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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 예배의 참모습 / 고전 1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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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체 예배의 참 모습
고린도전서14:12-25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14:12-25) 


참다운 예배

  오늘은 본문에 의지해서 "참다운 공동체 예배"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은사의 풍성함을 주장합니다.  또한 그 은사의 풍성함으로 공동체 예배를 은혜롭게 하자고 합니다.  방언의 은사든지 예언의 은사든지 그 은사를 통해서 기도를 풍성케 하고, 찬송을 풍성케 하고, 말씀을 은혜롭게 해야 합니다. 

  먼저 예배의 중요성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 예배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모임을 가질 때마다 예배로 시작합니다.  왜 교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먼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성도가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여 하나의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넷째는 세상에서 우리 신앙이 자라도록 양육하고 돌아보는 일입니다.  다섯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교회 존재의 다섯 가지 이유 중에 첫째가 바로 예배입니다.  모든 모임에서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인들의 의무입니다. 

  예배가 뭘까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무 데나 대고 절하고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풍성히 살도록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바로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의 의식입니다.  모든 예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바로 예배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입니다.  무엇을 드립니까?  첫째로 드릴 것은 헌신입니다.  즉, 몸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니까 먼저 헌금을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헌금"이란 말은 "돈을 바친다"는 뜻인데 돈 바치는 게 예배입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獻身을 원하십니다.  "獻身"이 뭡니까?  몸을 바치는 겁니다.  육체만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 모든 생명까지 하나님께 다 드리는 겁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께 바칩니다!"  바로 그것이 헌신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는 바로 이러한 헌신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돈과 함께 물건을 드렸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산물을 드렸습니다.  목축하는 사람들을 가축을 바쳤습니다.  성경은 헌금이란 용어 외에 "연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대하34:9,14, 막12:41, 요8:20, 고전16:1, 고후8:2,9:5,11)  "연보" 란 말은 "가져온다"(bring into, KJV), 혹은 "λογειασ" 즉,  "모은다", "수집한다"(collection)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헌금"이란 말이 사용된 곳은 누가복음21장입니다.  여기서 "헌금"이란 용어는 헬라어로 "δορα"인데 "선물"(gifts)이란 뜻입니다.  헌금의 정신은 헌신입니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가장 먼저 바칠 것이 바로 내 자신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헌신과 더불어 두 번째, 세 번째로 드릴 것은 기도와 찬송입니다.  기도와 찬송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응답, 인생 문제의 해결입니다.  셋째는 각종의 풍성한 축복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인 만큼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배에 열의를 가져야 합니다.  12절 말씀에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는 "ζηλωται"(열심히) 구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열의를 가져야 합니다.  단순한 열의가 아닙니다.  바르게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통해서 예배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NIV)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라!  "신령과 진정"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신령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신령"이란 "영으로"(in spirit)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니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므로 눈에 보이는 방식 즉, 외형적인 儀式에 치중하지 말고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εν  πνευματι)란 말의 "영"(πνευμα)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란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드리는 사람의 영이란 해석입니다.  어찌 됐든지 영이란 점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영이십니다.  영과 영이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물질적인 것으로 타락시키지 마십시오.  예배 儀式에 참석한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은 세상에 출장 나가있어도 육체는 와 있사오니!  그렇습니까?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십시오.  둘째로, 진정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진정"(αληθεια)이란 말은 "진리"(truth), 혹은 "진실"이란 뜻입니다.  거짓 없이 드린다는 뜻도 있지만, 진리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뭡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예배드리라는 거예요.  내 기분대로 내방식대로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하나님 방식대로 드려야 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예배 절차를 주셨습니다.  우상 숭배처럼 제멋대로 드리지 말고 하나님 뜻대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참 예배가 바로 천국 백성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바로 알고 열심히 드리는 참다운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공감하는 예배를 드려라

  오늘 말씀이 예배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공동체가 공감하는 예배를 드려라!  예배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공동체적입니다.  세상은 점점 철저한 개인주의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철저하게 공동체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요, 그것이 천국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공동체적입니다.  공동체적 헌신, 공동체적 기도와 찬미, 공동체적 응답!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共感"입니다.  함께 이해하고 함께 느끼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보를 보세요.  예배 순서에 대한 용어들을 길게 풀어 썼습니다.  "성시교독", "사도신경", "개회송", "폐회송", "축도", "묵도" 등의 힘든 말들을 쉬운 말로 바꿨어요.  무슨 순서인지 알고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예배에서 공감해야 될 세 가지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입니다. 


