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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향력 있는 부모 / 창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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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부모
창세기 18:19
설교자 : 김형준


학자들이 말하기를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라고 합니다. 임금 중심의 역사를 기술해 오다가 18세기가 되어서야 역사를 움직이는 민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각각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한 세기’, ‘20세기는 어린아이를 발견한 세기’라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무엇을 발견한 세기로 기술되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가정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 갈 자녀들에게 무한대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모의 영향력을 발견해야 합니다. 한 가정의 영향력은 그 가정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양육되고 자라난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평생의 시간만큼 만날 사람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도로디 놀트’ 라는 분이 잘 표현하고 있어 소개해드립니다.

만약 아이가 비난을 들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정죄하는 것을 배웁니다.
만약 아이가 적개심을 보고 자라면 그 아이는 싸우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놀림을 받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부끄럼, 수치스러움을 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자주 수치를 느끼며 자라면 그 아이는 자주 죄의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이가 관용을 받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인내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격려를 받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자신감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칭찬을 들으며 자라면 그 아이는 감사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공정한 것을 보면서 자라면 그 아이는 정의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안전감을 느끼면서 자라면 그 아이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인정을 받으며 자란다면 그 아이는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용납과 우정을 느끼며 자라면 그 아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부모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가정에서 큰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이 땅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습관과 훈련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만큼 가정은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삼으시면서 동시에 그의 가정과 후손에게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앞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고 또 아브라함은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합니다. 그 징표로 난지 8일되는 남자아이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적용됨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식입니다.

질문을 드릴테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누가 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입니까? 여러분의 아내입니까? 아브라함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해줍니다. 아브라함이 가정에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놓치기 쉬운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 끼치고 있던 아브라함의 영향력입니다. 이 사실은 동시에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족들 특히 자녀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 역시 영향을 주고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아내를 팔아버린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를 팔아버린 남편이 가정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로 살아 갈 수 있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라로부터 약속의 자녀를 얻지 못하여 후처를 얻었던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영향력 없는 사람이 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으로 서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중요한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다 말하고 행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분명히 이루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그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번 이라크 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담 후세인이 미국과 타협을 시도해도 미국이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타협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시행해나가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제안 앞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바꾸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또 다시 제안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40명이면 어떻겠습니까?” 40명도 괜찮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또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 죄송합니다. 30명의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20명이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시간이 조금 지났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 마지막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10명만 있다면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신실하게 이루는 존귀한 분이나, 사람들도 별반 인정치 않던 아브라함의 요청 앞에 계획을 수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는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리판단이 바르고 멋있고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리라’,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고 맺은 언약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약속을 믿는 자녀에게 동일한 언약을 적용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사람들 보기에 나는 실패한 남편과 아내일 수도 있고, 실패한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한 때는 사회와 정치, 역사에 영향을 주리라 꿈꿨지만 살다보니 어느새 가족조차 인정치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티끌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신음소리까지 기억하셔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기도와 간구를 받아들이십니다. 언약의 자녀가 간구하는 바를 들으시고 그의 계획을 수정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영향력 있음을 아브라함을 통해 깨달았다면, 자녀를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음도 함께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올바른 길을 가지 않고 있는 저의 자녀를 돌이켜 주시기 원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자녀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책임이 있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 영향력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영향력을 자식들과 권속들에게 나타내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언약은 가정 공동체를 향합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 가족들에게도 언약의 축복과 사랑이 함께 나누어지기 원하셨고, 그 자녀와 가족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 자에게 있을 축복이 후대에게도 잘 보전되고 전해지도록 하고자 하나님이 고민하신 흔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그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밖에 없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땅에 있는 안정과 풍요로움으로 인하여 다른 생각 시작할 줄을 아셨습니다.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 섬기지 말아야 할 물질과 쾌락 등으로 인해 받은 축복을 잃어버릴 것을 아시고는 요단강 앞에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간다 해도 지금의 기쁨과 축복이 후손에게도 전달되기 위한 원리였습니다. 바로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쉐마입니다. ‘들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신명기 6장 4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가 행하시는 일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섬기며 살아가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는 고백이며 이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명령하라’고 되어있는데 타협도 말고, 구걸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부모가 하는 말씀의 명령과 선포 앞에 새롭게 살아갈 가르침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 부모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간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한 생명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이고 또한 부모입니다. 우리를 그런 영향력 있는 부모의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진리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을 조사했습니다. ‘아침을 꼭 챙겨먹어라, 텔레비전 그만 봐라, 제발 숙제하고 놀아라’ 등, 어떤 부모는 ‘차라리 텔레비전에 들어가서 살아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손쉽게 주고 있는 메시지는 ‘공부하라’입니다. 지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건데, 그들이 공부한 결과가 진정한 행복의 지침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이 너무 못 배워 그 울분을 폭력으로 터뜨리다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본 간수가 글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3년 후에 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문서 위조 혐의였답니다. 지식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생에 어떤 상황과 사건이 전개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갈 수 있도록 진정 섬길 한 분, 하나님을 소개하고 믿음을 전한다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우리의 자녀가 정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오늘 주신 쉐마의 첫 번째 말씀에 순종합시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자녀에게 선포합시다.

