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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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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환 박사 

20세기의 역사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오늘의 문명의 위기를 사상의 분열, 특히 종교간의 대립에서 찾고, 그 파멸에서의 문명의 궁극적 구제책은 각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예언했다. 종교간의 대화는 최근에 와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더욱 깊이 모색되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러해 전에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 각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대화의 첫 시도를 통해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려 힘쓴 일이 있기도 했다. 과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일치점을 찾을 만한 공통분모(共通分母)가 있는 것일까? 흔히들 이에 대해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비를, 유교에서는 인(仁)을 말한다고 하면서, 결국 이 운동의 한가지가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와 유교의 자비 사상 및 인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의 사랑이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자기 완성을 위한 표현으로서의 자비를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행동 이전의 동기를 중시하나, 다른 종교에서는 자비 행동 자체를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은 이미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족히 배불림을 얻고 그 축복경험을 나눠주는데서 긍휼히 여기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를 통속적인 의미에서 ‘인정(人情)이 많은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긍휼은 동정(同情) 이상의 것이다. 영어로 동정을 ‘sympathy’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 ‘syn’ 곧 함께 한다는 말과, ‘paschein’ 곧 경험한다는 말의 두 낱말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단어다. 어의상(語義上)으로 보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어떤 일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sympath’ 이상의 것을 가르친다. 외면적으로만 함께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속 깊이 들어가 이웃과 동일시하는 사랑을 강조한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인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다. 사랑할 수 없는 원수 같은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을 때 제사장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으나,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그를 끝까지 보살펴 참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셋 중에 누가 참 이웃이냐고 물을 때,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이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이 때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하심으로 참 이웃 사랑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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