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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 출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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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기 4:1-4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책이 소개된바 있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14살 때 받은 선생님의 질문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네들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때 빙긋이 웃으시며 “자네들이 대답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말이야 자네들이 50세가 되어서도 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면 인생을 낭비한 것이야.” 이 말씀은 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이 되기까지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나이만큼이나 세월을 살아오신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여러분 삶의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원하는 모습으로 오늘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기억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돌아봐야 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목자로서, 광야의 벌판에 서 있는 모세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를 들고 있는지 몰라서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광야에서 의미 없이 살아가던 모세를 일깨우고,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사용하시기 위해 하셨던 주님의 질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담긴 의미를 우리가 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내게도 동일하게 질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결실이 무엇인가 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 온 모세야 네가 살아온 인생의 결과가 무엇이냐?’ 이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 인생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깨닫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바로의 공주 아들이 되어 왕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모세는 Thutmoses 3세 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물에서 건진 아이’이지만, 이집트 언어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애굽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통치할 만한 능력과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역사를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했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해 힘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민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생명하나 건지기 위해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왕자로 있다가 광야로 도망치게 된 모세는 아마도 마음에 수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원래 꿈꾸던 삶은 이게 아닌데……. 일어서야지, 일어서야지.’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한다는 꿈으로 몸부림쳤지만 양을 치는 목자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처절하리만큼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모두 이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고, 고상한 인격과 세계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기 위해 받은 훈련들이 이 광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지 좋은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어린양의 울음소리에 긴장하고 달려가야 하는 평범한 목자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삶의 결과는, 자기의 꿈을 묻은 광야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받은 자연 속에서의 연단, 광야의 고독을 통한 깊은 묵상도 영적인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만한 영적인 감각이 그에게 없었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의 영성은 황폐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찾아가셔서 질문하신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름대로 명상하며, 삶의 기준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결실이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광야의 모세처럼 어느새 희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현실에 매여서 꿈도 기쁨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짧게는 금년 1년을 돌아보면서,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에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질문하십니다. 나아가서 일평생 살아온 삶의 결실이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작은 희망이나 사랑, 믿음을 찾아 볼 수 없는 영적 메마름으로 두 손에 들려있지는 않은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왕의 지팡이가 들려져 있어야 할 모세의 손에 대신 목자의 지팡이가 놓여 있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모세의 생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모세로 하여금 철저하게 보게 만드셨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경험은 출애굽기 32장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주신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모세는 깜짝 놀랄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악한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야 내가 약속한대로 이 백성을 저 가나안 땅까지 내 사자를 보내서 인도하겠다. 약속은 지키겠는데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인 주님 약속이 분명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목표로 하는 가나안 땅에만 도착하면 목적은 이뤄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기를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모세는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모세는 그곳에서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구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철저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화려했던 왕궁 생활 그리고 지치도록 살았던 광야 생활, 그 어느 쪽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목자의 지팡이 뿐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자기 인생과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목표와 만족을 얻게 된다 할지라도 멈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모세가 철저하게 깨닫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고, 그러한 깨달음은 백성들을 인도해 가는 여정 속에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남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모세 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왕궁에서의 훈련을 통해 자기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 사람이 싸울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서서 애굽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고 말리는 모세에게 오히려 “누가 너를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합니다. 이는 모세의 꿈을 깨뜨려 버리는 한마디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이라 여겼는데, 자신의 허무를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광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사명과 꿈도 다 접은 광야에서 목자로 살아가며 목자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또 한번 발견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겠다 하실 때에도 모세는 “아니요. 그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옛날 한때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지금 나는 목자 이상이 아니에요. 내가 배웠던 지식, 가졌던 지혜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짐승과 함께 뒹굴면서 오직 좋은 목초지를 찾는 그런 평범한 목자 이상의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민족을 구원하다니요? 아니요, 하나님!” 대답합니다.

그가 거절한 이유, 자신은 광야의 평범한 목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 앞에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이 바로 “하나님 내가 누굽니까? 내가 누구기에 하나님 나를 다시 부르십니까? 아니요, 하나님 나는 목자이상의 존재가 아니에요. 나를 부르지 마세요. 나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이대로 살다가 죽게 그냥 내버려 두세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서 모세 그가 진정 누군가 하는 것을 알려 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겸손하게 하지만 사실 ‘나는 대단한 존재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여유 있고, 지식도 있고, 권세와 명예도 있으니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거짓된 자만심에서 나오는 허영과 교만, 그리고 한계 있는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오만과 무모함으로 모세처럼 스스로 지도자로 자처하며 살아가는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그런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아! 인간이라는 것은 노력하고 애쓰고, 무엇을 집어 봐도, 무엇을 획득 해봐도, 무엇을 소유 해봐도 결론은 허무한 것이구나.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도 같은데 양파껍질 벗기듯이 벗기고 벗기면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아! 인생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가는 것이구나.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구나.’ 그런 인생관을 가지고 주어진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에게 왕궁 40년 생활과 광야 40년 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모세 자신이 누구인가 깨닫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평가합니다. 좀 부하면 귀한 존재요, 좀 어렵고 실패하면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말입니다. 모세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야, 환경에 따라 너의 가치가 존귀해지거나 비참해 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요청합니다. “모세야, 너의 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팡이를 던져보아라!” 모세가 던졌습니다. 갑자기 뱀으로 바뀌었습니다. 광야생활에 익숙한 모세는 뱀의 무서움을 압니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서 피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뱀은 애굽의 상징입니다. 애굽 왕의 왕관 속에는 나라의 상징인 뱀이 그려져 있어서, 어려서부터 모세는 애굽과 뱀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뱀을 피하면서 모세는 바로 이 애굽에서의 권력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온 자기를 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피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저 뱀 앞에서 피할 수밖에 없는 나는 그런 존재구나. 이것이 나구나......’

