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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들아 / 전 11:9-10, 요일 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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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5. 18.
청년들아
(전 11:9-10, 요일 2:13-14 )

프로제리아란 병이 있습니다. 영국의 길포드라는 의사가 맨 처음 보고하였다고 하여 길포드 신드롬이라고도 하는 조로증입니다. 이 병은 나이는 어리지만 노쇠, 동맥경화, 탈모, 근육이완, 주름살들 노인의 육체적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967년에 캐나다의 릭키 갤런트라는 11세된 아이가 이 병으로 죽었는데 완전히 노화현상으로 죽은 것입니다. 이 아이는 나이는 11살이지만 이미 신체 현상은 90세 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릭키를 아이라고 해야할지 노인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고 판단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습니다. 늙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젊은 사고를 가진 분이 있는가 하면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늙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었지만 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젊은 사고를 가진 젊은이가 참 젊은이인 것입니다. 맥아더장군은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고나 신앙이나 생활이 젊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젊은이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청년들에 대하여 권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세상을 이기라고 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때를 아끼라고 합니다. 청년들에게 권하는 말씀들을 잘 듣고 미래가 있고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원하는 대로 행하지만 심판이 따릅니다.

성경은 어릴 때를 즐거워하고, 마음에 원하는 길과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를 즐거워하고 마음에 원하는 길을 가기 쉽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행하라”고 합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의 사상은 인생의 최상의 길은 분복을 따라 생을 즐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행하라”고 하는 말은 정말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그래 네 맘대로 실컷 놀아봐라”고 하면 진짜 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 실컷 놀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나가 죽어라”고 한다고 진짜 죽으면 안됩니다. 전도자가 행하라고 하는 것은 “어디 한번 해봐라”는 뜻입니다. 행하지만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합니다. 인생을 즐기되 하나님의 심판의 빛 아래서 하라는 말입니다. 즐기되 심판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죽음과 그 후에 있을 심판을 늘 기억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라자 고팔란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 갔습니다. 밥에 야채를 넣은 음식이라며 ‘베지터블 브리아니’ 와 ‘베지터블 플라오’라는 메뉴가 나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베지터블 브리아니는 뭐고, 베지터블 플라오는 뭐죠?” “약간은 같고, 약간은 다르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죠?” “둘 다 먹어보시오. 그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게 될 테니까. 지식은 돈주고 살 수 있지만 경험은 돈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식당 주인은 말릴 사이도 없이 부엌을 향해 외쳤습니다. “여기 베지터블 브리아니와 베지터블 플라오 일 인분씩!” 음식이 짜다고 투정하자 식당주인 라자 고팔란은 말했습니다. “음식에 소금을 집어넣으면 간이 맞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소금에 음식을 넣으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소. 인간의 욕망도 마찬가지요. 삶 속에 욕망을 넣어야지 욕망 속에 삶을 집어넣으면 안 되는 법이오.” 욕망은 사람을 향상하게 만듭니다. 욕망은 과학을 성장하게 만들고,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지식이 발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람이 욕망만 가지고 살고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 그 과학과 지식과 삶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음과 눈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영에 이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욕망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거룩한 소망에 이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까운 어느 기독교 빌딩에 갔더니 그 빌딩의 벽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belief, desire, love” 즉 “신앙, 욕망, 사랑”이란 글귀입니다. 저는 그 글귀를 보면서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썼을까? 왜 faith 대신 belief를 썼을까? 왜 hope(소망)이라 쓰지 않고 욕망(desire)이라고 썼을까? 사랑이란 에로스(eros)일까 아니면 아가페(agape)일까? 욕망만 가지고 살면 바른 신앙이나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욕망대로 살기가 쉽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살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근심으로 마음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은 청년의 때를 즐겁게 보내는 두 가지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마음을 근심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근심이란 말은 ‘카아스’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분노, 슬픔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노, 번뇌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노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근심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197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은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혼란했습니다. 닉슨대통령은 자신의 과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대회는 닉슨의 과실로 점점 치열했습니다. 입후보자 중의 한 사람인 에드먼드 머스키는 메인 주 출신의 상원의원이었습니다. 두뇌가 명석하고 노련한 정치가였습니다. 경험이 많은 유망한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대통령후보 지명전의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의 약점을 찾으려고 인신공격을 하였고 비난의 화살은 집중되었습니다. TV 토론에서 전국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노하여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여 그 일 후에 대통령 후보를 자진탈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실패합니다. 잠언 16:32에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성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성을 지배하는 자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무엇 때문에 근심합니까? 청년들도 근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다고 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경하는 마음도 있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근심도 성경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근심이란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근심한다고 될 것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한번은 부하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풍랑이 거세졌습니다. 부하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시저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시저가 있지 않느냐?” 그러나 시저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좋은 근심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쁜 근심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7:10 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세상 근심을 떠나세요. 그리고 거룩한 근심을 하세요. 하나님을 위한 근심을 하세요. 이것이 참 근심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이런 참 근심에 일생을 던질 가치가 있습니다.