쉐마의 두 번째는 신명기 6장 5절부터 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여기서 ‘다하고’, ‘다하고’, ‘다하여’의 반복은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의심을 마음에 남겨둔 사랑과 섬김이 아닌 온전히 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바로 부모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지 않으면,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가르치는 입술의 말이 아닌 삶을 따라 살 것이다. 따라서 너희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중국 최초의 선교사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그의 아들 하워드 테일러가 쓰면서 고백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 섬겨야 할 하나님을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입술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마음으로 사랑하는지는 가까이 있는 자녀들이 압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자녀들이 본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신명기 6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이 구절에서 ‘가르치라’는 반복해서 일관성 있게 모본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또 ‘부지런히’는 좀 더 정확하게 풀어서 설명드리면 ‘너희의 아들들을 날카롭게 갈아라. 하나님 말씀 앞에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는 자녀로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치라 말씀하신 이유는 신명기 6장 2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생활하게 하려하심이니라.’

앉든지 눕든지 일어나든지 길 갈 때든지 집에 들어올 때 문설주에든지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은 자녀가 어떤 인생의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사건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주간 중에 장인어른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6살 된 딸아이를 유치원에서 집으로 데려가는 중에 설명합니다. “지현아, 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어.” “왜 가셨대?” “하나님이 부르셨어.” “어떻게 올라가셨어?” “구름 타고 가셨어.” “나는 어지러워서 못 따라가.” “괜찮을꺼야”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오셔?” “할아버지는 다시 오시지 않을꺼야.” “불쌍하다 그치?” “아니야 그곳엔 하나님이 계셔서 수고했다고 등 두드려주셔.” “그래?” 딸 맘 속에 할아버지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계시고 우리도 언젠가는 가야된다는 것을 알게된 기회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왜 하늘나라로 가셨지?” 라고 말했을 때, “다 죽는 거야. 묻지마!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니!”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상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회로 삼습니까? 자녀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야 할 중요한 시기에 우리의 감정과 경험을 가르치는 기회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의 감정과 경험에 따르는 가치관을 전달하는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전환기 때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길러주는 교육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봅시다. 

네 번째로 신명기 6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라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섬기지 말아야 할 대상을 섬기게 될 것을 아시고 각별히 명령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물질을 섬기든지 권력을 섬기든지 쾌락을 섬기든지 인생은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아가도록 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섬기든 진정 섬길 대상이 아닌 대상을 섬긴다면 그로 인해 인생이 불행해지고 더불어 공동체까지도 부서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불량식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아들과 함께 길을 갈 때였습니다. 아이가 “아빠회사 과자다!. 저거 사주세요.” “안돼, 얘야.” “싫어...... 아빠 회사껀데 왜 안돼?” 누구나 심지어 불량식품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도 자식에게는 정말 좋은 것, 해롭지 않고 이로운 것 주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엇을 섬기기 원하십니까?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돈의 노예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자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무엇을 섬기면서 일평생 살기를 원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 쾌락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권력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자녀의 인생은 복의 근원으로서 살아갈 때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불행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르치지 않는 부모에게 주는 경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의 예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성전의 고기를 마음대로 갖고, 성전의 여인들을 취할 때에 엘리 제사장은 자녀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았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질 않았습니다. 그 결과 두 아들은 한꺼번에 죽고, 그가 섬기던 이스라엘 공동체도 무너졌습니다. 한가정의 실패는 그 가정이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줍니다.

잠언 18장 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처신을 말해줍니다. 요즘처럼 불안한 시대에 우리 자녀들의 안전한 망대는 무엇입니까? 족집게 과외 선생님입니까? 해외 유학입니까? 우리의 안전한 망대는 오직 하나님 말씀뿐이며,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줄 것은 자녀들 스스로 안전한 망대로 달려가도록 양육하는 것뿐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거친 세상을 용감하게 헤쳐나갈 뿐 아니라 나아가 아름답게 변화시키며 영향력 있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잠언 19장 28절 굿 뉴스 바이블(Good News Bible)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아직 배울 수 있는 때에 즉 어릴 때에 당신의 자녀를 훈련하고 징계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망하도록 돕는 결과가 될 것이다’ 잠언 22장 6절 말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9장 15절 말씀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양육 받았습니까 아니면 세상적 가치관에 따라 양육받고 자랐습니까? 세상적 가치관을 지닌 부모님 아래 자라 그 영향으로 현재도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겪은 방황과 불행한 기억을 자녀들에게 계속 남겨 주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나의 기도 앞에 민감하신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떠올리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정과 자녀 앞에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져 그들도 복의 근원으로 살도록 하심임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면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헌신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이기를 즐거워하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의사소통이 오고갈 것입니다. 서로를 감쌀 것입니다. ‘엄마가 있어서 너무 감사해. 아빠가 있어서 너무 감사해.’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녀들 스스로 하나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도 계속 이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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