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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얼국과 등 / 출 33: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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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3:17 ~ 23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히브리서 12:22 ~ 25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땅에서 경고하는 사람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 벌을 피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분하면, 더욱더 피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 2:21 ~ 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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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서 본문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내 산에서,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간구했던 모세! 모세의 간구가 하나님께 이렇게 전달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뿐 아니라 이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문 부호를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꼭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얼굴 좀 보여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보아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걸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답입니다.
"내 얼굴은 보여줄 수 없다. 왜? 내 얼굴을 보면 너희들은 죽기 때문이다. 네가 꼭 보고 싶다면, 바윗덩이에 숨어 있어라. 그러면, 내가 손으로 너를 가리고 다 지나간 다음에 내가 손을 떼면, 너는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은 볼 수 없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한테 여쭤 보았습니다.
"할머니, 결혼하실 때 할아버지 얼굴 보고 하셨어요?"
"아니. 코빼기도 못 보고 결혼했다."
"그럼 뭐 보고 결혼하셨어요?"
"말로만 듣고, 부모가 하라니까 했지."
"행복하셨어요?"
"얼굴 안 보고 결혼해도 사랑하게 되니까 행복하던데."
요즈음은 얼굴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많은 테스트를 해보고, 심지어는 살아보기도 하고서 결혼을 합니다.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깨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을 보아야만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가졌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우리가 말하는 하늘나라로 부름 받을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겠지요?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얼굴을 보겠다는 말은 죽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분의 얼굴 대신에, 얼굴에 비친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십시오. 단, 한 가지, 얼굴을 보든, 등을 보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것을 믿고 살아가십시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의 요구 가운데에는 이런 게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이 백성을 이끌 때, 저도 확신 속에서 이끌기 위해서 제가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사실은 주님의 얼굴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얼굴에 담긴 영광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 영광이 빛나는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내 영광이 네 앞을 지나갈 것이다. 내 영광이 지나가면서 나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거룩한 이름 야웨! 그러나 너는 나의 영광은 보지 못할 것이다. 왜? 영광은 하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볼 수 있는 것은 영광이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영광의 그림자가 비치는 내 등이다."

영광의 광채, 영광의 그림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구약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한테 은혜를 베풀 것이다.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한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그것이 영광의 뒷면이다. 무엇 때문에 기어이 얼굴을 보려고 하느냐?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걸로 알고 감사하여라. 자비하심을 받았으면 그것이 얼굴 본 것 이상의, 영광을 본 것 이상의 복인 줄 알아라. 왜 하필 앞면만 보려고 하느냐? 뒷면도 보아라."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통하여, 자비를 통하여 자기 실체를 보여 주십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특별히 서구 전 사회에는, 기독교와 사상계뿐만 아니라,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서, 소위 인간의 문제를 취급한다는 모든 세계에는, 한 가지 공통의 질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신은,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신다면, 어디에 계십니까?" 그 질문의 한가운데에는 한 도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폴란드의 한 도시,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가 무엇입니까?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수많은 포로 수용소들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곳, 아우슈비츠! 수많은 사람이 가스실에서 그냥 죽어 갔습니다. 그들의 눈물이 얼마며, 고통이 얼마며, 한숨을 얼마였습니까?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모든 인간의 공통 테마입니다. 신학과 신앙의 절실한 테마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은 존재합니까? 아우슈비츠 사건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도대체 계시기는 한 겁니까? 그분은 눈물도 없습니까? 그분의 공의는 어디 갔습니까? 그 양반의 인간 되심은 어디 갔습니까? 그분의 크리스마스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전지 전능하다고 하는 하나님, 살아 계신다고 하는 하나님, 공의롭다고 하는 하나님, 그분은 계시는 것입니까? 또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간의 고뇌는 어디 있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질문이 하나입니다. "아우슈비츠, 그 속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보기에 그 속에는 세계도, 인간도, 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신은 과거에는 있었는데, 아우슈비츠를 보니, 이제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은 아예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제는 모르겠다고 내뱉었습니다. 무신론, 유신론, 불가지론! 온갖 신학이 넘실거렸습니다.

아우슈비츠에 하나님이 계셨습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그때 거기 계셨냐고 묻고 또 찾아보았지만, 그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했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절망 가운데에서 한 가지 답을 얻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 때, 하나님은 바로 아우슈비츠에 계셨다! 가스실에서 하나님은 함께 죽어갔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피눈물 속에 하나님의 피눈물도 함께 흘렀다!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에 계셨다!