  첫째는 기도의 공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3-17절)  이런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어떤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대표기도를 하시는 데 방언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신 분은 신령한 기도를 했겠지요.  그러나 회중들은 멍멍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 내용을 공동체가 함께 알아야 합니다.  혼자 뭔지 모르는 방언을 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함께 "아멘" 할 수 없었어요.  공동체 예배에서 기도는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여기서 "마음"이란 단어를 흠정역(KJV) 영문 성경에는 "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음의 이해를 뜻합니다.  공감을 위한 기도를 하려면 기도 내용을 다함께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내용이 잘 정리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 내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총 여섯 가지의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세 가지 제목이 있는데, 곧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주신 세 가지 제목은 일용할 양식, 사죄, 그리고 악에서 구함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시편에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기도의 주제들이 있습니다.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있습니다.  탄원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문이나 시편의 기도 내용들을 참작한다면 대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맡은 사람은 우선 어떤 것을 구할 것인지 공동의 관심사를 알아야 합니다.  "인류 평화를 위하여"와 같은 기도 제목은 거창하고 막연합니다.  피부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류 평화는 이루어 진 일도 없고 이루어질 가망성도 없습니다.  인류는 평화를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관점이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관련이 있는 현안들, 공동체가 감당해야 될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기도의 용어 선택도 중요합니다.  初信者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이런 기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시고 無所不在하시고 尊貴와 榮光이 無限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獨生子를 주시고 救贖의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臨하셔서 우리 소원을 悅納하여 주옵소서!"  아이들이 알아듣겠습니까?  기도의 문장도 간략하고 짧게 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소리를 수 십 번씩 한다든지, 쓸 데 없는 修飾語를 길게 늘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잘 정돈되고 축약된 말로 기도하세요.  시간도 유의해야 합니다.  대략 3분 정도, A4 용지 절반 이내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원고지에 써서 읽어보고 열 번 쯤 교정해야 합니다.  준비된 기도가 공감을 줍니다. 

  대표자가 기도할 때에 會衆들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의무입니까?  대표 기도자의 기도에 대해서 공감의 표시로 "아멘" 하는 겁니다.  "아멘"을 크게 하세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예배 때에 "아멘" 소리가 작아요.  목사가 설교를 변변치 못하게 해서 그런지?  마음이 뜳어서 그런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되느니라"(고후1:20)  공동체 예배에서 기도는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찬송의 공감입니다. 

영으로만 찬송하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찬송을 부르라고 합니다.  찬송에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멜로디와 가사입니다.  가사의 주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성품에 나타난 영광입니다.  사랑, 공의로우심, 거룩하심, 전능하심, 영원 자존하심, 생명력 등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업적에 나타난 영광입니다.  창조에 나타난 영광, 만물을 운행하시는 섭리, 인간 역사에 나타난 심판과 구원!  그 모든 것이 찬송의 주제들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찬송가에 보면 주제별로 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찬송가 차례를 한 번 보세요.  큰 분류에 예배, 성부, 성자, 성령, 구원, 성경, 교회, 성례와 예식, 절기와 행사, 성도의 생애, 송영과 영창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작은 분류에 보면 약 50여 종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주제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은혜를 懇求하는 내용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의 목적입니다. 

  찬송의 공감을 위해서는 음악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배움이 짧은 시골 할머니들은 찬송가의 가사를 잘 몰랐어요.  "태산을 넘어 險谷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502장)  할머니들이 "험곡"이 뭔지, "영광"이 뭔지 압니까?  그래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태산을 넘어 홍콩에 가도....하늘의 영감, 하늘의 영감"  태산을 넘어 홍콩에 가도 하늘의 영감님이 다 돌봐주신다!  맞습니까?  가사의 뜻을 정확히 알고 불러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들은 모두가 은혜 받으신 분들의 체험담입니다.  431장 가사에 보면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1절,3절)  이 가사를 지으신 분은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입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독일의 실레지아 지역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신구교도 사이의 30년 전쟁 후에 실레지아 지역은 카톨릭 세력이 득세하여 슈몰크 목사님은 매우 힘든 목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농촌 지역의 36개 마을을 조사 2명과 함께 돌아봐야만 했습니다.  목사님은 과로에 중풍 백내장으로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도 성도들을 열심히 돌아보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1704년 어느 날 부부가 함께 심방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연기만 나고 있었습니다.  정신 없이 잿더미 속을 뒤져보니 두 아들이 서로 껴안은 채로 새카맣게 타죽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 부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 예수님 비록 제가 당한 슬품이 크오나 주님도 세상에서 우셨고 자주 홀로 슬퍼하셨으니 이제 제가 주님과 함께 울어야 한다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431장의 가사입니다.  한 번 불러 볼까요?  405장 가사도 그렇습니다.  죤 뉴턴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만 뉴턴이 7살 되던 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선의 선장이었는데 뉴턴은 11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선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불우한 환경과 과격하고 사나운 선상 생활을 통해서 뉴턴은 난폭해졌습니다.  1743년 강제로 해군에 입대한 그는 사고뭉치로 찍혀서 다시 아프리카로 가는 노예 상선에 넘겨져 버렸습니다.  노예선과 아프리카 생활을 통해서 온갖 학대를 받고 열병까지 겹쳐서 거의 죽을 뻔하던 그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났습니다.  1748년 3월 1일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크게 회개했습니다.  그 후에도 노예선 선장이 되어 오락가락하던 그는 1750년 메리 카틀렛과 결혼을 하면서 완전히 과거를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 많은 감화를 끼쳤습니다.

