 교회로 어느새 철새처럼 날라 가 버렸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법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회가 법으로 유지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킵니다. 이제는 "법이요!" 하지 마시고 "사랑 뿐이야!"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화려한 말들은 한낱 소음일 뿐입니다.

믿음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에 한번도 안 빠지고, 성경을 여러 번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은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리는 모습이 없으면 그것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남에게 주기를 연습하십시오. 주는 삶을 통해서 내 소유가 줄어들수록 삶은 가벼워질 것이고, 진정한 벗도 얻게 될 것입니다. 낚시바늘 주변을 맴도는 물고기처럼 '돈'과 '출세'의 주변을 맴돌며 살겠습니까? 행복이 무엇입니까? 내 손을 펴서 필요한 곳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진정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즐기는 일'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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