이 답 하나로 신학이 다시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이나 한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아우슈비츠에 계셨다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의 절규 속에 계셨다? 사실 쉽게 답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답변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얼굴이나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서 골고다 언덕에 매달리셨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2000년 이후의 아우슈비츠는 2000년 전의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에서 죽어 가는 전지 전능한 분의 아들!

유대인들이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뛰어내려라."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답이 없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요청합니다. "당신이 구세주이거든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증거를 좀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는 하나님, 말이 없는 예수!

예수의 마지막 절규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세상이 어떻게 나를 믿으라고, 세상이 어떻게 당신을 믿으라고, 나를 버리십니까?" 이게 마지막 말씀 아닙니까?
우리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골고다 처형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사람들은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3일 동안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죽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던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은 없다." 3일 동안은 답이 없습니다. 3일이 지난 다음에 답이 하나 나왔습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습니다." 그 말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골고다 처형 때, 바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절대 지존자 하나님은 가장 약자가 죽어간 그 골고다에 계셨습니다. 3일 동안에도 어둠 속에 계셨고, 창에 찔릴 때도 함께 계셨고, 가시관을 쓸 때도 같이 계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죽은 그 사람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가슴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성령의 역사로 그 죽은 자를 살려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 죽은 자를 가슴에 끌어안고 성령으로 다시 살려 내어,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이 있은 다음에 우리들은 증거합니다. 인간의 절규 속에, 가장 아픈 그때에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인간이 가장 외롭다고 느낄 때, 그곳에 하나님은 함께 외로운 자로 계십니다. 심지어 죽는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아파하는 그 아픔 속에서 하나님은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픔을, 죽음을 생명으로 삼켜버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토해 내십니다.
아우슈비츠에 계셨던 하나님, 골고다에 계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도 계십니다.

WCC가 창립되던 1948년 이야기를, 제가 언제 설교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WCC 창립 때 상징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창립 예배가 있었는데, 거기 참석한 사람들 앞에 죽은 사람을 누이는 관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서 죽어서 관에 누운 사람을 한번 쳐다보고 자리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누가 죽었는지, 어느 시신이 누웠는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관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거기에는 시신이 아니라, 맑은 거울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시신을 보러 왔다가, 관 속의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답변은 각자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오늘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속에 하나님의 등이, 하나님의 얼굴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얼굴로 오늘 하나님을 뵈려고 합니까?
골고다에 계셨던 하나님은 부활의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임하시려 합니다. 여러분 반겨 주십시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찾아 다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골고다의 형편에 처해 있다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3일만 참으십시오. 3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3년이 될지도 모릅니다. 300년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 햇수는 제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으십시오. 부활이 올 때까지만 참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합니다. 그분의 등이, 그분의 사랑이, 그분의 자비가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십시오." 이 말씀 속의 새 포도주는 새로운 일, 새로운 역사를 뜻합니다. 인간이 한번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 그것은 항상 새 포도주입니다. 그것이 담길 그릇은 뭡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본질적인 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골고다에 계셨다. 누군가를 위하여!" '위하여'라는 말을 희랍말로 '프로'(pro)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골고다에 계시냐 하면, '프로 메'(pro me), 나를 위하여!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프로 노비스'(pro nobis), 우리들을 위하여! 나 개인을 위하여,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위하여'라는 말은 '대신에'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할, 골고다에서 죽어야 할 나를 위하여, 나 대신에, 골고다에 함께 쓰러져야 할 이 세계를 위하여, 이 세계 대신에 하나님이 죽으십니다. 오늘 나 대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죽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분이 임하실 자리 좀 내어놓으시죠.

여러분은 '나'가 몇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얼굴이 천 개쯤 된다고 합디다.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그 중에 참 얼굴은 어느 것입니까? 이것이 혹시 외부 이야기 아니지 않은가요? 내 얘기는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새 술인 영광을 담고자 하는 나,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순박하고 성실하고 개방적이고 열린 본래의 나입니다.
그 '참 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다고 합니다. 가식적인 나, 만들어진 나, 다 내게서 벗겨 버립시다. 가식적인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는 불의한 세계가 아니고, 타락한 세계가 아니고, 본래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만들어진 세계,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고 합니다. 본래의 세계를 회복하십시다.

새 부대를 찾으시는, 새 포도주인 하나님의 영광,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대신하여 지금 하나님이 죽고 부활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영광을 새 포도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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