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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효도(孝道) 신앙 II / 창 5:1~2, 신 1:31, 눅 1:31~32, 6:35,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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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孝道) 신앙 II / 창 5:1~2, 신 1:31, 눅 1:31~32, 6:35, 마 5:44~45   


이 아바신학은 저 율법의 신인 모세의 계약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저 사랑의 신인 아담과 아브라함의 그 언약의 신으로부터 뿌리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저 야훼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며 다시 저 아담은 언약을 따라 에로힘 신을 부활시켜 그 사랑의 하나님의 새 시대를 다시 열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바로 그가 그의 가정에서 가장 친숙하게 불러 왔던 아버지라는 이름이다. 이와 같이 인간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저 무한한 거리에 초월해 계신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 모두의 가정 안에 가장 흔히 그리고 가장 가까이 실존해 계신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정의 아버지로 지칭했던 것은 성경 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는 이 명칭은 예수님께서 최초로 거기에다 하나님의 형상과 품성을 가장 완벽하게 불어넣어 주셨던 아주 특별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가장 신선하고 유일한 교훈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 교훈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이것을 우리는 제2의 성육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태초부터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오랫동안 망각해 왔을 뿐이다. 인간들이 그것을 어떻게 망각해 왔던 것인가?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하나님은 역시 열국의 하나님이었다.

이 열국의 하나님인 엘 하나님 엘로힘이 또한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세우고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했다(창 17:2). 그러나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또 그 아들 야곱에게 와서 그 하나님은 열국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버리고 야곱을 택한 그런 비열국의 하나님으로 그래서 오직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만을 위한 선민의 하나님 즉 택함을 받은 자들만의 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우주적 신이 축소되어 하나의 민족적 신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이 후에 다름 아닌 유대인의 신 야훼였던 것이다. 이 야훼 신은 그러므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이 아닌 그  아들 이삭과 또 그 아들 야곱의 신이요, 그 아들의 아들들인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다. 그러면 그 아버지 신과 그 아들들의 신이 어떻게 달랐던가? 아버지 신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열국의 하나님이며, 엘로힘 하나님이요, 또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하나님인 전 우주의 신이시다.

그러나 아들의 신은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열국이 아닌 이스라엘 족속만의 신으로서 그가 곧 뒤에 나타난 야훼 신인 것이다. 이 신이 바로 모세의 하나님이었으며(출 6;3), 후에는 더 작아져서 유다 족속만의 신이 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신과 모세의 신은 그 명칭뿐만 아니라 그 역할과 활동 시기가 서로 달랐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역사를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보면 초기의 족장 시대와 중기의 출애굽 시대 그리고 말기의 왕국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족장 시대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 이전까지로서 이 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엘로힘 신의 활동 시기가 된다. 그리고 출애굽 시대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정복 시대로서 이 시대는 모세의 하나님 여호와 신의 활동 시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국 시대는 사울 왕으로부터 남북 왕조의 멸망 시대까지로서 이 시대는 엘로힘과 야훼 신의 대립과 혼합 시기가 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로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생모와 같은 신으로 언제나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자비의 신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신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치 낯설고 무서운 계모와 같은 신으로서 변덕스러운 사랑과 질투와 폭력이 가득한 두려운 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 엘로힘은 이삭뿐만 아니라 그의 이복형 이스마엘도 결코 버리지 않은 생모의 신이었고 또 야곱뿐만 아니라 그의 쌍둥이 형 에서에 대해서도 결코 버린 적이 없는 생부의 신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신 야훼는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고 에서에 대해서도 아는바 없는 누구에게도 생모가 아닌 양모요 계모와 같은 신이었다.

그것도 그가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낸 이스라엘 12지파에게만 양모요, 계모였던 것이지 그 외에 다른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폭군이요, 질투로만 가득 찬 전쟁의 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을 배반하였을 때는 비록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계약대로 피로써 보복하며 칼로써 징벌하는 무서운 법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계약의 신은 율법의 신인고로 언제나 황제로서의 품성과 군주로서의 품성만 지닌 법의 신이요, 그래서 양부나 계부의 신이지 결코 생부와 같이 참 아버지의 사랑을 지닌 그런 자비의 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여호와 신을 두려워했고 무서워하여 그의 얼굴 보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조차도 불러 보지 못하여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반면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로힘은 이스라엘을 낳으신 생부로서 아버지의 그 사랑의 품성을 그대로 지닌 자비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언제나 친근한 인간의 모습과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찾아 주시고 만나 주신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분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아버지의 성품을 어떻게 알았을까?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동정녀의 몸에서 아버지 없이 탄생된 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생아이었을까? 그렇다면 예수는 완전한 인간일 수가 없다.

