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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외에는 /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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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오직 예수 외에는(마 17:1-8) 

오늘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주님의 제1차 수난예고(16:21)와 제2차 수난예고(17:22-23) 사이에 발생하였습니다. 이 변화산 사건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9:2-8, 눅 9:28-36).

(마 16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그리고 나서 (16:21)에 제자들에게 비로소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결코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에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그 일이 있은 후 엿새만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변화산은 일반적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와 가까이 있던 '헬몬산'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 대상 5:23) 또는 시료(신 3:9) 등으로도 불려졌습니다. 이 산은 해발 2,850m로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습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불려졌습니다. 바로 이 산에서 주님이 변화되신 것입니다. 변화산에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단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12제자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 세 명의 제자는 주님께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등생 그룹, 수제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 17:2)에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눅 9:29)에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였습니다. (눅 9:32)에는 이것을 가리켜 '예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변형되다(메테모르포데)'라는 말은 '변함'이라는 단어 '메타'와 형상을 뜻하는 '모르페'의 합성어로 내면으로부터 변화되는 본질적인 형체의 변화를 의미합니다(빌 2:6). 애벌레가 변태를 거치면 나비가 되듯이, 그것은 본질적 형태가 영광스럽게 변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형을 가리켜 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②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번개의 섬광처럼 빛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보고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요 1:14).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였습니다. 그 본체의 형상이었습니다(히 1:1-3, 빌 2:6). 그렇다면 저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의 변화의 영광은 장차 승리하실 당신의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영광과 재림하실 승리의 영광이었습니다.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세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던 중에 곤하여 졸다가, 갑자기 예수의 영광과 예수와 함께 선 두 사람 곧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눅 9:32). 모세가 누구입니까? 종된 애굽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출애굽(Exodus)을 명령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광야교회를 이끌었던 자였습니다. 시내산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지킬 율법을 받은 자였습니다(출 31:18). 그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 속에 싸여 있던 자였습니다. 그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빛 때문에 백성 앞에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웠던 자였습니다(출 34:29). 그는 분명히 율법의 대표자로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그는 모든 선지자(예언자)의 대표자였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중에서와 지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목도한 자였습니다(왕상 19:9-12). 그는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예언하던 자였습니다. 모세는 모압 땅(느보산)에서 가나안을 쳐다만 보고, 거기서 죽어 장사된 자였습니다(신 34:5-6). 엘리야는 불말들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 자였습니다(왕하 2:11). 그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의 길에 산상에서 나타났습니다. 산상의 세 제자들은 즉시 저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저들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고 있는 기막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가? 바로 예수께서 고초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눅 9:31)에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갈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골 1:13-14)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출국은 곧 이 세상(사망)에서의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 구원의 문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졸다가 깨어보니 이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저 보이는 것, 겉모습, 외모, 환경, 물질 등을 바라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혹시 자녀의 초막, 직장의 초막, 물질의 초막을 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더 무궁무진합니다. 보이지 않는 축복이 더 크고 놀랍습니다. 12제자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제자들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 기막힌 환희를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준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어 버렸습니다. 여기 나타난 빛난 구름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왕상 8:10).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옷자락 속에 싸이고 말았습니다. 그 시간에 하늘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심히 놀라 엎드리고 말았습니다(마 17:5-6). 바로 그 상태는 죽은 자와 같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계 1:17, 사 6:5, 단 8:18). 놀라운 신적인 위엄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손이 저들에게 얹어지고, 예수의 음성 곧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는 소리를 듣고야 깨어나게 되었습니다(마 17:7-8). 저들은 눈으로 변화산의 영광을 친히 보았고(시각), 귀로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을 들었습니다(청각). 마지막으로 주님의 손이 저들을 만져주심과(감각) 또한 위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고개를 들고 눈을 떴습니다. 저들이 눈을 떴을 때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마 17:8). 모세와 엘리야도 가고 없었습니다. 저희를 덮었던 구름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엄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가버려야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의 사명이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정죄하였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의 정죄와 십자가의 죽음이 메시야적 대속의 죽음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저들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그 길을 예비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들은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는 율법(모세)과 선지자(예언)의 글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을 완성하는 일은 예수만이 감당하실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만 홀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 외에는 아무도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완성시킬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예수 앞에 고소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고소하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좇으면 이 여인은 돌로 쳐야 하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고소한 이유는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 하면 예수를 율법의 범법자로 고소할 것이고, 돌로 치라 하면 로마 국법에 따라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형권은 로마국법만의 권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몸을 굽히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저희는 묻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돌로 치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국법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답변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시 몸을 굽혀 손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그 동안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그 죄인 여자와 예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십니다. 모세도 훌륭하고, 엘리야도 훌륭합니다. 다윗도 훌륭합니다.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믿음의 승리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는 글 쓰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돌에 맞을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8:1-11). 그 고소하던 무서운 자리에 오직 예수만 남았습니다. 예수가 남으신 것은 그 여자를 정죄하고 사형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여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니 사죄 선언을 하시기 위하여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를 대신하여 예수 자신께서 돌을 맞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죄인의 곁에는 오직 예수님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만이 죄인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만 남았던 변화산상의 모습은 바로 영광의 모습이 아닙니까? 율법(모세)과 선지자(예언)의 글이 요구하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 때문에 예수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은 홀로 남아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율법도 물러가고 예언도 물러가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길만 남아 있어야 할 신약시대의 영광을 예고하고 있는 장면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오신 예수의 생애는 수난의 생애,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2:23). 예수께서 산 위에서 변화의 영광을 보여 주신 것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끝남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후 다시 오시는 재림의 영광임을 미리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깨닫지 못하였지만 후에 그 모든 일들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누가 30배, 60배, 100배의 영광된 축복의 삶을 누릴 자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질 때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오는 진리가 아닙니까?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은 희생의 밀알 만이 누리는 영광의 축복이 아닙니까? 우리는 좋은 일이 있든지, 슬픈 일이 있든지, 병들거나 어려울 때 우리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주님만이 해결해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주님만이 참 위로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생각도 보이는 초막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 만을 바라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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