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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와 교육의 우정 / 마 28:19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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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교육의 우정 
마태복음 28 :19 - 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같이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준엄한 명령을 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말씀은 선교 혹은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고, 마태복음 28장 20절에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교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와 교육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교육의 문을 열어주고 반대로 교육은 선교의 열매를 맺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교와 교육의 우선순위를 놓고 다툴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선교와 전도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를 선전하여 전도함이라고 했습니다. 후자는 기독교에서 도리를 세상에 널리 알림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와 전도에 대한 개념을 분명하게 정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영어권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영어에 missionary와 evangelical은 같은 의미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교사는 missionary를 전도와 선교로 사용했고 어떤 선교사는 evangelical을 전도와 선교로 사용했습니다.

전도는 gospel preaching이란 말이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선교를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베풀 선(宣)자와 가르칠 교(敎)자를 쓰고 전도는 전할 전(傳)자와 길 도(道)자를 씁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연상(聯想)이 베풀 선(宣)자가 배 선(船)자로 쉽게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선교(missionary work)는 배를 타고 먼 곳에 복음을 전하는 해외용으로 전도(evangelical
work)는 국내용으로 그 개념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저도 이러한 대세적인 순리를 벗어나지 않고 2003년 총회 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선교와 교육의 우정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Ⅰ. 선교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당 위적(當爲的) 행위입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자의 명령이기 때문 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졌다는 말은 첫째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천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계 인구가 하루에 어림잡아 37만 명이 태어나고 16만 명이 죽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사람이 죽는 사람에 비해 두 배가 넘습니다. 이 16만 명 가운데 예수를 모르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세계 인구 중에 66%는 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아시아에서 죽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예수 믿는 사람의 통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은(0.8%) 100명 가운데 한 명도 못됩니다. 1,000명 가운데 8명 정도입니다. 대만은 3.7%, 필리핀은 신교도가 10%, 태국은 0.1%, 라오스는 0.2%, 크메르 0.03%, 인도네시아 13%, 한국은 크게 잡아 20% 정도입니다.

3) 선교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부득불}이라는 말은 전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이라는 말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 찾는다는 말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최봉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일명 최권능 목사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줄곧 낙제만 했지만 그의 생전에 80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평양신학교에서 바로 가르침을 받은 목사의 전도의 열매는 엄청나게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전도를 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계시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와는 틀립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가지고 접촉해서 들려주어야 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율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은 철저히 타계에서 들어와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독교가 적극적인지도 모릅니다.

Ⅱ. 교육은 선교를 가능케 하는 당 위적(當爲的) 행위입니다.

이 말을 직언 하면 선교와 함께 교회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1) 교회 교육이 선교를 성취해 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에게 배운 것을 많은 증인 앞에서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선교를 하지 아니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함부로 가르치는데 더욱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바른 신학은 너무도 중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비전문적인 지도자(nonprofessional movement)가 크게 부각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직종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를 선교지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교사들의 신학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평이한 성경해석이라도 교리라는 틀에서 점검을 받아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카톨릭 신자수가 15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큰 집회도 없는데 왜 소리 없이 막강한 힘을 내재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절대적인 교육 철학이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교육에 의한 선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육의 본질은 총체적으로 잘못되었지만 교육의 힘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왜 선교에 교육이 필요합니까?

2) 나팔이 분명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7-8절에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나팔 부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나팔의 종류와 내용도 중대합니다. 우리의 나팔이 정확하게 소리를 내야하고 나팔을 불어도 춤추는 사람이 없다고 실망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 선교에 교육이 필요합니까?

3) 바로 배워야 바로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불확실성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 과학적인 증명이 부실하면 믿지 아니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의 사고는 확신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천국을 누가 가본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바른 신학교육이 바른 신앙생활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바른 신학교육은 바른 신앙생활의 길잡이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왜 선교에 교육이 필요합니까?

4)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든지 성장해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성장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성장은 교육을 통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밖으로는 선교를, 안으로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와 교육의 우정입니다.
이 시대는 움직이는 선교, 움직이는 교육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성장은 교육기반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라게 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단들은 저마다 설득력 있는 논리들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여기에 대처하는 길은 철저한 교회교육뿐입니다.

교육이 있어야 이단들의 논리 앞에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신학으로 말미암아 이단들의 잘못되게 하는 집요한 논리를 대적해 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린 신학논쟁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교육 부재라기보다는 교회교육의 남발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빙자하여 왜곡된 교회교육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침에 있어, 그 방법도 성경이 정한 법칙 아래서 교회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① 기독교 교육이 인본주의로 흐르면 교회교육의 통일성이 없어집니다.
② 교회교육의 방법이 성경에 의해 통제를 받지 않으면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③ 교회교육의 가치관이 세상과 비슷해지면 이 땅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수단으로써의 도구적 교육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듣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교회교육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타성에 젖어서 교육을 위한 교육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 서점에는 다양한 교재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해 아쉬운 것은 없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는 어디를 가나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메시지가 없는 시대입니다. 정확하고 강력한 바른 메시지를 듣지 못하면 성도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정작 아쉬운 것은 아는 것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행동화하지 아니하는데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제는 선교할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육하는 것을 선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찬양하는 것을 선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있는 다고 선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 아니하면 누구를 대신 보내야만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가든지 보내든지(Go or Send)하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요즘은 보기도 듣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설교하고 설교 듣는 것으로 교회 생활이 끝난다고 할 때 그 안타까움에 대한 더 이상의 확실한 수사가 없어 큰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가 교육이 아니듯이 교육은 선교가 아닙니다. 지금 받은 교육을 행동화하여 선교운동을 해야 거기에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교육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환경을 변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환경이 족합니다. 지금은 순교하는 시대가 아니고 선교하는 시대입니다. 환난 날에는 자기 신앙 파수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하는 평화시대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브라질 밀림지대에 파송되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다가 지난 4월 30일 오후 3시 김철성 선교사가 향년 6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시신은 5월 1일 쌍파울로 교회의 작은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브라질 아마존 강 밀림지대 임페라트리스에서 인디오 원주민 선교를 했습니다.
여기 그가 사역지에서 쓴 기도문 한편을 소개합니다.

"갈바 모르는 아브람같이 정글 속 밀림의 상공을 나 는 주의 종.
산 설고 물도 설은 아마존 정글 위를
창조주 모르고 사는 인디오를 찾아가는 길
선조들의 순교의 신앙 따라 택한 백성 영혼 구하려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선교 여정에 오른 연약한 종을
주여 지켜 주소서, 주여 인도하소서.
불원천리 찾아온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선교사
쉬지 않는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 응답 가운데
빠리미우 인디오를 찾아왔지만
독충들의 냉대와 인디오들의 냉소,
성령 하나님이여!
감동 역사 바라오니 무지한 인디오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 주소서!"

생전의 그의 영혼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성도여러분!

복음전파는 휴무가 없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2)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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