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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모들아 / 잠 23:12-14, 골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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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아
(잠 23:12-14, 골 3:21 )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의 은혜를 다시 새기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모든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연로하신 모든 부모님들이 여생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님의 모든 수고는 조금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링컨은 구두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류사회 출신들은 당황스러워 했고 은근히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구두 수선공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링컨이 상원에서 대통령 취임연설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가 단상에 서자 한 나이 많은 귀족 출신의 의원이 링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미스터 링컨, 어쩌다 당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예전에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우리 식구들의 구두를 깁기 위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상원의원들이 있소. 그러니 당신의 출신을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때 링컨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멋진 창조적인 예술가였습니다. 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든, 내 아버지가 위대한 예술가였듯이 그런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귀족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만들어 드린 구두가 여러분의 발에 잘 맞지 않거든, 나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이 조금 있으니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제화공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러분의 구두는 수선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연락만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라도 여러분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이 때 상원의원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습니다.

둘째는 영국의 위대한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차대전 후 영국 연립내각의 수상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냄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영국에서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런던의 한 신문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쳤던 교사, 교수들을 취재하여 ‘위인을 만든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보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기사를 본 처칠은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귀 신문의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이 빠졌습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가장 존경하는 대상입니다. 어머니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머리에 항상 아버지, 어머니가 자랑스런 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지난 달, 한 달 사이에 아버지와 장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상가에 문상을 갔을 때에 그 목사님은 저의 인사를 받으시고 하시는 첫마디가 “이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없어”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한없는 슬픔과 아쉬움이 녹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효도하십시오. ‘부모효도 10계’라는 걸 보았습니다. 그 내용에는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하라”, “어른들이 할 일감을 드려라”, “취미를 가지게 해 드려라”, “가급적 많은 여행 기회를 드려라”, “어른을 이해하려고 애써라”, “가족 외출 시 동행하라”, “작은 병이라도 병원에 모시고 가라”, “일정한 용돈을 드려라” 등이었습니다. 효도는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효도 10계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녀라면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적어도 자녀가 부모에게 최소한의 해야 일을 효도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효를 다 해야 하지만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명을 부모님들도 잘 듣고 좋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든 아이를 자녀처럼 여기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성경에는 “너희 자녀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꼭 내가 나은 자녀뿐만 아니라 모든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자녀들을 내 자녀같이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옛 말에 “한 다리가 천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촌수 가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인척 관계를 중시하는 혈연사회인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남의 자녀를 나의 자녀처럼 여기는 마음이란 참 어려운 마음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친부모뿐만 아니라 남의 부모와 상전과 윗사람들 전체를 의미합니다. 모든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요구하는 계명이 십계명 5계명입니다. 디모데전서 5:1에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고 권합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는 말은 연세 드신 어른에게 잘못이 있어 꾸짖을 일이 있어도 꾸짖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연세 드신 어른들께는 부모에게 하듯 하라고 합니다. 요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회가 옛날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아버지 때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어머니 때는 옛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원리는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했다는 핑계로 인간의 기본 원리마저 저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성경은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고 합니다. 모든 젊은이가 형제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모든 어린이가 내 자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보세요. 모든 자녀가 다 잘 돼야 내 자녀가 잘 됩니다. 모든 주위의 자녀들이 전부 못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자연히 내 자녀도 못된 물이 든다는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나무라거나 책망하면 봉변 당하기 일수입니다. 그래도 옳은 일은 일러주어야 합니다.

작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녀 고교생 10여명이 학교에서 스승을 폭행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온 학생을 나무라던 선생님을 집단 폭행한 것입니다. 또 어떤 학교에서는 61세 되신 교사에게 욕하는 학생을 젊은 선생이 한차례 때렸다고 이 젊은 교사를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하필 이날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이 학교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주는 꽃다발을 거절하는 등 스승의 날 행사를 취소하였습니다. 이런 비인륜적 사건들이 우리 주변의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최근에는 버스 기사 폭행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버스 기사를 얼마나 때렸던지 기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밤에 술에 취한 승객이 자리에 앉지 않고 왔다갔다하니 위험하다고 자리에 앉으라고 기사가 말한다고 기사에게 시비를 걸고 발로 버스의 앞 유리를 차서 깨트렸습니다. 한밤의 버스 기사들은 이런 위협을 늘 느끼면서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 형님 같은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는 그렇지 않게 중형으로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젊은이를 훈계하고, 나무라고, 나쁜 것이 있으면 정말 내 자녀같이 가르치고, 젊은이는 가르침 받을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렇게 살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를 키우는데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만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회적 존재로 자랍니다. 온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처럼 키워야 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교회가 나서야 합니다. 어른들이 나서서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고 인격적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같이 소중히 여기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소예배실 앞의 남자 화장실에 들어서면 참 마음이 뚫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방충망이 뚫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두 군데에 구멍을 냈습니다. 아마 막대기로 찌른 것 같습니다. 몇 주일 후에는 구멍이 약간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는 아예 구멍에 손을 넣고 당겼는지 니은 자로 찢어졌어요. 그 방충망을 찢어서 속이 시원할 게 뭐가 있습니까? 어제는 보니 그 화장실에 모기가 한 마리 들어와 있어요. 찢겨진 방충망을 통하여 찢겨진 우리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또 아이들이 화장지에 물을 적셔서 벽과 유리창에 던져 종이 뭉치가 붙어 있게 만듭니다. 그걸 보고 예쁘게 느낄까요? 예쁘지도 않는 일이 재미가 있다면 이것이 아이들의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깨끗한 것이 예뻐야 하고, 질서 있는 것이 아름다워야 하고, 잘 정돈된 것이 기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질서의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치기는 해야 하겠는데 제가 화장실에 가서 한번도 현행범을 보지 못했어요. 보면 꼭 훈계할 것입니다. 잠언 23:13-14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우리 자녀를 훈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 훈계가 아이들을 구원합니다.