405장은 그의 나이 54세 때인 1779년에 작사한 찬송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고 품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405장 가사는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찬송의 공감을 위해서는 가사뿐 아니라 멜로디도 중요합니다.  멜로디는 대개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합니다.  시편에 보면 노래 곡조 제목들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현악"(4), "관악"(5), "스미닛"(6,12), "식가욘"(7), "깃딧"(8,81,84), "뭇랍벤"(9), "아얠렛샤할"(22), "소산님"(45,69), "알라못"(46), "마할랏"(53), "요낫 엘렘 르호김"(56), "알다스헷"(57,58,59,75), "수산에둣, 소산님에둣"(60,80), "마할랏르안놋"(88) 등등.  물론 이런 곡조가 어떤 것인지는 오늘날은 모릅니다. 다만 당시에 있었던 노래 곡조들일 뿐입니다.  곡조는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중세에는 그레고리 성가가 주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더불어 각국 민요를 비롯한 다양한 곡조들이 찬송곡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흥회가 많았던 시절에는 부흥성가가 유행했습니다.  조금 더 대중적인 복음성가들이 나오더니, 오늘날 젊은이들은 CCM이란 장르를 만들었습니다.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란 뜻입니다.  예배 음악으로써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즐겨 부르는 신앙적 노래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1부나 2부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3부 예배의 분위기를 잘 모르실 거예요.  궁금하시면 한 번 참석해 보세요.  예배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CCM 곡들은 곡조의 변화가 심하고 길어요.  콩나물이 복잡합니다.  밀고 당기는 음이 많아서 박자를 맞추기도 힘들어요.  그래도 신나게 부릅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아는 척 하면서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이해하고 함께 느끼는 겁니다.  좋은 찬양은 혼자 감격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함께 공감하면서 함께 부르는 찬양입니다. 
  셋째로, 말씀의 공감입니다.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공감해야 합니다.  중세 이후 로마 교회는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드리다가 최근에 이르서서야 各國 언어로 바꿨습니다.  모르는 말로 예배드리는 데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 개혁의 핵심적 근거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 각 나라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공감하지 않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가장 중요한 순서는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시간 곧, 설교 시간입니다.  시간 배정으로 봐도 설교가 가장 길어요.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예배당 구조를 보세요.  모든 것의 중앙에 강단이 있습니다.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설교의 역할, 말씀의 역할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설교에서 중요한 것도 역시 공감입니다. 

  우선 설교자는 본문을 잘 이해하고 쉽게 해석해 줘야 합니다.  설교는 강연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宣布(proclaim) 행위입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설교예요.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충실히 해석해 줘야 합니다.  여러분도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뜻을 들으려고 하세요.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공감을 위해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묵상해야 합니다.  어차피 성경 본문은 동일합니다.  수 많은 설교자들이 같은 성경말씀을 들고 설교합니다.  저도 같은 본문을 들고 여러 차례 설교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같다고 설교가 매 번 같지는 않습니다.  설교하는 대상자가 달라지고, 설교를 듣는 청중이 처한 환경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남이 만든 식은 밥을 주지말고, 항상 따스한 밥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홀로 묵상하고 사색하여 깨달은 말씀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매번 신선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저의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이 설교가 끝나면 바로 다음 말씀을 시작합니다.  밥 먹을 때, 길에 다닐 때, 산책 할 때, 심방 할 때, 잠잘 때...항상 말씀을 생각합니다. 

  설교를 공감하려면 설교자만 준비해서는 안됩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마음 밭이 여럿입니다.  길가 밭, 돌 밭, 가시떨기 밭!  세상 염려나 근심이 가득하여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는 마음, 죄를 청산하지 못해서 그저 다음 번에나 잘하자고 미루는 마음, 온갖 사상이나 철학으로 복잡한 마음....다 청소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세요.  마치 새 음식을 담기 위해서 깨끗이 설거지를 하듯이 마음을 준비하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청중들이 두 번째로 준비할 것은 설교자를 위한 기도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 준비하도록 한 주간 내내 생각 날 때마다 기도하세요.  그러면 제가 훨씬 나은 설교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보다는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하시면 설교를 들을 때에 제가 설교를 잘 하든지 못 하든지 무조건 은혜가 될 겁니다.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준비할 때에 설교는 은혜로운 설교, 공감하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참다운 예배의 결과

  마지막으로 참다운 예배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공동체가 기도와 찬송, 말씀의 공감을 갖고 올바른 예배를 드리게 될 때, 공동체에 바람직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마음의 변화가 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기쁨이 옵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시련을 이기게 됩니다.  예배는 영혼을 고치는 시간입니다.  근심 걱정을 고칩니다.  슬픔을 고칩니다.  분노를 고칩니다.  미움과 시기를 고칩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고칩니다.  누가 고칩니까?  주님이 고쳐주십니다.  예배는 주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예배에 임하여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 기도와 찬미를 받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헌신을 받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놀라우신 치유와 회복을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예배를 통한 삶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다양한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서로 삶을 공유하고 나눴습니다.  성전에서 모이고,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함께 기쁨으로 찬미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기꺼이 내주고 有無相通 했습니다.  온 교회가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족이 됐습니다.  모든 삶이 주님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영혼 중심으로 변했어요.  모든 가치관이 다 변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덕중앙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예배가 중심이 된 공동체, 그래서 삶이 매일 변화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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