또한 십자가의 고통 그의 수난 그의 죽음은 인간이 당한 고통이 아니라 신이 당한 고통이 된다. 그렇다면 그 고통은 진짜 고통 진짜 죽음이 아닌 형식적인 죽음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죽을 수도 없거니와 아플 수도 없고 고통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육신의 진리가 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수님은 부득불 인간과 똑같이 육신의 아버지 혈육의 아버지를 가지셨던 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 위에 "아바 신학"에 강조점을 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아바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을 낳은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을 낳은 그런 아버지라는 뜻 또한 아니다. 그는 아담을 만드신 창조주이지 결코 아담을 낳으신 제우스와 같은 그런 출산의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부자간의 관계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버지란 무슨 의미를 말함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효도에 대한 신앙적 자각을 암시하는 것이다. 제2의 성육자로서의 아버지 즉 그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계시의 인식이며 그 깨달음에 대한 것을 말함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님을 밝혀 둔다. 그러므로 그가 곧 하나님 같으신 나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버이들(famothers)만은 누구나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가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효도신학은 부모에게 대한 효도를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종교적 차원으로 지켜야 한다고 논점은 주지한다. 그렇다면 종교와 윤리는 무엇이 다른가? 종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약속으로 성립이 된다. 그러나 윤리는 인간들간에 수평적 약속으로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의 해약할 수 불변성을 갖고 있지만 윤리는 얼마든지 인간이 해약할 수 있으며 파기할 수가 있는 가변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아무런 부동성이나 절대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효도의 계명이 종교라면 그것은 하면 좋고 안해도 무방한 그런 것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하고 신명을 걸고 지켜야 할 계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십계명은 참으로 놀라운 명령이다. 땅에서 부모 공경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해서 세상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을 더 비약해 보면 세상에서 부모는 곧 하나의 보이는 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부모 섬기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죄가 되거나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제5계명을 철저히 이행해 오고 있다.

사도 바울도 보면은 에베소서 6;1-2에 예수님의 이분법적 해석을 따라서 한 말씀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십계명의 제5계명을 종교계명 즉 첫 번째 석판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다. 이처럼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이해나 바울의 해석은 일치한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분명히 종교적 계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식들에게만은 모두가 아가페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런 사랑을 자기 자식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사랑과 생명의 근원처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어버이는 나의 생명의 원천이며 내 존재의 창시자가 된다.

즉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와 그 권위를 보면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치 하나님과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도 아들에게 일체 의논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아들 이삭은 그에 대해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래서 율법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므로 신앙의 부모는 자기 자녀들을 종교 신앙으로 양육시킬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 성육의 방법으로 오셨던 하나님은 역시 공간(인간의 모습)과 시간(일시적)의 제약성 때문에 항구하지 못하고 일시적 현상에 불과 하다. 이러한 이유를 보충하기 위하여 성육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던 이유가 있게 된다. 자연계시만으로는 인간의 신앙심에 충족을 못하여 결국은 인간 모두가 각기 우상을 만들고 말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시적 인간으로 역사의 중앙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목적은 구속사업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는 특별하게 인간의 눈에 보여 준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계시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만 볼 수 있었을 뿐 현대인들에게는 다시는 볼 수 없는 과거 사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저 일시적 계시도 아니고 또 과거적 계시도 아닌 항구적인 현재적 계시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기 위해서 아버지로서의 계시가 있다. 그것은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육신의 아버지는 가장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항존적인 형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2의 성육의 계시로 해석을 하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는 경우에 따라 선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아버지도 있다. 그래서 한때 교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한 아버지를 보이는 신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9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을 도용하여 인간을 신격화 하고자 했던 일이 그 옛날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왕하 2;12에 엘리사는 하늘로 산채로 승천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하며 탄성을 울렸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부모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세상에서 보여지는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리켜 이렇게 아버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표현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된다. 하나님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자"라 한 출애굽기의 표현은 대단히 후기 철학적 개념이다.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창세기의 표현도 권세와 영광과 힘을 묘사한 덜 완전한 표현이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열왕기서의 표현도 왕 되신 하나님을 뜻하므로 정복과 승리에만 중독된 전쟁의 용사로서의 묘사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들은 모두가 다 그 동안 유대 민족이 찾았던 그리고 그들의 처지와 필요에 의해서 요청되었던 그들의 신이었을 뿐이지 적어도 세계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신은 아니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하나님이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옐로힘 하나님은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 즉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나 야훼 신은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과 그 후손인 겐 족속의 신이었으나 야곱과 그의 후예인 모세의 의해서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 된 그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두 얼굴과 그 계보이다. 그러면 신약 성경의 하나님 다시 말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었을까? 신약성경 누가복음 1장31절-32절에 보면 천사가 나타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전해 준 말이 나온다. 마태복음5장44-45절에 하나님을 가리켜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밖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은 이와 같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예수님은 왜? 그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을까? 세상에서 아버지야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아버지의 형상이었단 말인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 그 형상이 무엇인가? 눈과 코와 입일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그 사랑의 마음 바로 그 아가페이다. 하나님의 아가페를 인간의 마음 속에 넣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이 하나님의 형상인 아가페를 누구나 다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그 사랑을 보여 주듯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도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의 생명도 바칠 수 있는 똑같은 아가페 사랑을 갖고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은 모세의 신 야훼처럼 비윤리적 신앙을 요구하는 신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엘로힘처럼 극윤리적 신앙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신은 윤리적 종교적 신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범하시면서 병든 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번도 의의 명목으로 칼을 들어 본적도 없었고 종교를 위해서 비윤리적 행위를 보이신 적이 없었다. 즉 종교가 윤리 위에 있거나 윤리가 종교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윤리와 종교가 따로 없는 종교 곧 윤리요 윤리 곧 종교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강령이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사랑의 구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깨닫게 한다.

5월의 가정의 달에 이인식 목사의 "아바 신학"은 한국교회와 핵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 신선한 의미를 줄뿐만 아니라 고령화 사회의 경로 사상에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자유롭고 떳떳하게 예절을 세우며 당당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이 공경하는 부모를 둔 자녀인 것을 깨닫는 자이다. 돈이 많다 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권세를 갖고 고관이 되었다고 해서 존경받는 것도 아니다. 성실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인인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자세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아바 신학"을 통하여 효도의 신앙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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