둘째,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비들아 너의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합니다. 격노란 말은 난폭하고 노여운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에 있는 말과 흡사합니다. 6:4에는 “또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난폭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자녀에게 노여운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에게 노여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비교의식과 지나친 엄격함과 편애 때문에 자녀들이 노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제일 노여워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누구 집 아이는 잘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누구 반만 해라”, “너는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는 말이 아이들에게 가장 노여움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 말을 하면 아이들은 속으로 “누굴 닮아 엄마 닮았지!” 라고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고, 절대적인 관계에서 원리적으로 훈계하세요. 비교해서 얘기하면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안 들리는 법입니다. 편애도 그렇습니다. 편애는 아빠 엄마가 편갈라서 아이 사랑하기입니다. 이것도 자녀들을 노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삭의 가정을 보세요.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에서편, 어머니는 야곱편이었습니다. 마치 두 아들이 부모의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복을 주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치 작전을 폅니다. 아들들이 작전의 선봉에서 행동대원이 됩니다. 이런 부모의 편애는 결국 두 아들이 서로 시기하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게 가정을 어렵게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부모의 짝진 사랑 때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 둘을 하나씩 편갈라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편갈라 대리전을 치르게 하지 말고 화목하게 하십시오. 대리전을 치르는 아이들에게는 하나같이 노여움이 있습니다. 이 노여움 때문에 대리전은 치열하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그에게만 유별난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요셉의 무례한 말과 행동도 응석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이것이 형들에게 노여움이 된 것입니다. 형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습니다. 그 때 형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꿈쟁이 요셉이 그들에게 왔을 때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구덩이에 넣어 혼자 죽게 하려고 하였고 마침 지나가던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아들들의 노여움을 일으켰고 결국 야곱 자신이 아들이 죽은 줄 알고 비통함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에 대한 편애의 대가는 야곱 자신이 받아야 했습니다. 서양 격언에 “편애는 어리석은 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자녀가 좋은 성품 가지지를 원합니까? 보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자녀가 공부 잘 하기를 원하십니까? 부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자녀가 좋은 가정 이루기를 원합니까? 부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부부 사이에 모든 가정의 해법이 숨어 있습니다.

셋째, 부모는 자녀가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낙심할까 함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격노케 하면 자녀가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이란 “무기력하여 정신적 성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격노하게 되면 무기력하고 정신적 성장을 못하게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우울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의 우울증도 심각합니다. 우울증이란 “우울병증세가 있어 생기가 없고 모든 생활이 늘 우울한 병증”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녀가 무기력하고 우울증 같은 정신적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으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낙심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기력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하고 싸우지 않고 요단강 건너지 않는 갓자손과 르우벤자손을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민 32:7). 하나님의 백성을 낙심케 하는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하나님은 낙심케 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그 조상들은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10사람은 돌아와서 백성들을 낙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민 32:9). 이스라엘 자손들을 낙심하게 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아시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낙심케 한 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중한 죄입니다. 낙심케 하는 것은 일의 의욕을 상실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비하합니다. 사람이 낙심하면 자신이 작게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과 일의 자신감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다윗을 보세요. 작은 아이였지만 위풍당당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을 길러주었습니다. “어떻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물맷돌 한 방에 끝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사무엘상서 24장과 25장에는 나발이란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완고하고 성품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나발에게 전쟁 비용을 부담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비용을 줄 마음이 있었지만 나발은 총명하지 못하여 다윗의 청을 무시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나발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하여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음 날 아침 나발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나발에게 하였습니다. 그 때 일을 사무엘상서 25:37-38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낙담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사람을 낙심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낙심하게 하는 것은 자녀를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절대 자녀를 낙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오래 전 미국의 한 잡지에 실린 설문조사 결과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섯 살 된 아이 100명에게 “텔레비전과 아버지 중 어느 쪽이 집에 있는 것이 더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92명이 텔레비전을 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거실에 텔레비전이 있고, 부엌에 엄마가 있고, 뒤뜰에 강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가실 때에 뒤를 따라오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 대하여는 우리가 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 쓰고 죽자(Die Broke)’의 저자 스티브 폴랜은 “다 쓰고 죽자, 인생을 즐겨라, 자녀에게 돈 대신 즐거운 추억을 남겨줘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돈 보다 더 중요한 유산이 있음을 유념하십시오.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남겨주십시오. 아이가 평생에 잊지 못할,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그 것을 전수하십시오. 이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현명한 유산입니다. 존 웨슬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물어보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내가 네게 준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그리고 “내가 네게 맡겨준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자녀를 잘 양육하여 이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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