셋째, 악으로 몸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청년의 때를 즐겁게 하는 둘째 방법은 악으로 몸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근심을 떠나게 하는 것이 심적 방법이라면 악을 떠나게 하는 것은 육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 때는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나친 방종과 향락에 빠지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청년들은 육체적으로 죄를 짓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를 이겨야 합니다. 요한일서 2:13에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긴 것이 너무 대견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악에 물들기 쉽고 악한 자의 꼬임에 빠지기 쉬운 때에 이기고 사는 것은 참 자랑스런 일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악을 행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지헤롭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전인 육체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7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고 합니다. 육체의 욕망대로 사는 삶은 성령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뜻대로 사는 삶은 육체를 거역합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의 욕망대로 살아 성령을 거역하든지, 성령의 뜻대로 살아 육체를 거역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는 금욕주의인줄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금욕주의란 원래 영과 육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시작합니다. 영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악한 육을 제어하고 욕심을 일으키는 육체를 고행을 통하여 억누르므로 선한 영으로만 살려고 합니다. 성경이 악을 몸에서 떠나게 하고 육체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은 금욕주의적 의미는 아닙니다. 악을 몸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악에서 떠나게 하는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적극적 방법으로 육체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입니다.

금요일에는 제가 집에 가지 않고 백주년기념관에서 잠을 잡니다. 금요기도회 끝나고 집에 갔다고 토요일 새벽에 다시 오기가 힘들어서 아예 백주년기념관에서 잠을 잡니다. 가까이 이런 좋은 곳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저께 밤에는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벌써 모기가 생겨서 방안에 모기가 두 마리 들어온 것입니다. 새벽에 3시경에 모기가 앵앵거려서 잠에서 깼습니다. 모기는 절대로 큰 것이 아닙니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것입니다. 몸이 가볍고 부드러워 내 피부에 앉아도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모기가 내 몸 속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불을 켜고 모기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잡고 보니 새빨간 피가 그 속에 잔뜩 있었습니다. 전부 내 피였습니다. 내 피를 빼앗아간 다음에는 가렵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이게 보통 모기이기에 다행이지 말라리아 모기나 뇌염 모기 같으면 큰 병을 일으킵니다. 두 마리의 모기를 잡고 다시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손해가 많습니까? 피 도둑 맞아 손해지요. 잠 도둑 맞아 손해지요. 내 몸에 다가오는 악의 세력이 그러합니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다가옵니다. 내 몸에 닿아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몸에서 가장 중요한 피를 뽑아 가지만 그 정도로는 내 몸에 치명적 타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기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엄습하는 악의 세력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치명적 손해를 끼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다가오지만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이런 악에서 우리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악이 우리 곁에 얼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9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악에서부터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 조심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청년이 자신의 몸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으로 삼가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말씀으로 삼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에서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라고 한 대로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은 육체적 정욕이 많은 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전도서 12:1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말씀의 설명입니다. 어떤 분은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곤고한 날이 뭔지 압니까?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기소리에 밤새 잠을 못 잡니다. 청년들은 밤새 뜯기면서도 안 깨고 잘 자지요. 새벽닭이 아니라 작은 참새소리에도 잠을 깨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시계 얼람을 몇 개를 틀어놓아도 누르고 또 자지요? 이런 날이 오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분만 모시면 여러분의 장래가 형통합니다. 장래가 형통하고 미래가 밝은 청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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