또 자신의 상징과 같은 지팡이가 뱀으로 변할 때 모세는 자신 안에 있는 사악함과 교만을 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뱀이 약 70번 정도 등장합니다. 뱀이 등장할 때마다 뱀이 상징하는바 공통적인 특징은 교만과 파멸과 마귀입니다. 순간 그 앞에 나타난 뱀을 바라보며, ‘아! 내 속에 악함과 교만이 바로 지팡이가 변하여 된 뱀과 같구나......’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오! 하나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가말리엘 문하의 학자요,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 다른 사람이 볼 때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 모르지만 진정 나를 들여다보니 오, 나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그의 죄를 대속하시고 씻어주셔서 하나님 자녀로 다시 삼아주시며, 하나님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깨닫고 선포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다’ 그리고 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여건의 어떠함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겼으나, 모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실체와 모습은 이미 실패한 자요, 이미 무너진 자요, 소용없는 자라는 것, 그러나 오셔서 다시금 쓰시는 하나님을 보며 자기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린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인용하기 좋아하는 예화, 맹자의 맹모삼천지교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를 잘 기르기 위해 제일 먼저 이사 간 곳은 장의사 옆집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들은 울고 장례연습을 합니다. 그 다음에 아들을 데리고 다시 시장 통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아들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흉내 냅니다. 마지막에는 학교 근처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의 지혜로운 어머니를 대표하는 분이 시행착오를 3번 할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재해석이 나오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 번이나 이사한 맹자의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끊임없이, 누구든지, 언제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운 인생의 기초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시장바닥에 가서 생존경쟁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배우지 말아야 할지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별 가치 없는 존재지만 주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세에게 일깨워 주신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일깨워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나를 깨달을 때 낙심하지 않고 다시금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발견한 사람, 나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세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뒤로 물러서서 피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뱀처럼 엄청난 애굽을 상대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도 광야로 피해왔듯이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뱀은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아마 모세는 얼떨결에 뱀의 꼬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꼬리를 잡자마자 뱀은 다시 지팡이로 바뀌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상식 밖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에 그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오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17).” 모세가 피해서 도망간 뱀, 그것도 뱀의 머리가 아닌 꼬리를 잡았는데 다시 지팡이가 되어 그의 손아귀에 돌아온 것을 보고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습니다. 그의 실패와 그리고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던 지팡이가 하나님 앞에 높이 들려지면서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쓰임을 경험한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갔고 있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갈 때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페르시아에서 왕궁을 지어놓고 완성하기 위해 큰 거울을 하나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울을 운반하던 상인이 그만 실수를 해서 거울을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왕궁을 설계했던 설계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깨어진 거울조각 있는 데로 가서 망치로 그 조각을 더 잘게 깨뜨려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거울 대신에 조각난 거울을 붙이기 시작했고, 잘게 부서진 거울은 태양이 비칠 때에 영롱하고 찬란한 무지개 빛을 내면서 이 왕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세로 40년 동안 왕궁에서 리더 훈련을 받게 하시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광야의 성격과 특징을 파악하게 하신 다음, 마지막 인생의 40년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일에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하셨던 주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함께 초청하십니다. 모세의 실패조차 아름답게 쓰임 받는 모습을 보십시오.

금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카터, 그는 임기말년 이란에 인질로 잡힌 대사관 직원을 구하기 위해 미 특공대를 투입했지만 헬기가 떨어지면서 구출작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특히 미국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경제가 활기를 띄면서 미국경제는 위축되고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안함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우린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기억합니다만, 당사자인 지미카터 대통령은 어떠했을까요? 플래시는 새로운 대통령 레이건을 향해 터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운데 떠나야 했던 외로운 대통령 지미 카터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동분서주 해 보았지만 남은 것은 실패뿐이었습니다. 역사 속에 길이 남는 실패자, 오명을 씻을 수 없는 사람,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아, 넌 나의 여전히 귀한 존재야.”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부름 앞에 자신의 실패를 드렸습니다. 카터 재단을 세우고 고통과 분쟁이 있는 지역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도하며 모든 일을 행하였습니다. 퇴임 후 대통령이 갖는 일반적인 안락한 노후생활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인생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음을 확신하고 실패를 툴툴 털고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받은 수많은 상외에 이번에는 노벨상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취할 모습은 아닙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함없이 여전하십니다. 그러나 단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생에 대해 주님은 철저히 가르치시기 원하십니다.

한해의 결실을 바라보는 가을입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질문을 생각하며 짧게는 금년 한 해와 지나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고달픔과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던 지팡이가 본문 20절에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표현되고 있음을 기억하며, 좌절하여 의미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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